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일반〕
베르그송, 들뢰즈의 철학에 내재한 가상현실 (2편)
김 성 호*
IV. 반투명한 가상현실 : 운동성의 이마쥬와 다중감각의 주체
디지털 가상현실 속에서 가상과 현실은 그 정체성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는 게 다반사이다. 물론 모두가 실재이지만 현실화의 과정 중인 가상과 이미 현실인 존재가 납작하게 들러붙어 있어 구별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가상현실VR과 가상공간CS이 혼성되어 있어 그 경계 자체가 식별 불가능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게다가 매개하는 미디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정되는 이마쥬의 투명성 차원인 비매개성immediacy과 과매개성hypermediacy의 구분마저 모호한 경우도 있다. 그런 까닭은 가상현실 공간 안에 현실화되기 이전의 가상이 현실화의 과정 속에 내재된 운동-이마쥬의 잠재성의 특성 때문이다.
운동-이마쥬가 작동하는 디지털 가상현실의 장은 들뢰즈의 눈을 빌어보면 마치 ‘주름le pli’과 같은 공간이다. 주름은 들뢰즈가 ‘하나이면서 무한한 세계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의 독특한 구조를 새롭게 해석한 개념이다. 즉 이 세계를 선의 무한소인 굴곡, 즉 주름들이 중첩되어있는 연속체로 바라보는 개념이다. “주름위의 주름은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두 흐름들 또는 인식의 두 흐름들”33)처럼 다양한 연속체이다. 각자의 무수한 주름들은 결코 똑같은 방식으로 접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질적 차이를 지닌 다양체 또는 복수성들multiplicités이 존재하고 있기에 때문이다.
들뢰즈가 바라보는 세계는 주름들로 가득하고 이 주름들 안에는 잠재적 다양체 즉, 복수성들로 가득하다. 들뢰즈의 눈을 빌어 바라보는 우리의 가상현실 역시 주름들과 다양체로 가득하다. 여기서 무수한 주름 속의 다양체 혹은 복수성은 차이가 있는 실재의 자격으로서 현실화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 투명하지만 반대로 어떠한 양태로 현실화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따라서 필자는 잠재성의 가상을 투명과 불투명의 혼재로 바라보면서 가상현실을 반투명한 실재로 정의한다.
우리가 정의하는 가상현실의 반투명함은 들뢰즈가 정의하는 주름의 세계 뿐 아니라 알œuf과 같은 상태와 공유한다. 그런 까닭은 잠재성의 현실화의 과정 때문인데, 이 현실화의 과정을 알로 비유하는 까닭은 “현실화에는 어떤 법칙이나 규칙이 없기 때문'34)이다. 알의 현실화 과정은 내포량을 분배하고 쪼개며 분화되고 개체화되는 것이다. 알이란 들뢰즈에게 있어 기관들이 분화되지 않은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35)이며 “비생산적이고 비소비적이지만, 욕망 생성의 모든 과정을 등록하기 위한 표면을 제공”36)하는 미분화 단계의 장이다.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로서의 잠재적 실재의 양태이다. 이러한 불투명(우리의 논의 식으로)하고 잠재적인 존재인 알은 “기관의 조직화와 유기체로의 확장은 물론 계층의 형성 전에 이미 가득한'37) 존재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기관 형성 전에 “이미 운동 중인”38)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재는 운동성이자 운동하고 있는 경향들39)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가상현실을 검토하는 우리의 논의 식으로 말하면 이러한 주름과 다양체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와 알과 같은 공간은 실재라는 점에서 한 없이 투명하지만 현실화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운 무한한 잠재적 존재라는 점에서 불투명한 실재인 셈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공간과 비교하는 우리의 디지털 가상현실을 ‘반투명한 실재’로 재정의한다.
