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론_강형구〕
무형의 세계에 각인하는 허구적 리얼리즘
김성호(미술평론가)
화가 강형구가 두 곳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영은미술관의 '나는 당신을 본다(I see you)'라는 테마의 전시와 아라리오서울의 '각인(engrave)'이라는 주제의 개인전이 그것이다. 국내 미공개작을 중심으로, 자화상과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 얼굴과 손을 소재로 삼은 다양한 드로잉, 캐리커처풍의 소조각상으로부터 5m가 넘는 전신상에 이르기까지 그가 다양한 조형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되기의 사건 : 초상으로부터의 탈주와 자화상의 변형
그가 우리에게 선보이는 무수한 초상들은 모두 '작가 강형구의 변형체'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자화상으로부터 예술가, 유명인사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초상으로 확장되는 그것들은 작가 강형구가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의 되기'를 시도하는 '자아 변형'의 실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들뢰즈의 수평적 담론인 '~되기(devenir)'를 조형적으로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윤두서, 다빈치, 미켈란젤로, 로댕, 고흐와 같은 예술가의 초상들은 강형구가 이미 예술가이면서 '또 다른 예술가 되기'를 시도하는 변형에 관한 실험이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투사시킨 예술가들의 초상을 탐구하면서, 한 시대의 뛰어난 예술가들로 살아왔던 그들의 심층적 내면으로 잠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화두를 가지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창작의 시간 동안 잠시나마 '다빈치 되기', '고흐 되기'를 실천하는 강형구의 회화는 실상 예술가로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작품'이 됨과 동시에 하루하루를 '이미지로 성찰하는 일기'가 된다.

강형구, Man, 알루미늄에 유채, 120 x 480cm, 2010

그는 지금껏 200호 크기의 작품으로 300여명의 얼굴을 그렸고, 캐리커처 스타일로 700여명의 얼굴을 그렸다. 그의 말대로 '1000여명의 얼굴을 그렸다면 그것은 이미 초상의 의미를 떠나 한 사회를 그린 것'이 된다. 즉 형식은 초상이되, 그 내용은 끊임없이 초상으로부터 탈주하는 '무엇'이 된다. 그에게서 무수한 개인의 초상들은 “개인의 표정”을 그린 것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감정”을 탐구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강형구는 무수한 개인 초상들에 대부분 실명 혹은 이니셜의 작품제목을 붙이고 있음에도, '나의 그림 속 인물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라고 선언적으로 말한다. 예술가, 정치인, 미디어 스타 등 초상 속 그(녀)들은 실존했거나 실존하고 있는 인물들로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인사들이 대부분이지만, 강형구의 초상 이미지 안에서 그들의 고유명사는 대명사로 치환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나'라는 대명사들의 끊임없는 변형체로 존재한다. 강형구에게 있어 다빈치가 자신을 투사한 '나'의 변형이었듯이, 마릴린 먼로 또한 '나'의 변형이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나' 아닌 '~되기'를 실천하는 자화상의 변형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어두운 화면으로부터 끌어올린 '한 마리의 포효하는 호랑이'는 강형구의 변형이자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즉 '나'로부터 '호랑이 되기'를 실천하는 이 그림은 시장이 주도하는 이 시대에 결코 사육되지 않는 맹수와 같은 예술가로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성찰하는 '한 판의 자화상'인 것이다. 이 그림의 후속작으로, 강렬한 눈빛을 드러낸 채, 화난 호랑이의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강형구의 최근의 붉은 자화상은 '안일해지지 말라고, 초지를 지키라고...' 되뇌면서 이전의 자신의 다짐을 재확인한다. 이 작품은 그에게 비장한 각오를 재확인하고 결단을 선언하는 흡사 '회화적 혈서(血書)'와 같은 것이다.

시뮬라크르가 창출하는 허구적 리얼리즘 : '문'으로부터 '곰'으로
'나는 극사실 작가는 결코 아니다.'라는 작가의 진술은 곱씹어볼 만하다. 일루저니즘을 창출하는 '재현 의지' 자체가 특별히 없는 그에게, 극사실, 혹은 하이퍼리얼리즘이란 딱지는 오명일 따름이다. 피상적으로 대상과 닮아 보이는 그것은 실제로 허구의 이미지로 가득한 '거짓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화면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얼굴 주름, 피부의 세포질과 머리카락들은 작가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들어낸 거짓의 세계이다.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금빛 마릴린 먼로의 초상을 보라. 그것 역시 현실 혹은 사진이나 영화 등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먼로의 이미지를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더욱이, 놀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고흐, 온화한 눈빛을 한 미켈란젤로, 주름 가득한 노인이 되어 있는 마릴린 먼로의 초상은 말할 것도 없고 오드리 헵번과 마릴린 먼로의 합성으로 탄생한 얼굴초상은 완벽한 거짓의 세계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을 추출해서 허구를 창출하는데 몰입하는 강형구의 상상력 가득한 회화 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일견 우리가 본 듯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짓의 이미지이다.

