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의 여정에 대한 ‘조형사색’
김성호(미술평론가)
I. ‘물과물’ : 물(物)로서의 물(水)
화가 정충일이 최근작에 제시하고 있는 작품명 ‘순환, 물과물’은 그의 전작(全作)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개념으로 판단된다. 특히 여기서 띄어쓰기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물과물’이라는 작명은, ‘과’라는 접속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물의 두 개념이 그의 작품세계에서는 실상 이원화된 분리의 개념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며 일원적 사유로부터 기원하고 있는 것임을, 반증한다. 즉 양자는 하나의 ‘근원적 물’로부터 생성된 것임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물의 두 개념’이란 서로가 서로를 점유하면서 ‘근원적 물’이 존재하는 순환적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어나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물의 두 개념’이란 무엇이며 ‘근원적 물’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기독교의 창조신화 중 야훼가 둘째 날에 행한 창조사건, 즉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갈라놓는’ 사건으로부터 ‘물과물’이라는 자신의 주제어를 가져온다. 그러니까 정충일의 작품에 있어, 물의 두 개념은 ‘물(하늘의 물)’과 ‘물(땅의 물)’이 피조(被造)되는 태초의 창조적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임과 동시에 그것(들)이 분리 전에는 애초에 ‘하나의 물’로 존재했었음을 증명한다. 즉 우리가 상기한 ‘근원적 물’이었음을 말이다.
정충일의 작품은 ‘하나의 물’로부터 기원하고 있는 ‘두 종류의 물’의 존재 양태를 순환의 체계로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의 체계에는 두 개념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근원적 물’에 이르기 위해서 거쳐야만 할, 양자(兩者)의 이원론적 대립을 충돌시켜 화해시키는 과정을 표면적으로는 전제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대립조차 무화시키는 한 덩어리의 연쇄고리일 뿐이다. 즉 거기에는 자신의 정체성(하나의 물)과 타자의 정체성(또 다른 하나의 물)을 끊임없이 연쇄시키는 흐름과 운동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이원론적 희랍신화로 오염되기 이전의 히브리 구약 성서의 순환 개념을 동양의 순환 개념과 같은 일원론적 사유와 만나게 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정충일의 회화는 ‘물(物)로서의 근원적 물(水)’이라는 일원론적 존재의 지평에서 갈라지고 분리된 ‘물(水)과물(水)’이 다시 ‘하나의 물(水/物)’로 회귀하기를 거듭하는 일련의 순환의 흐름과 운동을 가시화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겠다.




II. 분리된 것들로부터의 복구 : 물(物)로서의 인간 실존
존재를 물(物)로서 인식하는 정충일의 회화적 문제의식은 그의 이전 작업에서부터 일관되게 표현되어왔다. 그가 1990년대 표현주의적 조형언어로 인간의 형상들을 실험하면서 인간 존재를 탐구하든, 2000년대 상이한 재질을 지닌 사물들의 조응을 통해서 사물의 존재를 탐구하든, 동일하게 물(物)로서의 존재를 인식하는 관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존재론이든 사물의 존재론이든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개별성, 주체성으로서의 화가 정충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실존주의적 사유와 다름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정충일의 1990년대 작품에서 이러한 실존주의의 일단은 작품 속에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어둠과 밝음, 채워짐(혹은 존재)과 비어있음(혹은 부재), 표현주의와 추상주의 언어와 같은 대립적 가치들이 대비되거나 혼재되어 있는 그의 회화는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 주체’로서의 화가가 대면하고 있는 모든 인식의 대상에 대한 실존적 탐색의 일단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마블링, 스트로크 등 격렬한 제스처로 표현된 일련의 인체형상과 대비되게 한편에 어두운 무채색의 배경 위에 살포시 떠 있게 만든 두상 또는 인간의 실루엣을 배치하는 조형방식은 혼돈, 속세, 현실과 떨어져있는 침잠, 묵상, 이상과 같은 개념들의 선명한 대립적 인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변별성을 끊임없이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한 몸으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무한 내포한다. 