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론〕

정의지


엔그램과 재생되는 ‘기억-이미지’

 

 

 

김성호(미술평론가)

 

 

 

지금까지 정의지가 선보인 작품들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버려진 일상의 오브제를 끌어들여 그것을 조각화하는 재생(revival) 시리즈이고, 하나는 버려진 오브제 위에 안료를 뿌려 색의 옷을 입히는 개념적 성향의 엔그램(engram) 시리즈이다.

 

재생 시리즈는 버려진 양은 냄비를 모아, 코뿔소, 물소, 산양, 천산갑, 수사슴, 멧돼지, 물소와 같은 야생동물을 실물보다 큰 규모의 입체로 만든 것이다. 인공의 오브제들을 찌그러트리고 짓눌러 놀랄만한 솜씨로 재현해낸 동물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문명/자연, 소멸/소생 혹은 망실/재생과 같은 대립항들을 자연스럽게 연상케 한다. 즉 버려진 문명의 폐물이 작가의 재료학적 탐구로 인해 자연의 생명체로 소생한 것이다.

 


정의지, Revival-buck / 295x140x280(cm) / 버려진 양은 냄비, 리벳, 철, 스테인리스 / nickel-silver pot, rivet, steel, stainless steel / 2011년


 

 

 

엔그램 시리즈는, 지역의 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폐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신발, 찬합(饌盒) 형식의 쟁반,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카드 계산기와 같은 포스기(POS/point-of-sale) 위에 안료를 뿌려 색옷을 입혀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물감을 만드는 안료의 질료가 광물성, 식물성, 동물성 등으로 다양한 것에 착안하면서 ‘발견된 오브제의 물질적 속성’과 유사한 상태의 안료들을 선택하여 서로를 만나게 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붉은 쟁반 위에는 나무 소재의 붉은 안료를, 푸른색 신발 위에는 합성수지와 같은 파란색의 안료를 각각 뿌려 색옷을 입히는 것이다.

 


정의지, engram-신발 / 30x30x12(cm) / 버려진 신발, 안료, 부산 서동 재개발 지역 / 2012

 


정의지, engram-쟁반 / 30x30x12(cm) / 버려진 쟁반, 안료, 부산 서동 재개발 지역 / 2012

 


정의지, engram-포스기 / 30x30x12(cm) / 버려진 포스기, 안료, 부산 서동 재개발 지역 / 2012

 

 

 

우리는 여기서 작가 정의지가 실천하는 두 가지 작업의 차별성과 더불어 공유점에 주목한다. 우선 전자가 해체된 경험적 요소들을 끌어 모아 구축적 질서에 재편시키는 일련의 귀납적 방법론이라면, 후자는 엔그램으로 설정된 개념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오브제들을 실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연역적 방법론의 작품들이라 하겠다.

 

상이한 듯 보이는 두 가지 방법론은 실상 ‘기억 흔적’이라 번역되는 엔그램(engram)이라는 후자의 주제의식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양자는 모두 '사용되었다가 버려진 일상의 오브제들'이라는 작품의 바이오그래피에 초점을 맞추면서, 소멸, 망실과 같은 ‘폐기의 흔적’으로부터 재생, 부활과 같은 ‘생명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창작 언어들과 만난다. 그것은 망각의 심층에서 과거를 사건으로 되뇌는 기억의 경험이며, 심상(心象)에 잠재된 이미지를 물질로 현실화하는 작업이 된다. 엔그램이 뇌의 피질 연합역의 뉴런들로 이뤄진 시냅시스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기억을 떠올리는 생리학적 작용과 그 구조라고 할 때, 정의지의 재생(revival)시리즈는, 버려진 사물에 대한 작가의 현재적 기억이 망각의 구조와 지속적으로 교차하면서 , 이러한 엔그램이라는 주제의식을 또 다른 형태로 실천한다고 하겠다.

 

베르그송이 이미지를 잠재적 기억(memoire virtuelle)으로부터 물질(matiere)로 현실화된 ‘기억-이미지’의 존재로 정의하고 있듯이, 정의지에게서 엔그램이라는 ‘기억 흔적’은 양은냄비의 질료가 명료하게 남겨진 ‘재생 시리즈’의 조각품들로, 색색의 안료들로 옷을 입은 ‘엔그램 시리즈’의 오브제미술들로 현실화된다. 그런 면에서 베르그송이나 정의지 모두에게서 이미지란 ‘잠재적 기억의 현실화’이며 여전히 물질이자 실재이다.

 


정의지, engram-산호 / 30x30x12(cm) / 버려진 산호, 안료, 부산 서동 재개발 지역 / 2012

 

버려진 사물들에 자신의 기억을 감정이입의 방식으로 교차시키는 정의지의 작업은 이제 숨고르기를 하는 교차지점에 서 있다. 그는 ‘재생 시리즈’에서 양은냄비로 대별되던 금속재료의 한계를 목재나 플라스틱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하면서 엔그램의 주제의식을 확장하려고 계획 중이다. 세계를 대면하는 역량 있는 작가가 외부자극으로부터 자신의 창작의지를 끊임없이 반영하고 투사해내듯이, 작가 정의지 역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끊임없이 자극받아 자신의 ‘엔그램’이라는 주제의식을 보다 더 공통의 소통 담론으로 확장해나가길 기대해본다. ●

 

 

 

 

 

출전 /

김성호, “엔그램과 재생되는 기억-이미지”, (정의지 작가론), 평론 매칭 프로그램,『2012 수원신진작가 발굴전-하마하마(2012. 10. ~10. 15, 수원미술전시관)』, 전시카탈로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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