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일반〕
융합예술의 개념
김성호 (미술평론가)
서론
이 글1)은 융합예술의 개념을 검토한다. 21세기에 대두되고 있는 융합예술에 관한 실천적 논의는 대개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 핵심도 대개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예술의 매체적 확장과 타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형식적 이종혼성에 집중하고 있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필자의 분석이 예시하고 있듯이 말이다. ①‘예술+예술’(예술의 장르별 통합), ②‘예술+비예술’, ③‘예술+테크놀로지’, ④‘예술+컨텍스트’ 2)
반면 융합예술의 본질적 개념이란 20세기 포스트구조주의의 담론에서 구체적인 뿌리가 찾아진다. 그것은 융합이라는 개념과 마치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데리다의 해체, 들뢰즈의 정신분열증과 같은 개념들과 마주한다. 융합과 해체가 어떻게 같은 뿌리로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본론에서 이 상이한 개념이 만나는 지점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융합예술의 개념을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일상과 차별화되면서 지켜왔던 예술의 독자적 영역이 모호하게 되면서 초래된 오늘날 예술의 위상을 보드리야르의 ‘예술의 무가치’론과 아서단토의 ‘예술종말론’을 검토하면서 예술과 일상의 통합이 결국 오늘날 융합예술의 개념을 전개시켜왔음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개입하는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의 노력이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하면서 과학이 접근하는 융합예술에 대한 오해 또한 세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이 글이, 미디어아트로 대별되는 융합예술의 위상이 오늘날 우리의 예술현장에 던지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 해체로부터 융합_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아이러니하게도, 융합(convergence, fusion)의 개념은 데리다(J. Derrida)의 해체(déconstruction)와 같은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들로부터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그런데 데리다에게서 해체란 부정적 파괴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 이상(plus d'une langue)”3)으로 더 이상 하나의 언어가 아님을 의미한다. 즉 해체란 자기 동일성을 지니지 않은 복수성(multiplicté)의 상태로, 어떤 중심을 만들지 않으며, 설령 중심이 있더라도 그 중심은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차연(différance)만이 적용되는 일종의 비위치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해체는 “스스로 해체되는(ça se déconstruit)”4)것이자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과 담론들 안에서 의미가 아직 미정인 상태로 남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운동, 즉 ‘탈-전유(ex-apprioriation)’의 운동들5)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고정된 중심을 거부하고, 잠정적으로 정해진 위치들이 끊임없이 떠도는 자유로운 놀이가 된다.
그렇다면 융합은? 융합 역시 다르지 않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차연의 결과이듯이, 데리다식式으로 말하면 융합 역시 차연의 결과에 다름 아닌 셈이다. 데리다가 융합이란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의 ‘텍스트’ 개념은 우리의 융합 개념과 부합한다. “우리가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텍스트이다.”6)라는 그의 언급처럼 그에게 텍스트란 생산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텍스트를 정신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생리학과 물리학까지 포괄하고자 한다.7) 아니 더 나아가 아예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8)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생산이라고 하는 텍스트성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에게 있어 생산성의 텍스트(우리가 융합으로 간주하는) 자체는 이미 해체론적이다. 텍스트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는 언제나 중층적으로 규정되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텍스트 내에는 이미 다른 텍스트의 trace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trace은 다른 trace들에 빚지면서 나타난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trace은 ‘trace에 trace을 더하는 제3의 trace’으로서 중첩된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텍스트가 생성하는 동시에 또 다른 텍스트가 소멸하기를 거듭하는 일련의 사건, 즉 상호텍스트성으로 가득하다. 즉 융합과 해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그가 머리말, 각주, 인용 등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텍스트 자체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듯이, 그에게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인용의 반복이요, 각주들의 짜깁기이다. 그것은 참조, 주석, 인용, 콜라쥬, 보충들로 둘러싸고 채우는 일을 한다. 9)
