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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그 서문〕
자연과 인간의 해후_인간화(花)
김성호(미술평론가)
조각가 박장근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그간의 생명력 충일한 리얼리즘 조각의 역사적 지평으로부터 걸음을 이동해 내면의 심층으로 잠입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질곡의 현대사를 대면하고 살아가는 오늘날 인간 군상들의 고단하고 핍진한 삶에 대한 연민을 담아내는 ‘조각의 사회적 발언’에 대한 책무로부터 일정부분 짐을 덜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의 변모와 무관하지 않다. 즉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민중과 소시민들의 삶을 지금의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끝자락에서 기억하는 일 자체가 추억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와 대면한 미술가가 행하는 미술적 발언 자체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야기된 삶의 문제로부터 소소한 일상의 문제로 옮겨지게 된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변모만큼이나 자연스런 귀결일 수 있겠다. 이러한 노정 속에 박장근의 작품은 놓여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_이전과 최근 조각
최근 그의 작품의 주제의식은 인간을 사회, 역사적 전개 속에서 성찰했던 통시적(通時的) 담론으로부터 그것을 작가 주변의 자연, 환경과의 상관성 속에서 살피고 있는 공시적(共時的) 담론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종적 사유로부터 횡적 사유로 이동해오고 있는 중이다. 사회적 대립과 갈등, 지배계급의 착취와 민중의 저항, 도도한 역사의 물결 등을 형상화해온 그간의 거시적 내러티브(master narrative)에서 드러내던 ‘묵직한 어두움’이 이제는 작가 개인의 의식의 편린들로 스며드는 미시적 내러티브(micro narrative)로 나타나면서 그 무게감을 덜어내고 있는 것이다.
조각가 박장근에게 있어,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일정부분 예고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리얼리즘에 근간한 형상조각으로부터 출발했던 초기의 작품들에는 부정, 저항, 대립과 같은 조형언어들의 조합을 시도함으로써 파괴, 해체, 소외, 어두움과 같은 비판적이고도 부정적인 메시지를 출몰시켰다. 한편, 이것은 소시민 혹은 민중으로서의 인간 군상의 거침없고 역동적인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즉 한편으로는 부정과 저항을 지향하는 암울한 현실에의 낙망과 좌절이 이야기된다면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재편되기를 갈망하는 희망과 그것을 위해 추진하는 역사의 동력과 근원적인 힘으로서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가적 측면에 덧붙여 그의 그간의 작품에는 왜곡, 풍자, 해학의 정신이 똬리를 틀고 있기도 하다. 길게 늘여진 인체나 데포름이 강화된 손과 발 등의 인체의 왜곡은 물론이며, 높다란 좌대를 설치하고 그것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의 연출적 기법 역시 그의 작품을 풍자, 해학의 정신들과 맞물려 포개지게 만든다. 훈장이 자리할 왼쪽 가슴에 아기를 달고 있는 익명의 남자의 초상은 또 어떠한가? 훈장이라곤 갓 얻은 아들 밖에 없다는 체념과 자조 섞인 풍자는 실상은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의 뿌듯한 자부심과 더불어 제3자에게 선보이는 은근한 자랑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풍자와 해학의 정신은 최근작에서 가벼운 위트, 농담과 같은 차원으로 전개되기조차 한다. 근육질의 강인한 남성상이 품어내는 꽃과 같은 생경스러운 조우는 관람자들에게 흐뭇한 미소마저 안겨준다. 물론 그것은 사회, 역사적 컨텍스트로부터 작가 주변의 환경과 자연이라는 컨텍스트로 주제의식을 전이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유발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벼운 위트의 차원으로만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분명코 이전의 작업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견지해왔던 일관된 주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의 최근작에서 보이는 일련의 변화는 사회적 메시지를 배태한 이전의 그의 조각언어에 대한 부단한 자기 성찰의 과정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했던 인간 존재론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달리 말해, ‘통시적으로부터 공시적 차원으로’, 혹은 ‘거시적 내러티브로부터 미시적 내러티브로’, 또는 ‘부정과 낙망으로부터 긍정과 희망으로’와 같은 일련의 변모를 거쳐 온 그의 주제의식의 근간에는 인간존재에 대한 일관되고도 깊은 성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그의 조각을 이끌어 온 근원적인 힘이라 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응_납작한 인간조각