그가 작품 안에서 서로의 경계를 명확히 표현하기 보다는 양자가 서로 뒤섞이는 혼성의 조형언어를 통해서 각자의 개념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그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주요한 것은, 대립적 요소들이 혼성적으로 나타난 화면들로부터 어떠한 통일된 질서의 세계를 추상(抽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창작의 지향성은 물(物)로서의 인간 실존이라는 것이 결국 어떠한 근원적 물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임을 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 자체가 이러한 분리된 것들의 복구를 시도하는 조형탐색임을 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의 회화에 대한 필자의 이러한 독법(讀法)은 지나치게 작위적일 수 있다. 그가 작품 외에는 당시 어떠한 곳에서도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별반 설명하고 있지 않고 있기에 우리가 그의 이미지로부터 텍스트를 길어 올리는 작업은 쉬이 미끄러질 수 있다. 그가 당시의 작품 명제를 아예 생략하거나 일련의 번호로 대신해온 것도 구체적인 작가의 의도를 언어적 메시지로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자신의 시각예술 작품에 대해서 언어로 직접 설명하는 것’ 보다는 ‘관자들의 자유로운 감상과 해석을 열어두는 것’을 선호하는 그의 예술관은 여기에 한몫 더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그가 대립적 조형요소들을 대립, 충돌시킴으로써 끝내는 서로를 화해시키고, ‘분리된 것들로부터의 복구’를 시도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대립적 조형요소와 시각적 개념들을 중첩시킬 때, 중세의 제단화처럼 분절되어 있는 화면 구성을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종교적 실존의 관심으로부터 배태되고 기원한 것임을 쉬이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III. 사물의 존재 양태 : 존재자의 실존
2000년대 들어서, 정충일의 회화에는 이전의 인간 형상이 사라지고, 가히 ‘유기물 시리즈’ 또는 ‘사물 시리즈’라 칭할 만한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2001년 개인전에서 작가는 나무 패널의 중앙에 오목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짙은 유성의 질료를 담아낸 매우 개념적인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2002년 개인전에서도 출현하고 있는 이 기묘한 시리즈는 마치 모든 사물들이 일자(一者)로서의 핵(核)으로부터 유출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물들의 탄생에 관한 내러티브’처럼 보인다. 사물들은 여기서 분명코 ‘존재자’의 개념으로 치환된다. ‘존재자’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 현전성’을 의미함으로써, 주체는 물론이며 모든 사물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미니멀화 된 나무패널, 움푹 패인 둥글고 오목한 네거티브의 공간, 그 안에 침잠하고 있는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짙은 색의 물질, 이것들은, 평론가 고충환이 고찰하고 있듯이, 모든 존재들을 생성하기를 거듭하는 거대한 화이트홀(white hole)이다. 보라! 오목한 그곳에는 작품명에서 드러나듯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질들이 끊임없이 ‘형성’되고 ‘탄생’되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무슨 숙주(宿主)가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그곳에는 스멀스멀 자라나는 생명체의 운동으로 꿈틀댄다. 보라! 마치 ‘연무(煙霧)’처럼 신비롭게 피어나는 생명과 존재의 기운이 화이트홀로부터 자라나 공간 전체를 휘감는 모습을. 그것은 정충일의 ‘물과물’이 어떤 ‘근원적 물’로부터 갈라져 생성되는 탄생의 순간이자, 사물들의 존재 양태, 그리고 그것의 ‘존재자’로서의 운동들이다.
