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그 서문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전, 2014. 2. 21~3. 6, 쿤스트독)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 (1편)

 

 

 

 

책임기획 : 김성호(미술평론가)

 

 

 

“나는 끊임없이 핸디캡과 불균형이 어디 있는가를 찾습니다. 세계사가 백인들을 중심으로 쓰인 것에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나는 아시아인이고 한국인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콤플렉스를 역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결국, 균형 의식을 가져야해요. 내 전시기획의 핵심은 ‘창조적 역설(Creative Paradox)’입니다.” 1)

 

 

 

 

I. 오마주 이원일

이 전시는, 큐레이터 이원일(1960. 11. 2 - 2011. 1. 11)이 위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큐레이팅의 핵심 개념으로 밝힌 바 있는, '창조적 역설'에 관한 것이다. 이 용어는 2008년의 또 다른 인터뷰에서도 재차 발견된다. “아시아적 해체와 재구성, 혼성화의 일치와 불일치, 복합 문화적 카테고리 간의 교차와 접변 현상 설명을 통해 창조적 역설을 선보이겠다'2)며 한 기자회견장에서 브리핑했던 그의 발언이 그것이다. 그가 당시에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전시는 2008년 11월 개막일이 예정되었던 미국 모마(MoMA PS1)의《스펙터클(Spectacle)전》이었다. 그는 여기서 '창조적 역설'을 주제어로 내세웠다.3) 전시 준비와 국내외 홍보로 동분서주했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원처 섭외 및 기금 조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 전시는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따라서 '창조적 역설'이란 주제어는 실제 큐레이팅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그의 큐레이팅사(史)에서 미완의 것으로 남게 되었다.4)

 

그는 2011년 심장마비로 인해 우리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발족시킨 '이원일추모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3차례 지속한 《Wonil Memories-The Brothers》라는 제명의 추모전5)은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남겨진 우리'의 아픔을 위무해주기에 족했다. 작고 3주기를 맞이한 2014년 올해의 전시는 '기증작을 중심으로 한 추모전' 성격 대신에 그의 큐레이팅을 구체적으로 재해석하고 탐구하는 '주제 기획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그를 기리는 우리에게 과업과 같은 것이다. 특히 이 전시는 큐레이터 이원일이 실현하지 못한 채 남기고 간 주제어 '창조적 역설'을 주목하고 재해석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이 전시는 그의 전시 미학을 기억하는 후배 큐레이터와 동료 작가들이 한데 모여 그의 큐레이팅을 곱씹고 재성찰하면서 그에게 헌사(獻辭)하는 '오마주(hommage)'라 할 것이다.

 

물론 규모는 다르다. 당시 미실현되었던 이원일의 전시가 세계적 작가들의 미국에서의 대규모 전시였다고 한다면, 우리의 전시는 3명의 한국작가로 이루어진 소규모 전시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전시가 그의 '창조적 역설'이란 주제를 얼치기로 흉내 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한국의 미술현장을 넘어 세계 각지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이미 글로벌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경호, 이이남은 그의 큐레이팅에 빈번히 등장해왔던 만큼, 이원일이 지속적으로 펼쳐왔던 큐레이팅과 그 철학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작가들이다. 이원일에게 있어 두 작가는 세계의 어떠한 무대에 소개해도 손색없는 한국의 대표작가들인 셈이다. 한편, 작가 이탈은 이원일의 실제 큐레이팅에 특별히 참여한 적은 없지만, 이번 전시의 주제인 '창조적 역설'에 매우 부합하는 작품들을 연이어 선보여 왔던 작가라 할 것이다. 그 역시 세계를 무대로 기획자와 미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해 왔으며,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 커뮤니티아트에 이르기까지 융복합의 기치로 종횡무진 달려온 작가라 할 것이다.

 

 
큐레이터 이원일

 

 

 

II.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

그렇다면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이란 과연 무엇인가? 역설이 어떻게 창조적일 수 있을까?

