화가 이야기 2- 호주 윤석원 화백

‘재호 화가 윤석원 화백(전 한남대 교수)께서 고급 화보집 1권을 한인회에 기증하셨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2008년 2월 이런 기사가 호주 교민신문에 올라 와있다. 윤석원 화백은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양화 구상부문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호주미술협회 프로페셔널 멤버십(NAVA-National Association Visual Art)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여준(16회) 동문의 아버님이시다. 이멜만 주고 받다가 귀국하여 술잔을 나누었다. 그는 아버지 이야기는 거의 안 했다. 그를 배우려면 아버님을 먼저 배워야 했다.

“내가 방송국의 그래픽 디자인 책임자였을 때 하루는 충청도 제천에 있는 한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졸업한 자기 제자 하나를 데리고 나를 찾아 오셨다. 형편이 어려워 자기가 돌보며 길렀다는 그 제자를 디자이너로 취업을 부탁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입사 자격 요건이 되지 않아 안됐지만 나는 그 무모(?)한 선생님의 제자 사랑에 감동하고 말았다. 저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선생님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마침 ‘달려라 중계차’라는 어린이 프로그램 시간에 어린이 엽서 미술작품을 모아 평가해 주는 코너를 쉽지 않게 만들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하루 10분씩, 웬만하면 자기 작품이 소개되는 코너였기에 1년 가까이 어린이들 에게는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 이였는데 프로 못지않게 더 유명 해진 것은 지도하는 ‘윤석원 선생님’ 이였다. 지방에 스케치를 갈 때면 아이들이 몰려와 윤석원 선생님~부르며 방송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명한 선생님께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려고 난리들 이였으니 말이다. 그 윤석원 선생님 궁금하지 않은가? 저명 인사가 된 덕에 한남대 교수가 되어 후진 양성을 위해 힘쓰다가 호주로 가신 것으로 연락이 끊어 졌지만 그분은 그의 성품처럼 담백한 향기가 묻어날 만큼 진솔한 그림을 그린다. 참, 지금도 자신의 제자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 온 것을 기억 하실지 모르겠다” (한동수 PD 이야기 중에서)

 
<윤석원 작 시디니의 워이워이 늪> 72.7X53cm

“그림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그것을 봄으로써 무언가를 배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사물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면 우리의 즐거움은 모방으로서의 그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수법이라든가 색채 또는 그와 유사한 요인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요술사와 같이 어떤 대상을 조금씩, 때로는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미학상의 차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이 설명했다. 그는 그림의 참뜻이 신의 피조물인 대상을 정확하게 모방하는 일이라 했으며, 그 때 사람들은 그림에서 무언가를 배우며 동시에 즐거움을 얻는다고 했다. 그가 말한 ‘배운다’는 뜻은 곧 대상이 대상으로써 존재하는 비밀을 안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가의 행위를 모방이라고 강조했던 것은 바로 자연을 창조자의 눈으로 보려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가는 창조자인 신의 의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실물과 똑같이 그려냄으로써 새들이 날아들어 가지에 앉으려 했다는 솔거(率居)의 일화는 우리네 조상들의 미의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사물이 인간의 눈에 새롭게 발견되기를 원했던 게 아니라 사람의 눈이 사물의 본래 모습과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미의식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인들을 통해 드러났던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재호 화백 윤석원씨. 화가로서의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한 그 예술 행위의 본질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예술 행위가 자연의 비밀을 그대로의 모습에서 발견해내려는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수법이라든가 색채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과는 달리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화풍을 견지해 온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창 창작에 몰두하던 70년대, 그가 보여준 극사실적 경향은 당시 한국 화단에서 그 어떤 작가보다 앞섰던 것으로 평가 받았다. 미술평론가 박용숙씨는 윤 화백에 대해 “그럼에도 이렇다 할 사건이 피지 못했던 것은 여러 가지로 불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서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그려낸다는 의미가 어떤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70년대 초반 아방가르드 운동이 화단을 휩쓸던 시기, 극사실적 아방가르드 화풍을 견지했던 그는 그러나 화단의 이방인이었다. 

윤 화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 (작가의)눈이 곧 사물이고 사물이 곧 눈이었던 그의 엄숙주의가 분화하기 시작했고 그 틈새에 대상에 대한 그의 농축된 감정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정직하고 올곧은 붓놀림이 자유로워졌고 사물을 보는 눈에도 영감이 담겨 사물을 어루만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의해 그려진 사물, 풍경이든 인물이든 그 대상의 선은 한결 너그러워졌으며 생기 있고 화려한 색채들을 뿜어냈다. 지난 90년대 초 윤 화백이 열 번째 개인전을 열 때 평론가 박용숙씨는 “윤 화백의 작품을 보면 꽃의 비유를 생각하게 된다”면서 “그의 작품들은 완벽하리만큼 색채가 홀로서기에 돌입해 있으며 그 색채의 자유로운 리듬은 꽃의 향기처럼 우리의 시선을 열락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 열락의 기쁨을 끌어내기 위해 그는 원근의 거리감을 무너뜨리며 색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켰던 야수파나 나비파의 혁명적인 실험처럼 운 화백의 작품에서도 심상찮은 바람이 일고 있다”고 덧붙였다. 

