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조상 덕에 먹고산다는 나라들을 보면 거개가 조상들이 문화예술을 조건 없이 후원하고 지원하고 육성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문화유산은 지금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이 아부다비를 건설하듯 하루아침에 할 수 없는 일이고, 미국이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면서도 유럽의 문화예술 앞에서는 항상 기죽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문호예술국가가 된다는 것은 시간과 자원과 열정과 천재성 그리고 후원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자명한 이치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스르는 일이 논의되고 있어 미술동네 사람들은 초 가을 더위에도 불구하고 떨고 있다. 여기에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국민들의 우려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미술품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속칭 ‘미술품 양도소득세법“ 때문이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내 놓은 세제개편안에 의하면 4,000만 원 이상의 미술품 또는 문화재거래 시 매매가격에서 필요경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기타소득으로 보고 여기에 20%의 세율로 원천징수한다는 것이다. 미술동네의 생사여탈권이 달려있는 이 제도는 1990년부터 정부가 추진해 온 것이다. 당시 정부는 2000만 원 이상의 미술품에 대해 과세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미술문화를 말살시키는 처사라 하여 5차례 시행이 연기되다 2003년 국회에서 찬성 143표, 반대 29표, 기권 8표로 폐지된 바 있다. 그런데 다시 이미 5년 전에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비과세로 결론이 난 사안을 다시 거론하고 나서는 것 자체가 우선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런 몰상식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미술문화에 대한 천박한 인식 즉 정신적 문화유산인 미술품을 단순하게 양도차익을 내는 상품으로만 본 때문이다. 미술품은 유일하게 예술장르에서 거래가 가능한 유형 자산이다.

문화적 생태계 파괴

하지만 문화계에서 우려하는 것은 세금을 내야하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이를 극력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이 갖는 문화적 상징성과 시각예술의 근본이 깨질 것이 두려운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경제적 가치 창출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도 그런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시행되고 시간이 경과하다보면 미술품의 아우라는 사라지고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상상하기 싫지만 미술에 대한 가치관이 변하고 이것이 갖는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상실하면서 한국에서 시각문화, 미술문화는 사라지거나 본래의 가치와 성격을 잃고 멸종되거나 변이를 일으켜 매우 왜곡된 모습으로 종을 유지시키게 될 것이다. 마치 동식물들이 생태환경이 바뀌면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인류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함께 해온 미술, 시각문화가 존재해온 수 만 년의 문화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 아무 거리낌 없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의 대표적인 엘리트 관료집단에서 이를 거론하고 나온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럽다. 인간이 ‘살기’위해서는 빵이 필요하지만 ‘존재’하기위해서는 또 다른 빵 즉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의 실용성이다. 우리가 숭례문 화재 사건 때 집 한 채 타는 것 이상의 분노와 연민을 가지고 자괴감에 빠져들었던 것은 그것이 갖는 문화적 상징성, 민족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즉 현실적 경제적 가치이상의 가치를 존중하는 때문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은 후원과 지원을 통해 미술문화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향유할 기회를 공유하는 한편 보존해서 후대에 문화유산으로 전달하는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물론 경우에 따라 차익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컬렉터는 바로 패트롱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한 국가 또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면서 쏟는 경제적 희생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정부는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정신적 빵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정부를 대신해서 이런 공공의 영역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일부의 경제적 이익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겠다는 문화예술의 패트롱으로서의 기능을 무시하는 처사로 선행에 세금을 매기는 것과 같다.

여기에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을 예로 들어 미술품양도세를 정당화하려하지만 이는 겉만 보고 속은 모르는 이야기이다. 징세율이 매우 저조해서 극히 미미해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징세가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거위 불가능한 때문이다. 여기에 문화선진국의 예를 들어 세 부과를 정당화하려하지만 이는 고속도로에서 통행료를 받는다고 시골 비포장도로에 통행료를 부과하는 것과 같다. 영국, 프랑스, 일본의 예를 들어 시행해야 한다면 시각문화, 미술문화에 대한 지원과 후원제도가 그들과 거의 비슷하거나 비슷 하려는 시늉이라도 내야하는 것 아닐까. 미술문화의 근간인 미술관등 문화적 인프라를 한번 비교해보고 하는 말인지 참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수도 서울에 변변한 미술관 하나 없어 그것을 세우자는 국민들의 요구는 십 수년째 방관만 하고 있으면서 외국은 세금 내니 너도 내라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

여기에 조세형평성을 들어 양도세부과를 주장하지만 이도 모순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주식이 있다.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며 양도차익에 대한 세금 없이 매도시 거래세 0.3%만 징수하는 주식과 미술품 거래의 차익에 대한 형평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에 현실적으로 소득에 있는 곳에 세금이 없는 곳도 여전히 존재한다. 당장 고소득자로 분류되는 일부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세금이 그렇지 아니한가.