 

앞서의 인용문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이원일은 서구의 변방으로 치부되어 왔던 아시아, 한국의 '복합적인 콤플렉스를 역전시키기 위해' 이 개념을 요청한다. 그에게 '창조적 역설'이란 관성적인 서구적 사유로부터 탈주하고 건강하고 균형 있는 사회문화적 질서를 재수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념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아시아적 해체, 혼성화, 복합문화와 같은 교차와 접변 현상을 서구적 전통과는 차별되는 주요한 미의식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또 다른 인터뷰나 기획한 전시 카탈로그 서문에서 사용한 큐레이팅과 관련한 다른 개념들6)이 ‘창조적 역설’이란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맞물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기획한 전시명, 혹은 주제명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난 개념들 역시 이 ‘창조적 역설’과 맞물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창조적 역설'은 그의 전체 큐레이팅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겠다.

 

사전적 정의로 '역설'이란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로 논리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7)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논리적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목적 아래, 부가적으로 이르게 되는 자기모순에 개의치 않고, 내재적 의미에 보다 더 주요성을 두려고 하는 상징적 표현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적 역설’은 '역설'이라는 몸통에 '창조적'이라는 방점이 찍히는 통합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필자는 한 연구8)에서 창조적 역설의 최초 발원지로 탐 콘레이(Tom conley)의 저작9)을 거론하고 그가 분석했던 16세기 프랑스의 비주류 소설들에 나타난 서사 구조에 주목한 바 있다. 콘레이는 여기서 ‘반서사(anti-narrative)를 실행하는 풍자(satire)와 같은 내용적 차원’10) 뿐 아니라, 유희(play), 대조(antithesis)가 뒤섞여 있는 구조와 같은 형식적 차원11)을 발견하고 이러한 특징들을 ‘창조적 역설’로 살핀 바 있다.12) 콘레이의 연구와 그것으로부터 영향 받은 카플란(Carter Kaplan)13) 외 몇몇 연구들로부터 필자가 추출한 '창조적 역설'에 관한 개념은 다음의 첫 번째 도표로 정리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내용과 형식을 공유하는 이원일의 큐레이팅에서의 '창조적 역설'은 두 번째 도표로 정리될 수 있겠다.

 

 
(표1) 콘레이와 카플란 이론에 나타난 ‘창조적 역설’의 주체와 방법 14)

 

  

(표2) 이원일 큐레이팅의 핵심개념 ‘창조적 역설’의 주체와 방법 15)

 

 

  

이처럼 콘레이와 카플란 이론에 나타난 ‘창조적 역설'은 이원일의 큐레이팅 속에서 새로운 시각수사학으로 변용된다. '콘레이’ 식의 모순적 구조는 이원일에게서 ‘혼성화, 개방, 교차, 접변’으로 변용되고, ‘콘레이’ 식의 대조와 반서사는 그에게서 ‘탈지정학, 역진화, 가산혼합’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즉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은 ‘혼성화, 개방, 교차, 접변’이 이루는 ‘모순적 구조 혹은 뒤섞임의 구조’ 속에서 ‘해체와 재구성’을 실천하되 화해와 균형을 도모하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그의 큐레이팅이 처음부터 화해와 균형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서구에 대한 비서구의 개념으로 ‘만남-싸움-화해’의 전개를 드러내 왔다는 것이다. 아시아성을 중심으로 둔 2000년대 중반까지의 그의 큐레이팅이 대립을 극복하려는 저항과 해체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라면 2007-2010년 사이 그것은 대립 자체를 포용하는 혼성과 더불어 화해의 방법론을 구사하는 것으로 변모된 것이다.

 

 



 


전시 전경 

 

 

 

 

III. 이탈의 '창조적 역설'

이탈은 이번 전시에서 텍스트 작업을 통해 '창조적 역설'을 재해석한다.

 