2001년 개인전에서 그는 또 다른 유형의 작업을 함께 선보인다. 돌가루를 올린 캔버스의 표면 위에 먹을 침투시키고, 그 위에 유성 물감을 올린 아크릴판을 덧대 중첩시키는 새로운 추상의 조형언어가 그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개념적인 실험으로 보인다. 돌가루의 층 사이를 헤집고 캔버스의 배면으로 깊이 침투하는 먹물의 존재와 대비되게 아크릴판 위에 오도가지도 못하고 갇혀 있는 유성 물감의 존재는 물질의 상반성 만큼이나 선명하고도 극(極)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그것은 열림/닫힘, 부드러움/딱딱함, 침묵/웅변, 우울/쾌활과 같은 대립되는 사물들의 존재 양태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그것은 화이트홀로부터 생성된 무수한 존재자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에 정충일은 ‘존재, 감정, 상황, 물질’이라는 제명들을 붙임으로써, 다양한 존재자들의 존재 양태를 그저 드러내는 것만이 아닌 이것들의 실존적 만남을 탐구한다. 즉 쟁투와 화해 사이를 오고가는 피조물들의 실존적 세계를 추상의 언어로 재현해봄으로써 ‘분리된 존재자들의 근원적 물(物)을 향한 복구’의 일단을 제시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비교적 ‘분리된 것들로부터의 복구’를 ‘순환’으로 이해하고 시도하는 초기적 모색으로 보인다. 2002년 개인전에서 그가 오목한 공간을 지닌 작품들에 새로이 붙인 제명 ‘순환 속에 존재’는 이러한 그의 ‘순환’에 대한 주제의식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IV. 복구적 순환 : 유신론적 실존
정충일은 오랜 기간을 거쳐 ‘물과물’이라는 존재자(사물/주체)의 탄생과 그것들의 다양한 실존적 양태를 미술의 언어로 탐구하면서, 모든 존재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지점을 ‘일자(一者)를 향한 복구적 순환’임을 천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서 ‘복구’를 ‘일자를 향한 단순 회귀’로 이해하기 보다는 ‘일자를 향한 부단한 복구 운동’으로 이해할 일이다. 우리의 논의에서 복구는 회귀가 결코 아니며 일자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인지하는 가운데서 실천되는 ‘일자 지향성의 비가역적 운동’일 따름이다.
정충일에게 있어, ‘일자’란 근원적 물(物)로서의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는 궁극 지향점으로 나타난다. 즉 그의 존재자에 대한 실존론적 관심은 다분히 유신론적 실존을 지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19세기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적 면모, 더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적 실존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란 다분히 인간학적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감성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라는 3단계의 인간의 자기 형성의 단계를 제시하면서 가장 완벽한 인간 실존의 단계를 ‘종교적 실존’에 두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다만 이 단계에서조차 그는 예외자이자 단독자로서의 ‘나’라는 주체를 폐기하지 않고 주체의 주관성에 근거한 기독교적 실존을 강조한다. 그런 까닭으로, 교조화(敎條化) 된 당대의 기독교가 그의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정죄(定罪)하고 이단시했는데, 그 까닭은 ‘인간의 주관적 실존에 대한 그의 감각적, 비논리적, 주관적 맹신’ 때문이었다.
정출일의 작품에서 견지하고 있는 기독교적 실존은 극단적인 인간주의를 지향하지 않지만, 이러한 인간적 관심에 기초하고 있는 인간학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비의 관계를 지닌다. 즉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따듯한 관심을 통해 종교적 실존을 드러내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신앙이 매일 매순간 새로이 획득되어야 할 성질인 것처럼, 정충일이 지향하는 기독교적 신앙의 실천은 매순간 회화의 되묻기로 거듭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모든 인식의 대상(타자를 포함하여)을 물(物)로서 상정하는 관점과 더불어 종교적 실존을 인간학의 관점에서 모색하는 ‘순환에 대한 성찰’이 어우러지면서 정초된다.