인간의 개인 주체는 대개 인간 보편(혹은 타자들)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대면하면서 성숙해지는 시간의 과정들을 거친다. 청년의 치기와 열정, 중년의 신중과 숙고, 노년의 초연과 초탈은 인생을 먼저 살아간 이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양태라 할 것이다. 박장근은 이것이 자연으로부터 물려받고 있는 생명체의 본성임을 자신의 조각들 속에 담아낸다. 청년기 이후의 작품들에 나타난 아방가르드적 부정 정신과 저돌적인 저항의 힘은 이미 중년을 넘어선 그에게 못내 버거운 것이거나 불필요한 소진이 되기에 족하다. 그만큼 열정과 생명력이 꿈틀대는 작품들의 표층 이면에서 그가 끝내 찾고자 했던 그만의 미적 가치는 아직도 그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연 그에게 무엇일까? 느닷없는 사건들을 허허롭게 받아들일 만큼 축적한 삶의 내공으로부터 발원하는 그것은 바로 자연과 같은 본성이다. 그것은 자연의 외양을 닮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내면에 대한 학습이다.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개체들의 다양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자연의 순환적 세계관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의 최근작들은 이러한 제한적 인간 조건을 수렴하면서 자연의 본성을 품에 안고 있는 중이다. 중력에 직립한 채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환경에 조응하며 만들어내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론의 차원이 그에게 새로운 화두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박장근의 최근작들은 자연과 인간의 조응 관계를 모색하는 주제의식의 가시화를 위해서 이전에 선보인 바 있는 ‘납작한 조각’ 혹은 ‘얇은 조각’ 또는 ‘2차원 평면적 조각’으로부터 계승한 자신의 조형언어를 천착한다. 이전 전시에서 그는 전면과 후면에서 바라볼 때 작품의 외형적 이미지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납작한 형태의 조각을 실험했다. 그것은 관객이 작품의 주변을 빙빙 둘러보면서 실행하는 ‘주항(周航 circum-navigation)’이라는 이름의 3차원 조각 감상에 관한 그간의 관성적인 태도와 방식을 일정부분 좌초시키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평면적 속성은 조각 매체의 기본적 속성을 배반시키면서도 한편으로 조각의 언어를 극대화시키는 기제가 된다. 3차원적 조각의 언어를 2차원의 형식으로 납작하게 눌러냄으로써 관람객들의 관성적인 전방위적 관람 행위에 제동을 걸고 앞뒤의 평면 위에 드러낸 작가의 시각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일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박장근은 납작한 조각의 앞뒷면에 ‘좌우가 대칭적이면서도 미세하게 상이한’ 인체의 형상을 얹는다. 즉 조각에서 흔히 보이는 ‘좌우대칭’적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는 납작한 2차원 평면성 때문에 좌우의 이미지가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겨지는 ‘앞뒤대칭’적 즉 ‘전후대칭’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 측면에 나타난 인체 형상들은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반영 이미지가 조응하면서 만들어낸 쌍생아들이다.
인체의 좌, 우면이 인체조각의 앞, 뒷면에 펼쳐지는 이중 이미지는 그의 이전 작품에서 마치 자연의 산세(山勢)와 같이 겹겹이 펼쳐진다. 이처럼 그가 만들어낸 인간조각은 자연과 인간이 조응하는 그 무엇이다. 어찌 보면 인간이고, 어찌 보면 산인 ‘인간과 자연의 동체(同體)적 이미지’이다. 꿈틀거리는 강인한 근육을 펼치며 드러누운 인간의 몸은 어느새 생명력 가득한 녹색과 넉넉한 봉우리를 지닌 자연의 산하가 되고, 그것은 이내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의 초상으로 되돌려진다. 즉 그것은 박정근이 빚어내는 한국의 산하(山河)이자, 동시에 한국인의 초상인 것이다.