90년대 호주로 건너와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그는, 이후 한국을 오가며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최근 에핑 지역에 작업 공간 및 화랑을 마련하고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가 시내 중심지인 QVB 내 Vencent Art Gallery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극사실주의 경향을 보였던 70년대 작품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풍과 작가의 풍부한 감정을 녹여낸 색채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기사 발췌-


http://www.shinilhigh.or.kr/webzine/0804/main.asp?content=01

==================================================================


[문화] '정통 아카데미의 산 증인', 재호화백 윤석원씨 개인전

The Sydney Korea Herald

입력 : 2005-05-20 11:37   메일 : herald@koreanherlad.com.au


‘그림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그것을 봄으로써 무언가를 배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사물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면 우리의 즐거움은 모방으로서의 그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수법이라든가 색채 또는 그와 유사한 요인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요술사와 같이 어떤 대상을 조금씩, 때로는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미학상의 차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이 설명했다. 그는 그림의 참뜻이 신의 피조물인 대상을 정확하게 모방하는 일이라 했으며, 그 때 사람들은 그림에서 무언가를 배우며 동시에 즐거움을 얻는다고 했다. 그가 말한 ‘배운다’는 뜻은 곧 대상이 대상으로써 존재하는 비밀을 안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가의 행위를 모방이라고 강조했던 것은 바로 자연을 창조자의 눈으로 보려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가는 창조자인 신의 의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실물과 똑같이 그려냄으로써 새들이 날아들어 가지에 앉으려 했다는 솔거(率居)의 일화는 우리네 조상들의 미의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사물이 인간의 눈에 새롭게 발견되기를 원했던 게 아니라 사람의 눈이 사물의 본래 모습과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미의식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인들을 통해 드러났던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재호 화백 윤석원씨. 화가로서의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한 그 예술 행위의 본질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예술 행위가 자연의 비밀을 그대로의 모습에서 발견해내려는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수법이라든가 색채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과는 달리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화풍을 견지해 온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창 창작에 몰두하던 70년대, 그가 보여준 극사실적 경향은 당시 한국 화단에서 그 어떤 작가보다 앞섰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미술평론가 박용숙씨는 윤 화백에 대해 “그럼에도 이렇다 할 사건이 피지 못했던 것은 여러 가지로 불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서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그려낸다는 의미가 어떤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70년대 초반 아방가르뜨 운동이 화단을 휩쓸던 시기, 극사질적 아방가르뜨 화풍을 견지했던 그는 그러나 화단의 이방인이었다.


윤 화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 (작가의)눈이 곧 사물이고 사물이 곧 눈이었던 그의 엄숙주의가 분화하기 시작했고 그 틈새에 대상에 대한 그의 농축된 감정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정직하고 올곧은 붓놀림이 자유로워졌고 사물을 보는 눈에도 영감이 담겨 사물을 어루만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의해 그려진 사물, 풍경이든 인물이든 그 대상의 선은 한결 너그러워졌으며 생기 있고 화려한 색채들을 뿜어냈다. 


지난 90년대 초 윤 화백이 열 번째 개인전을 열 때 평론가 박용숙씨는 “윤 화백의 작품을 보면 꽃의 비유를 생각하게 된다”면서 “그의 작품들은 완벽하리만큼 색채가 홀로서기에 돌입해 있으며 그 색채의 자유로운 리듬은 꽃의 향기처럼 우리의 시선을 열락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 열락의 기쁨을 끌어내기 위해 그는 원근의 거리감을 무너뜨리며 색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켰던 야수파나 나비파의 혁명적인 실험처럼 운 화백의 작품에서도 심상찮은 바람이 일고 있다”고 덧붙였다.


90년대 호주로 건너와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그는, 이후 한국을 오가며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최근 에핑 지역에 작업 공간 및 화랑을 마련하고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가 시내 중심지인 QVB 내 Vencent Art Gallery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극사실주의 경향을 보였던 70년대 작품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풍과 작가의 풍부한 감정을 녹여낸 색채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전시회 일정 : 2005년 6월7일부터 13일(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전시 장소 : Vencent Art Gallery(Level 2, Queen Victoria Building, 455 George St, Sydney(9264 0015)


http://koreanherald.com.au/bbs/board.php?bo_table=news&wr_id=4925&page=191&page=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