작품 <THIS IS NOT ART>16)는 12개의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에어바이블(Airbible)이라 불리는 공기조형물로 만들어진 세로 60cm 크기의 커다란 글자들은 그 자체로 압권이다. 센서가 관객의 음성이나 발자국 소리 등에 반응하면서 글자 안에 내장된 모터를 통해 바람을 일으켜 공기의 주입과 배출을 반복하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글자는 자신의 몸통을 천천히 부풀리거나 줄이기를 거듭하게 된다. 마치 살아있는 어떤 생명체처럼 말이다. 각 글자는 공기를 머금고 있지 않을 때, 쭈그러진 상태로 있어 얼핏 텍스트를 읽는 게 그다지 쉽지 않지만, 공기가 팽팽하게 에어바이블 속에 가득할 때, 비로소 텍스트는 자신의 고유한 본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할 수 없었던 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드러내는 순간은 바로 그 공기의 충만함을 실현하는 찰나이다. 별것 아닌 공기가 쭈그러진 글자 속에 들어와 글자의 몸을 ‘빵빵하게’ 만들어낸 순간, 텍스트의 온전한 가독성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다음처럼 읽는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의미의 독해가 혼란스럽다. 여기서 ‘이것(THIS)’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을 부풀이고 줄이기를 거듭하는 각각의 ‘글자(텍스트)’를 지칭하는 것인가? 아니면 ‘THIS’라는 영문 텍스트를 지칭하는 것인가? 또는 글자들이 매달려 있는 화이트큐브의 ‘벽(이미지)’을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THIS IS NOT ART>라는 제명의 ‘작품’을 지칭하고 있는가? 혹은 쿤스트독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번 전시 자체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회화작품, <이미지의 반역(La trahison des images)>(1928-1929)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파이프 하나를 잘 그려놓고 그 밑에 써놓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뜬금없어 보이는 텍스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이것’은 무엇을 지칭하는가? 우리는 이미 이 그림에 대한 분석하고 있는 푸코(Michel Paul Foucault)의 집요한 질문들과 그에 대한 성찰을 익히 알고 있다. 바로 원본과의 관계를 통해 위계화될 뿐인 유사(resemblance)와 지시적 기능 사이의 직접적 매개를 단절하면서 펼치고 있는 상사(similitude)에 관한 논의가 그것이다. 이것이(Ceci)이 지칭하는 것이 실재로서의 파이프(사물)인지 허구로서의 파이프(이미지)인지 아니면 의미로서의 파이프(텍스트)인지를 성찰하는 가운데 푸코는 이것이 갖고 있는 ‘이미지의 이름’도 ‘텍스트의 지시물’도 동시에 부정한다. 즉, 그의 논의는 이미지에 관한 닮음의 논의가 원본으로부터 결별하고, 언어에 관한 지시의 논의가 대상으로부터 결별하는 점증적 개념에 대해서 사유하기를 우리에게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실재의 파이프가 이미지로서의 파이프, 또는 언어로서의 파이프와 실제적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듯이, 실재/이미지/언어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의 간극을 성찰하게 만든다. 지도(이미지)가 영토(실재)가 아니듯, 또는 성상(이미지)가 신(실재)이 결코 아니듯이 말이다.

 

이러한 관계항을 이탈은 예술가 주체와 예술의 존재론적 범주 안에서 성찰한다. :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있던 것인가, 있는 것인가. 나는 이것을 이것이라 칭하고서 한 참 동안 이것을 생각했다. 이것에 관해 심도 있는 고민 중에 이것은 소멸하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이것을 지칭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17)

  

그렇다. ‘이것’에 관해 골몰할 때, ‘이것’은 어느새 ‘그것’이 된다. 공간 속의 논의가 어느새 시간의 흐름 속에 개입함으로써 변화한다. 이 모든 것은 예술가 주체가 몸담고 있는 사회적 컨텍스트와 더불어 변모해가는 예술의 존재론적 위상을 인식하고 있는 성찰이다.

 

“THIS IS NOT ART

ART IS NOT THIS

THIS IS NOT THIS“

  

이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환의 궤도이자 하나의 역설이다. 푸코가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유사와 상사에 대해 고민했듯이, 우리는 이탈의 작품에서 ‘원본과 닮아있음’(유사)과 ‘서로 닮음(상사)’에 대해 고민한다. 이원일이 재검토, 재형성, 재생의 개념들을 가지고 기존의 논의에 대한 반서사를 실행시켰듯이, 이탈 역시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기존 언어의 문법적 배열을 위반하면서 새로움을 형성하는 반서사와 아이러니, 모순을 실행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이원일에게서 모순과 아이러니에 생산적 힘을 부여하는 ‘창조적 역설’이며 이탈에게서 그것은 존재론적 시공간 속에서 현대의 예술가라는 컨텍스트 속 예술가 주체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여, ‘재해석되는 창조적 역설’이라 할 것이다.

  




 

이탈(Tal Lee), 〈This is not Art〉,
10x0.6m media, arduino, sensor, Motor 24ea, Airbible 12ea, variable size, 2013.

 

 

 

 

IV. 이경호의 '창조적 역설'

이경호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과 설치 작업을 통해 '창조적 역설'을 재해석한다.