이것을 우리의 융합 논의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세계의 파편들 혹은 아주 미천한 보충물조차 이미 생산성의 텍스트이며 그것은 이미 세계인 것이다. 즉 차이들이(데리다의 차연들이) 만들어내는 무한 생성 운동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리학에서 수소, 중수소, 3중수소 등 가벼운 원자핵끼리 융합하여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융합(nuclear fusion)을 상기시키지만, 융합의 철학적 개념이 이것과 다른 점은 ‘그것이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잇고 있는 순차성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쉼 없는 운동의 양태로 무한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융합으로 바라보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이미 해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듯이, 우리의 논의 예술융합에서 융합이란 이와 같은 해체적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J. Derrida
2. 해체/융합_들뢰즈의 차이(différence)
융합과 해체의 상호텍스트성은 데리다의 철학에서보다 들뢰즈(G. Deleuze)의 철학에서 보다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메시지로 드러난다. 우리가 데리다의 차연과 관련한 해체로부터 융합의 개념을 도출해내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들뢰즈는 이러한 해체와 융합이 차이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로 묶여있다. 그의 해체/융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와 가타리(F. Guattari)의 공저에서 나타난 리좀(rhizome)에서 이러한 개념을 살펴볼 수 있겠다. 주지하듯 리좀이란 바랭이(crab-grass) 혹은 잡초(mauvaise herbe)처럼 뿌리 같은 형태로 변형된 복수의 줄기들을 가진 근경식물(plante sans racine)이다. 리좀은 복수성의 변형줄기를 통해서 수목식물(arbres-racines)의 법칙에 저항하는 반계통학(l'anti-systématique)을 실현한다. 그들이 언급하는 리좀의 6가지 법칙들10)에서 3번째 ‘복수성의 규칙(Principe de multiplicité)’은 이러한 차이들의 융합/해체의 개념을 전사한다. 그들은, 리좀의 복수성을 n-1이라는 수식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n은 일반적 개체이고 1은 우월한 어떠한 존재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리좀의 복수성은 하나의 우월한 어떤 존재를 덧붙임으로써 가능한 n+1의 차원의 복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월한 어떤 존재를 없앰으로써 가능한 n-1의 차원의 복수성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차이들이 ‘단일체(unités)’를 형성하지는 않지만, 운동체(mouvantes)로 존재하는”11) ‘탈중심적 복수성’으로 우리의 논의인 ‘융합/해체’에 다름 아니다. 리좀이란 출발도 도달도 없이 언제나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inter-être)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이면서도12) 파열(rupture)과 탈주의 선(ligne de fuite)을 종국까지 밀고 가는13)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리좀이란 ‘-이다(être)’의 존재이기보다는 ‘-되다(devnir)’의 존재, 즉 운동체의 존재인 것이다.
들뢰즈의 알(œuf)은 또 어떠한가?
알이란 들뢰즈에게 있어 기관들이 분화되지 않은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14)이며 “비생산적이고 비소비적이지만, 욕망 생성의 모든 과정을 등록하기 위한 표면을 제공”15)하는 미분화 단계의 장이다.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로서의 잠재적 실재의 양태이다. 이러한 불투명(우리의 논의 식으로)하고 잠재적인 존재인 알은 “기관의 조직화와 유기체로의 확장은 물론 계층의 형성 전에 이미 가득한”16) 존재이다. 기관 형성 전에 “이미 운동 중인”17)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존재인 알은 내포량을 분배하고 쪼개며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그것은 운동성이자 운동하고 있는 경향들18)인 실재이다. 들뢰즈에게서 운동(mouvement)이란 “전체 속에서의 질적 변화(changement qualitatif dans un tout)” 19)이듯이, 이질성이 지속하는 ‘차이의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운동을 생성한다. 물론 여기서 “반복은 본질적으로 재현표상과 다르다.” 20) 그것은 언제나 이질성의 반복인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의 비유 ‘리좀’과 ‘알’은 차이의 복수성이 만드는 융합이자 탈주의 운동을 지속하는 해체이다. 즉 융합/해체의 존재이다.
우리의 융합예술 논의에 따라 번안, 종합하면, 데리다에게서 융합이란 해체를 중심으로 한 차연의 지속적 생산에서 도출될 수 있는 개념이었다면 들뢰즈에게서 융합이란 해체/융합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차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데리다의 해체나 들뢰즈의 정신분열증 그리고 우리의 논의인 융합예술의 공통점이란 차이들이 생성시키는 무한한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G. Deleu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