반투명한 디지털 가상현실에는 가상으로부터 현실로 이르는 잠재적 존재들의 무수한 운동-이마쥬들로 가득하다. 오늘날 디지털 가상현실이란 컴퓨터 미디어를 사용해서 현실계의 3차원의 이마쥬의 가상적이고 인위적인 환경을 구축하고 그것에 대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상태나 그에 관한 기술적 장치를 지칭한다. 이러한 기술적인 방식은 3차원 이마쥬를 기본적으로 지각하는 시각은 물론이고 그에 부가되는 청각과 촉각 그리고 나아가 후각, 미각의 차원까지를 아우르는 인간의 오감을 통해 가상을 실제적 차원과 유사하게 경험시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상으로부터 현실에 있는 잠재적 존재들의 무수한 운동들을 체감하려는 유저들의 참여를 통해 무수한 운동들은 다중감각이 필요한 메타-이마쥬의 형식으로 생산, 소비된다. 텍스트, 이마쥬, 오디오, 비디오 등의 다중 매체가 동원되어 시각은 물론이고, 청각, 후각, 촉각이 결합된 다중 감각으로 이러한 운동들이 경험되기에 이른 것이다.
디지털 가상현실에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운동-이마쥬들과 그것을 대면하는 유저들의 다중감각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 있는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신체 그것도 현실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신체와 관련된 사유에 근거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베르그송에게서는 직관intuition으로 들뢰즈에게서는 정신분열증schizophrénie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간략히 살펴보자.
베르그송에게서 신체는 이마쥬와 더불어 주요한 인터페이스인 셈이다. 그에게서 신체는 ‘생명의 단일성unité de la vie’40)으로서 살아있는 물질이면서 이마쥬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베르그송에게서 신체는 “실제적 행위의 중심”41)을 차지한다. 이 중심에서 지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신체 역시 하나의 물체일 따름이며, 물질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서 신체는 모든 물질들이 존재하는 방식인 ‘이마쥬’의 차원으로 함께 이해된다. 이마쥬는 결국 신체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용어가 되면서도, 심리적, 질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우리의 신체와 기억, 지각의 양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를 대변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기억이나 지각이라는 것은 물질이라는 이마쥬 전체로부터 우리의 신체가 받아들이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결국 신체는 이마쥬와 대면하는 인간주체의 행위 중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베르그송 철학에 나타난 기억과 지각이라는 신체의 활동 중, 지각perception이라는 개념을 다음처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각은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이라는 신체적 감각 기능(sens)으로부터 유발되는 흐릿하거나 명료한, 시끄럽거나 고요한, 비릿하거나 은은한, 또는 달거나 맵거나 하는 식의, 표상적représentatives 감각 혹은 신경생리적 감각과 공유를 하면서도 결코 그것들을 전칭(全稱)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감성의 개념인 정념affection42)과 섞여 있기 때문이다. 43) 베르그송에 의하면 주로 ‘지각은 밖으로부터 정념은 내부로부터 세계와 소통’하지만 지각과 정념이 결코 완전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지각은 정념에 오염된 체계이자, 정념은 지각에 섞이는 불순물이다.
베르그송에게서 기억, 지각, 정념의 체험들은 결국 베르그송에게서 신경계는 우리가 우주 속에서 그 전체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양태로 주요하게 다루어지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격성personalité, 즉 인격의 존재자이자 동일성의 존재자인 자아(Moi)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자아 혹은 자의식(Moi)은 영속적이고 총체적인 인격성의 존재자이다. 그것은 결코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용인하지 않는 한 덩어리의 ‘생명의 단일체unité de la vie’44)로서 ‘연속적 유동성fludité successive’을 지닌다. 자아는 지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자아가 체험적 시간인 지속 속에서 이마쥬를 대면하는 방식은 ‘직관intuition’으로 가능하다. 그것과 달리 지성은 단지 과학적 추론에나 적합한 능력일 따름이다. 이마쥬의 본질은 본래 역동적이고, 생동적이며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과 연관되기 때문에 지성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이 지속을 방해하고 삶과 운동을 정지시킬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서 이마쥬는 ‘직관’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세계란 ‘지속duree’의 시공간이란 점에서 그 세계가 늘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 변화évolution 그리고 ‘삶의 약동elan vital'의 연속이 가득한 세계이다. 그래서 나라는 삶의 주체가 지성이 아닌 직관(기억, 지각, 정념 등이 포함된 총체성)으로 그것을 대면할 수 있었다.
한편, 들뢰즈에게 있어 세계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알’와 같은 시공간이란 점에서 그 세계가 늘 변화와 운동성이 가득한 세계이지만, 주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인 까닭에 세계를 대면하는 주체는 그의 철학에서 더 이상 나라는 주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미리 전제된 모든 공리와 기관들을 거부해왔던 들뢰즈의 철학에서 주체란 타자의 출현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의 철학에서, 현실과 더불어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 범주인 잠재적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언제나 타자였다. 나아가 그에게 주체의 의미는 익명의 거대한 언표énoncé 덩어리이거나 분열된 자아의 모습으로 걸음을 옮겨 이제는 ‘정신분열증 환자schizophrénie’와 같은 차원'45)으로 이동되었다.