여기에 부활한 미술품 양도소득세의 경우 이번 세법개정에 종부세법 완화가 포함되면서 일부 부자 들을 위한 세법개정이라는 지적을 모면하기 위해 무리하게 끼워 놓은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5년 전 도입하려다 실패한 경제 관료들의 오기(?)도 보태진 것으로 보인다.

미술계는 세금을 내지 않는 ‘치외법권’지역처럼 몰아간 기획재정부의 전략도 한 몫 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미술계는 엄연하게 적법한 세금을 이미 납부하고 있다. 개인 화랑의 경우 소득금액이 8000만원을 초과할 경우 소득의 35%를 세금으로 납부한다. 과세표준이 1억인 경우 소득세만 2,330만원에 달한다. 여기에 법인화랑의 경우 과세표준이 10억인 경우 번인세는 2억 3,800만원에 달한다.(표1 ,2참조). 화랑의 성격상 개인 또는 법인 사업자로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화랑이 갖는 문화매개자로서, 문화생산의 동반자로서의 기능을 감안한다면 조세형평상 세율은 더 하향조정 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여기에 미술작가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자유직업인으로 분류되는 화가가 다른 소득 없이 작품만을 팔아 배우자외 2인 가족이 살아가는 경우 2007년을 기준으로 할 때 5천 만 원의 소득을 올리면 전년수입이 4800만원을 초과했을 경우 4,963,000의 세금을 납부한다. 기장을 할 경우에도 2,568,000원의 세금을 납부한다.(표 3참조) 연봉이 5000만원인 직장인의 경우 같은 조건이라면 2,544,510의 세금이 부과된다. 많은 미술인들이 작품이 언제 팔릴지 모르기 때문에 미기장을 선택하기 때문에 미술인들은 직장인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이 세금을 더 내는 셈 이다. 여기에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아틀리에를 따로 가져야 하고 기장을 할 경우 세무사에게 지불하는 경비가 적지 않기 때문에 지출은 더욱 크다. 직장인들의 경우 교통비와 식대 등등을 지원받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미술인을 비롯해서 문화예술인들의 세금은 결과적으로 조세형평에 어긋나는 셈이다. 문화예술인의 55%가 문화예술활동과 관련해 월평균 100만원 이하의 수입을 올린다는 조사결과를 들지 않아도 현재의 미술품에 대한 과세는 과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꽃의 의미

화가나 개인 소장가들이 작품을 공사립미술관에 기증하는 경우 미술품 가격산정에 어려움을 들어 손비혜택을 주지 않는다. 팔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또 세금을 작품으로 대신 납부하는 제도도 없다. 국가가 물납을 인정하지 않고, 기증 시 손비를 인정하지 않는 미술품의 양도차익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양육의 의무는 하지 않은 채 부양의 의무만을 요구하는 염치없는 부모와 마찬가지이다.

사실 미술품이란 그것이 개인의 수중에 있던 국가의 것이던 결국 국민의, 민족의, 인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만약 양도세가 적용된다면 예술품은 거래가, 감정가에 의해 모든 가치가 한정되는 삭막하고 건조하고 격이 없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직 경제적관점에서 모든 것의 가치가 결정되는 그런 상황이 온다면 결국 문사철과 종교가 없는 나라로 전락 할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인 실용주의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실용주의란 모든 것을 실용성만 가지고 논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문학은 인문학대로, 미술과 문학, 연극과 무용, 영화와 음악이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해 온 것은 그 나름의 실용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심의 화단에 꽃과 진디를 뽑아내고 배추를 심는 실용주의는 실용주의를 잘못 이해한 행위이다. 꽃이 당장 먹고 입고 사는데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꽃을 다 뽑아내고 배추나 무를 심는다면 삶의 여유와 여백은 어디서 찾을 있을까. 실용주의 정신과 철학의 내적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직된 경제 관료들의 무리수가 실용정부에 누가 되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 시사저널 990호 200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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