강형구의 작업은 리얼리티의 끈을 붙잡고 캐리커처와 같은 왜곡과 변형을 수시로 감행함으로써 '사실' 위에 강력한 '허구'를 창출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팩션(faction) 혹은 메타픽션(meta-fiction)의 효과를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창출하는 허구의 리얼리즘'으로 해설한다. 주지하듯이,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라는 원본의 동일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판타스마(phantasma)'의 존재일 따름이지만,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세상의 운동적 질서를 창출하는 역동적 존재이며 보드리야르에게 그것은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적 존재이다.
우리는 강형구가 그려낸 여러 인물 초상들에서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시뮬라크르의 효과를 경험한다. 그것은 물론 그의 극사실적 조형요소로 인해 초래된 것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문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곰이라는 허구적 리얼리즘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그의 특유의 창작태도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문'이라는 글자를 뒤집으면 '곰'이란 글자가 되듯이, 객관적 사실을 시뮬라크르, 또는 허구적 리얼리즘을 통해 접근하는 그의 창작 태도는 왜곡과 변형이 어떻게 리얼리티보다 더 실재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효과는 허구적 리얼리즘이 극점에 이른 상태, 즉 왜곡과 변형이 극대화된 캐리커처의 형식이 작품으로 침투된 경우에 보다 더 선명해진다. 캐리커처가 원본의 비율을 의도적으로 배반하고 풍자나 해학을 유도하기 위해서 부분을 해체 혹은 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캐리커처 혹은 캐리커처와 같은 수준의 왜곡과 변형은 그의 극사실 인물에 내재한 허구를 수면 위까지 꺼내어 올리는 기제가 된다. 관건은 그것이 실재보다 더 실재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형구가 그린 우디 앨런의 캐리커처는 실재의 우디 앨런보다 더 실재 같다. 캐리커처와 같은 베토벤의 극사실 이미지는 또 어떠한가? 역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마(達磨)의 초상을 선화(禪畵)로 형식으로부터 허구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정밀하게 안착시킨 강형구의 달마초상은, 우리에게 전승되어 온 달마의 기괴한 생김새로 인해, 더 이상 리얼리티가 아닌 캐리커처와 같은 왜곡과 변형의 마술적 효과를 드러내기도 한다.

유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질문들
강형구는 48세에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나이 60의 연륜에 이르기까지, 200호 이상의 회화작품을 기준으로 한 해 평균 30여 점의 작품을 꾸준히 생산해왔다. 양이 결코 질을 담보하는 것이 아닌 만큼, 그는 막중한 창작의 노동력을 작품 생산량에 집중하면서도 그 안에서 오직 세상에 하나뿐인 작가 강형구의 다양성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극단의 한계치를 실험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언급처럼 “오직 하나(only one)”라고 하는 작품의 전통적 위상과 더불어 ‘허구적 리얼리즘’에 근간한 자신의 다양한 작품들을 예술계라는 무형의 세계에 “각인(刻印)”하려는 비장한 각오에 다름 아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한 작가에게 화풍이 정립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자신의 화풍 속에 평생을 구속당하고 자신의 화풍을 버리는 것도 작가의 권리다. 그 자유스러움이라는 권리가 유지되고 화풍이라는 의무의 노예가 되기 싫기 때문이다.'
예수의 주검을 연상케 하는 작가의 거대한 나상은 물론이고 V자를 그리고 있는 아웅산수치의 손가락과 여성의 음부를 거대한 화폭에 담아낸 최근의 작품들은 이러한 노력들 중 일부로 보인다. 이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실명, 유명, 익명 그리고 특수자와 보편자 사이를 오고가는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든다. 마치 그가 유일성과 다양성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해 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이번 전시가 하나의 화풍이기를 거부하고 ‘종합선물세트’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극사실회화, 캐리커처, 드로잉, 조각은 물론 얼굴 초상과 전신상 그리고 알루미늄 패널과 캔버스와 같은 다양한 범주를 횡단하면서 강형구가 이미 세속적으로 성공했던 몇몇 전형성에 갇히지 않으려고 부단히 새로운 질문들로 자신을 괴롭힌 가시적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무형의 세계에 각인하는 허구적 리얼리즘”, (강형구 작가론), 『월간미술』, 2014. 1월호, pp.1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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