 

작품 <Jackpot !>18)은 제명이 상기하듯이, '대박(Jackpot)'이란 단어가 던지는 역설적 의미를 탐구한다. 이경호는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스위스 다보스포럼 연설19) 중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과 더불어 자신의 아들과의 대화에서 사용된 '대박'이란 발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20) 즉 '대박'이라는 같은 단어의 다른 쓰임새에 주목한 작가는 '조소(嘲笑)적 문제제기'와 '비판적 성찰'의 양단에 선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대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작품은 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영상 작업과 돈의 실재를 드러낸 설치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상 작업은 돈이 무더기로 떨어지는 장면을 고속카메라로 근접 촬영하여 슬로우 영상으로 틀어주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장엄한 한 동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전시장에서 가장 높은 천장을 지니고 있는 벽면에 투사되어 비장하고도 장엄한 숭고미를 드러낸다. 천천히 떨어지는 클로즈업된 동전들의 낙하를 더욱 숭고한 무엇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음악들이다. 동전들은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e)의 감미롭고도 애잔한 노래21)와 더불어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의 처연한 노래와 애절한 재즈 선율22)에 실려 춤을 추듯이 천천히 낙하한다. 인간의 만남과 사랑에 관한 노래 가사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낙하하는 돈이란 인간 욕망에 대한 또 다른 메타포이다. 그것은 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우리의 '사랑하기'와 닮아있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인간이 살아가기 힘들듯이, 돈 없이 인간은 살기 힘들다. 양자 모두는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이렇듯 '돈, 욕망, 사랑'이 겹쳐진 그의 영상에는 인간의 금전을 향한 욕망 뒤에 추락하는 인간상마저 오버랩되어 있다. 그것은 애처롭거나 처연한 것이자, 삶의 끝자락에서 부둥켜 잡는 가느라단 끈처럼 위태롭기조차 하다.

 

영상은 후반부에 이르러 캐넌 앤더슨(Canan Anderson)의 전자 바이올린 연주곡23)에 따라 빠른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된다. 끝없이 추락하기만 하던 동전들의 무리는 이경호가 만들어낸 컴퓨터 그래픽의 옷을 입고, 원형 군무를 추면서 '돈'의 공연을 펼친다. 그것은 매우 흥겨운 공연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스펙터클이다. 그 공연 한 가운데에 세계 근현대사의 처절했던 사건들을 담은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동전'에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켰던 각 나라의 왕, 여왕, 독재자들의 모습은 물론이고, 정치가, 예술가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흩뿌려지면서 영욕 속에 생멸했던 근현대 제국의 역사가 우리의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거기에는 1, 2차 세계대전, 캄보디아 내전, 광주의 민주화운동, 아랍 혁명, 20/21세기 테러 등의 참담한 역사의 내러티브가 있다. 그 뿐인가? 거기에는 관중의 환호에 응답하는 격한 현대 전사들의 UFC격투기의 장면이,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의 야만스러운 해학이, 찰리 채플린의 코믹하고도 우울한 제스처가 함께 뒤섞여 있기도 하다. '돈'이 야기한 신자유주의의 그늘은 이전의 참담한 역사조차도 상업화한다.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돈이란, 마치 빌리 할리데이가 부른 또 다른 노래24)의 가사처럼, 우리에게 '나뭇잎과 뿌리가 피로 물든'25) 나무에서 열리는 '이상하고도 쓰디 쓴 열매'26)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타락의 길로 우리를 유혹하는 낙원의 선악과인 것이다.

 

우울하고 처연한 영상 밑으로 전시장 바닥에는 실제의 10원짜리 한국 동전과 대만 동전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돈 무더기'이다. 70만원에 이르는 분량의 동전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가운데 금빛 장난감 포크레인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3대의 포크레인이 연신 기계음을 내며 움직인다. 관객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센서에 의해 비로소 작동하는 포크레인은 자기 본연의 업무를 지속한다. 흩어진 동전들을 하염없이 담으려고 버둥거리지만, 동전들은 자꾸 미끄러져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하나의 은유27)이다. 장남감 포크레인은 개발 지상주의를 발전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지도자, 경제논리에 골몰하는 지배세력을 은유한다.