그런 면에서 운동-이마쥬라고 하는 메타-이마쥬를 대면하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다중감각의 주체는 들뢰즈의 철학의 관점에서 더 이상 그것에 참여하는 유저의 현실적 주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그 주체란 다름 아닌 현실계의 지층으로부터 별리된 채 기관 없는 신체의 모습으로 알의 양태로 실재하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분열된 자아로서의 주체이다. 들뢰즈 표현을 빌면 그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모습이다. 그것은 비관론이 절대 아니며 긍정적인 가상현실 체험과 관련된 진술을 도래케 한다. 그것은 ‘-이다être’의 영역이 아니라 재현될 수 없고 한계지어질 수 없는 ‘-되다devenir’의 차원인 ‘사건’이 우리와 부딪히는 지점이다. 그것은 또한 “동사 안에 내포된 것으로서”46) 끊임없이 변모하는, 가상현실 체험 안의 우리를 올바로 규정할 수 있게 할 것이다.
V. 반투명성과 새로운 신체를 요청하는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
가상이 현실로 현실화되는 과정 자체가 가상현실이고 인간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가상현실 체험이라고 할 때, 그 곳에는 우리의 신체가 자리한다. 가상현실은 베르그송과 들뢰즈가 언급하는 잠재성이 웅크리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사건의 장이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자기 동일성이 없는 시뮬라크르들이 벌이는 무수히 사건들의 장이다. 사건 발생 이전에 사건의 장은 이미 실재이다. 그것이 잠재성의 공간이지만 언제나 실재라는 차원에서 가상현실은 투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떠한 양태로 현실화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가상현실을 투명과 불투명이 혼재하는 반투명의 실재로 정의한다. 이러한 반(半)투명한 가상현실에 우리의 신체가 개입하는 일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들뢰즈 식으로 언급하면 특이성이 작동하는 사건이 된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사유와 같이 우리의 신체가 기억, 지각, 정념을 통해 나아가 직관을 통해 이마쥬를 대면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사유와 같이, 우리의 신체가 ‘운동-이마쥬들’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가상현실은 이미 실재이지만,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신체의 개입'이라는 하나의 사건 또한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성을 부활시켜 현실을 만들어가는 유의미한 실재이다. 관건은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사건(들)에 우리의 신체가 들뢰즈 철학이 야기하고 있는 탈주제척 신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이라는 사건의 장에 개입하는 신체는 더 이상 대상을 객체의 형태로 떨어뜨려내는 이성적 주체로서의 신체가 아니다. 그 신체는 알과 같이 기관 없는 신체이거나 분열된 자아, 정신분열증적 주체로서의 신체이다. 그것은 다분히 현대철학이 야기한 ‘주체 이후의 주체 아닌 주체'인 셈이지만, 이러한 신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가상현실에 개입하는 우리의 신체가 맞닥뜨리는 가상현실 체험에 관한 논의를 매우 활력 있게 하는 철학적 기반이다.
앞서의 필자의 표현처럼 은유적으로 재정의해보면, 가상현실 체험의 신체는 베르그송의 투명한 신체(지속에 관여하는 체험적 삶의 주체라는 점에서)와 들뢰즈의 불투명한 신체(주체의 위치를 끊임없이 포기하고 타자에 의해 그것이 유동한다는 점에서)가 함께 어우러진 반투명한 신체이다.
결국 우리의 논의에서, 디지털 가상현실과 디지털 가상현실 체험을 이해하는 관건은 반(半)투명으로서의 가상현실과 반(半)투명으로서의 신체를 정의하는 일이다.