한편, 자연의 정수(精髓)인 ‘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그의 최근작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만남’에 대한 이전의 거시적 관점으로부터 미시적 관점으로 이동하고 있는 그의 변모된 최근의 관심사를 여실히 읽어낼 수 있다. 그에게 ‘꽃’은 거대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일상의 자연, 환경의 자연으로 눈길을 돌리는 가운데 찾은 일종의 해답이다. 그에게 ‘꽃’이란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와 같은 동양의 일원론적 사유가 작가의 일련의 삶의 경험들로부터 길어 올린 채 자연스럽게 그의 ‘납작한 인간조각’의 언어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전의 역사적 사건을 대면한 고뇌에 가득 찼던 ‘인간-거대 자연’의 형상으로부터 ‘인간-꽃’이라고 하는 일상의 사건들에 대한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삶의 지평 속 소소한 인간의 형상으로 변모시킨다. 즉 이전의 부정과 비판의 이성으로부터 긍정과 행복의 감성으로 전이하게 된 것이다.


강건한 육체 속에 깃든 아니마의 영혼_‘인간화(花) 조각’
최근의 그의 ‘납작한 인간조각’은 ‘인간-꽃’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인간화(花) 조각’이라 부름직하다. 이러한 조각이 유발하는 긍정과 행복의 감성의 일단은 남성적 인체에 옷 입히는 여성성이라는 정신과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또는 강건한 남성상을 섬세하고도 유려한 ‘납작한 조각’ 형식의 여성적 몸체에 담아내는 반대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굴곡진 근육을 지닌 남성상이 굳건한 자세로 직립하고 있는 작품은 대표적이다. 남성상의 가슴은 온통 커다란 한 송이의 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강건한 근육질의 육체가 아예 꽃들로 치환되어 있는 ‘꽃 근육’의 남성상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이자 자연이며 강건한 육체의 남성이자 동시에 유려한 여성이기도 하다. 남성이 품고 있는 꽃이란 그런 면에서, 남성의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의 원형(archetype)이인 ‘아니마(anima)’와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상기한 작품들은 모두 아니마의 영혼을 지닌 남성들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당당한 근육질의 여성들이란 여성의 정신에 내재된 남성성의 원형적 심상이라는 아니무스(animus)를 소유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서 반대의 경우를 탐구하는 작품들이 대다수라는 점에서, 그의 인간조각을 ‘아니마의 영혼을 지닌 남성성의 인간’으로 보편화시키는 해석이 요구된다. )
그의 작품들에서, 강건한 남성상이 품은 꽃송이는 투과체의 빈 공간으로 남아, 자아 이면의 무수한 타자들과 열린 소통을 시도하는, ‘꽃심장’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남성상으로부터 피어나는 한 무더기의 꽃들은 이내 그의 팔다리가 되기도 한다. 또는 무수한 꽃들이 비상하는 날개를 가진 여성상 위에 살포시 내려앉기도 한다. 한편, 그것은 대지의 여신과도 같은 모성의 자연 보편성과 인간의 보편성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장인적 테크닉과 더불어 손의 노동을 신뢰하는 그의 조각은 조형적 힘의 집중과 분산을 통해서 이전의 해학을 겸비한 리얼리즘 조각의 역동적 생명력을 일정부분 이어나가면서도 현대적 조형언어로 산뜻하게 되살아난다. 그것은 ‘납작한 조각’ 혹은 ‘아니마를 실천하는 인간화(花) 조각’으로 나타나면서 조각이 곧 볼륨과 매스라는 우리의 관성적 사유를 유쾌하게 깨뜨려 나간다. 따라서 ‘인간화 조각’을 탐구하는 최근작의 유의미성은, ‘역사와 사회가 육화(肉化)된 인간’에 대한 깊은 번뇌를 벗고 모성적 자연과의 교류, 일상 환경의 조응과 같은 주제의식들을 만나면서 보다 간결하고도 한층 섬세한 조형언어로 순화, 발현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
출전 /
김성호, “자연과 인간의 해후_인간화(花)” (박장근전-Human Blossom, '2013. 5. 22.~.8. 31, 갤러리 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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