 

일예로, 폐쇄카메라를 통해 장난감 포크레인을 촬영하고 실시간으로 벽면에 거대한 움직이는 그림자로 드리운 그의 이전의 영상, 설치작업28)은 하나의 은유임과 동시에 역설이다. 작품은 포크레인으로부터 당시의 한국적 상황을 관객에게 떠올리게 만들면서도 '기도(prayer)'라는 제목으로 인해 소원/비판, 기도/저항과 같은 대립적 개념을 관객에게 혼성된 무엇으로 인식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장난감 포크레인은, 이 시대의 지배계급에 대한 '은유'이자, 비판적 저항 메시지 자체를 희화시키고 풍자하는 '역설'이기도 하다. 포크레인이 동전 하나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면서도 연신 굉음을 내며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원일이 기획한 한 국제전에 참여했던 그의 또 다른 작품'29) 역시 장난감 롤러코스트를 화면에 확대 프로젝션한 후 시계의 초침과 대비시켜냄으로써, '빠름/느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시간의 의미에 꿈과 허상의 의미를 대비'30)시키는 서사를 통해 역설을 실천한 바 있다. 이원일은 한 서문에서 이경호의 이러한 대비적 서사에 근거한 역설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 〈디지털 달(Digital Moon)〉을 해석하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감을 추구한 '꿈과 카오스의 이중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경호의 새로운 디지털 작업들은 (중략) 변형과 침묵 사이의 유연한 중개적 과정을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으로 접근하여 자아와 세계의 비선형적, 불가해적 신비의 영역을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단한 자기갱신과 확장의 예술적 실천이다. 모니터 공간 속에서 완전히 환원되거나 흡수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 의사환경 속에서 변질된 사이버자아(Cyber-self)의 표류의 시선을 통해 오히려 흔들리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는 꿈과 카오스의 불안한 이중주 말이다.'31)

  

이번 전시 전면에 나서고 있는 '돈' 역시 그 자체로 역설이다. '돈'이 우리에게 독려하는 행복한 삶과 돈이 유혹하는 화려한 삶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있음/없음 사이에서, 행복/불행 사이에서 말이다. 그것은 돈이 있음으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돈이 있음으로 불행할 수 있는 인간 삶의 컨텍스트마저 여실히 드러낸다. 돈이 유혹하는 행복과 화려함 이면에 처절한 지배/피지배의 역사가 반복될 뿐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돈'이 야기하는 '대박'은 언제나 실현성이 희박한 가정일 따름이지만, 간혹 우리의 삶에 들어와 우리의 일상을 훼방한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에게 행복으로부터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을 제공할 뿐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대박'은 잔잔한 현대인의 일상 자체에 행복/불행을 가르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돈'을 위해 오늘도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이원일의 ‘창조적 역설’이 모순, 아이러니, 유희, 풍자, 반서사와 같은 탐 콘레이의 '창조적 역설'의 개념들과 공유하는 것이라면, 이경호의 그것에 대한 재해석과 실천은 다분히 유희적이고, 풍자적이다. 그는 동전이 가득 쌓인 바닥에 물그릇을 하나 놓아두고 있는데 이경호는 그곳에 관객들이 2층으로부터 동전들을 던져 넣게 유도하고 있다. 마치 로마를 찾는 관광객이 트레비 분수(Fontana de Trevi)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를 찾는 관객들이 물그릇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서 저마다의 소원을 빌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이 만든 '돈밭'에 관객들의 유희적 참여를 도모함으로써 돈과 관련한 '역설적 메시지'들이 보다 더 가시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동전 안에 모인 돈들을 따로 모아 시각장애인 단체에 기부32)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까닭은 그가 1999년 전시 준비 중에 용접 작업33)을 하다가 눈에 화상을 입어 하루 동안 시각장애인 체험을 본의 아니게 한 경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은, 일련의 관객 참여를 도모하는 유희적 퍼포먼스가 실천되고 있지만, 그의 '창조적 역설'에 대한 재해석과 실천이 마냥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아 보인다는 것에 있다. 그의 작업이 표면적으로 유희, 풍자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그의 작업 안에는 '단단한 뼈 있는 농담과 풍자'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러니, 모순 등이 오버랩되어 있는 슬픈 자조와 '상투적인 단어의 의미'를 비트는 비판적 메시지가 그의 작업 심층에서 지속적으로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경호(Kyungho Lee),〈Jackpot!〉, 

signle channel video 6m & sensor, coins, Excavator toy, Pot, variable size, 2014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