사실 가상현실 연구에 있어서는 투명성transparency과 불투명성opacity에 관한 고찰은 오랜 논란거리였다. 미디어의 존재감이 신체와 적용하는 이마쥬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차원이 그것이다. 보편적으로, 미디어의 존재감이 탈각되어 신체의 가상현실 몰입이 가능해지는 차원을 ‘비매개성immediacy’이라 하고 미디어의 존개감이 신체에 과도하게 개입해 가상현실 몰입이 불가능해지는 차원을 ‘과매개성hypermediacy’이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컴퓨터를 통한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가상공간cyber-space은 키보드, 모니터, 외장하드, 화상 카메라, 프린트, 팩스와의 연동을 통한 멀티미디어의 구현 외에도, 여러 창을 동시에 띄어 놓고 다른 유저들과 커뮤니케이션하게 만든 월드 와이드 웹과 같은 장치를 통해 과매개성이 발현되는 장으로 평가된다.
반면에 가상현실VR의 장은 고글과 같은 두상장착화면, 광섬유 데이터 장갑, 대형 스크린, 원격현전을 유도하는 각종 시뮬레이션 장치와 같은 미디어들의 과매개성이 두드러짐에도, 그것들의 존재감이 유저의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 존재했던 탓에 탈각되어 결국 비매개성의 차원으로 작동하게 된다. 가상현실은 결국 근본적으로 비매개성의 차원을 견지함으로써 투명성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상의 강조점은 가상현실 체험의 실제에서는 여실히 빗나간다. 유저의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무수한 미디어들의 존재감이 완전히 탈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저의 몰입을 최상화시키지 못하는 가상현실 장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가상현실은 유체이탈의 경험과 같은 몰입적 효과를 거두지 않는 이상 언제나 비매개성과 과매개성의 두 차원 안에서 이동한다.47) 미디어 이론가들에게서 그것은 현실계의 신체가 개입하는 완벽한 가상현실 체험은 불가능하고 언제나 현실계의 존재감을 동시에 지각한다는 점에서 복합현실Mixed Reality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가상현실의 실재는 몰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차원에서 굳이 언급하면 반(半)매개성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표현대로 반(半)투명성의 차원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디지털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우리의 신체 또한 반투명적이다. 가상현실에의 완전한 몰입 자체가 불가능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별리된 가상현실의 경험이 유저의 신체적 정체성을 계속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 촉지각의 문제로부터 인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현실적 관성을 으그러뜨리며 현실 속으로부터 온 유저의 가상현실으로의 몰입을 방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 신체의 오감 및 생리적 현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가상현실에의 몰입을 극대화하려는 연구들이48) 최근 지속되고 있다. 현재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은 3차원 인터페이스를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3차원의 인터페이스는 사용자의 컴퓨터 사용을 더욱 쉽게 해줄 것이며 가상현실과 같은 상황 창출을 보다 용이하게 해 줄 것이다. 가상현실 구현을 위해서는 이제 미디어 장치의 존재감을 더욱 쉽게 망각하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미디어가 간소화되면서 그 기능은 첨단화되고 있다. 가상현실에서는 결국 사용자와 구축된 가상현실 사이의 매개체인 미디어의 간소화를 통해 인터페이스 없는 인터페이스의 세계가 구축될 날도 머지않다는 전망이다. 즉, 가상현실 구현 장치에서는 버튼도 없고, 스크롤바 혹은 아이콘과 같은 도구들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어 현실세계 같은 느낌이 즉자적이고 순간적으로 들게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세계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현실계에 가능해지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가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언제나 이상론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이상론에 일정부분 근접해가는 가상현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해진 것은 완벽한 몰입을 통한 가상현실 체험에 대한 투명성(매체적 차원에서는 비매개성)과 새로운 신체(들뢰즈의 사유와 같은)에 대한 인식을 요청하는 가상현실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물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현실의 원래 출발이 원격현전telepresence이나 유체이탈과 같은 공상이나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소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진지하게 사유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1989년 가상현실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물론 이전에 가상현실 구축에 대한 시스템 연구들은 있었지만), 제론 레니어J. Lanier가 켈리Kelly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다음과 같은 언급과 함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蝴蝶之夢)을 곰곰이 함께 성찰해 볼 일이다.
“가상현실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체를 이용하여, 가상현실에서 선택한 신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신체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상현실에서의 신체는 인간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가상현실에서 여러분은 산맥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은하계나 플로어 위의 조약돌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혹은 피아노... 내가 피아노가 되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일순간에 저 하늘의 혜성이 되기도 하고, 또 얼마 후에 아주 높은 곳에서 여러분의 친구를 내려다보는 혜성보다 더 큰 거미로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49)
“언제인가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물화(物化)라는 것이다.” 50)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