V. 순환하는 빛 : 인간학을 탐구하는 회화
실존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장 상태, 또는 운동성의 것이다. 실존적 인간학을 탐구하는 그의 회화는, 물(水/物)의 개념과 더불어 운동성의 빛(光/物)을 탐구하는 일련의 최근 작품들에서, 자신의 주제의식을 보다 더 구체화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의 첫 순간, 태초에 빛이 피조되었듯이, 그에게 ‘빛’은 자신의 일관된 ‘물과물’의 개념이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현현(顯現)되는 존재자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형상성이 회복되고 배경과 이지러지며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교차하는 초기의 작업 경향은 2005년 유리판 위에서 다른 조형언어로 재실험된다. 유리에 채색을 기조로 한 일련의 시리즈물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가히 현대화된 스테인드글라스라 할 만하다. 색점과 선묘, 그리고 넓은 붓터치의 간직하고 있는 물감층은 빛을 투과시키는 유리판의 매체적 속성에 따라 자신의 색그림자를 차분하고도 신비롭게 드리운다.
2010년, 2013년 개인전에서는, 빛을 가시화시키기 적합한 유리와 같은 매체에 집중했던 2005년 당시의 조형언어로부터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따블로 안의 회화’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석분을 캔버스위에 밀착시켜 만든 회화의 지층 위에 태초의 인간 창조의 사건을 ‘빛으로부터 기원하는 물과물의 사건’으로 구현한 2005년 개인전은 일단의 변환지점이었다. 기존의 물(水)이라는 주제의식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축으로 빛(光)을 등장시킨 까닭이다. 덧붙여 여기에 인간이라는 중심축을 상정함으로써 물과 빛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트라이앵글을 대표적 개념어로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개념어들은 이 축들을 잇고 아우르는 속성인 물(物)로서 최종적으로 표상됨으로써 그의 회화로 구현하는 종교적 실존과 실존적 인간학이 완성되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방사선으로 분출하는 빛, 운무처럼 피어오르는 빛 그리고 비처럼 내려앉는 빛 등 빛의 세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화이트 홀’과 같은 근원적 공간이 자리한다. 때로는 오목한 네거티브의 공간으로 때로는 순백의 색으로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둠의 색으로 나타나는 이것은 신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중력에 직립하고 있는 인간이 이 땅의 지평에서 찾아나서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빛을 입고 신성으로부터 이 땅에 내려온 ‘육화(incarnation)의 인간’으로 그리스도가 찾았던 자리, 그리고 윤리적 영혼을 안은 인간으로, 흙으로 돌아갈 소멸의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우리가 찾아야 할 자리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 찾아야 할 종교적 실존이며, 동시에 실존적 인간학이다.
“인간의 몸이란 단지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을 감싸기 위해 필연적으로 빌어야 하는 껍질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과 삶의 모순과 인간의 내적 잠재력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과 투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작가노트)
작가의 언급처럼, 이전 작부터 최근의 신작까지 대대적으로 선보인 이번 2013년 개인전에는 그의 실존적 인간학이 꿈틀대고 있다. 특히 최근작에서는 마치 블라인드 창을 뚫고 어둠의 실내를 밝혀주고 있는 양상처럼 빛이 표현됨으로써 ‘지금, 여기’라는 동시대의 문명계를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의 인간이 대면하고 있는 ‘실존’에 대한 관심을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 마치 날것의 육체의 덩어리만이 남은 듯한 인간 형상들이 가로축, 혹은 세로축으로 레이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빛의 흐름 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들은 우리에게 인간학의 탐구가 결코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것만이 아님을 상기시켜준다. 그것은 노에마(noema, 지향하는 의식작용의 대상)인 세상을 대면하는 인간 주체의 노에시스(noesis, 지향하는 의식작용)와 아이스테시스(aisthēsis, 감각적 지각)를 통해서 성취되는 힘겨운 과정을 전제한다.
그의 이전의 작품들이 ‘근원적 물로부터 기원한 물과물의 실존적 존재’를 탐구했다고 한다면, 그의 최근작은 ‘세상의 물과물이 시도하는 근원적 물을 향한 복구적 운동’의 일면을 드러낸다. 여기서 그에게 ‘순환의 여정’이란 최종목적이며 ‘조형 사색’이란 그것의 방법론이다. 고단한 수행과 실천을 전제로 하는 인간 주체의 끝없는 노력인 그의 인간학이 다음 전시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우리 모두는 묵묵히 기다리며 지켜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