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 내러티브: 작은 현실들의 유혹
5.7-9.21 론-알프스, 생-테티엔 근대 미술관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보편성과 전체성의 이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 사회를 '거대 서사'의 소멸이라고 진단했었다. 모더니티란 이름으로 정치,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의 진보와 발전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획일화와 동질화의 경향은 사실 훨씬 더 복잡하고 모호한 삶의 다양성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단순화시키고 통합화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이런 '거대 서사'의 위기는 또 다른 위기를 전제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방향을 제시해줬던 위대한 힘의 상실은 기존의 가치와 개념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고 그것은 동시에 삶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테티엔 근대 미술관은 그런 상황과 대면한 현대 미술가들이 현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들은 개개인의 작은 일상에서 부딪히는 작은 사건, 친숙하지만 은밀할 수도 있는 사적인 주제, 하나가 아닌 다수의 정체성을 내포하는 상황 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거대한 서사시가 아닌 작은 일상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연약하지만 섬세한 이들의 시선이 포착한 작은 현실들의 다양한 측면들은 전체적인 동질성으로 포섭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특징들을 간직한다.
만약 리오타르가 '거대 서사'가 사라진 시대를 사는 지식인에게 관용의 정신과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강조했다면, 마이크로 사회에 눈높이를 맞추고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 따른 다양한 시각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디테일한 사건들에 접근하는 현대의 예술가들은 그것을 예술적인 방식으로 실천하는 지식인들일 것이다. 초대된 85명의 작가들 가운데 김수자, 노상균, 천성명 등 아홉 명의 한국 작가들의 작업들이 소개된다.




리차드 아베돈전
7.1-9.28 파리, 주 드 폼므


주 드 폼므가 패션 사진의 거장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의 회고전을 기획했다. 1945년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를 위해 패션 사진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던 초기 작업부터 2004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제작한 총 270여점의 사진들이 전시된다. 움직임과 미장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의 패션 사진은, 단조롭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던 당시의 패션 사진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의 모델들은 가식적인 장식과 배경으로 꾸민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공원이나 나이트클럽, 혹은 상점과 같은 공공장소를 활보한다. 생명 없는 플라스틱 마네킹이 아니라, '사건'의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찍은 포토저널리즘 사진 속의 모델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다.
패션 사진 속의 모델이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통해 생동감을 되찾았다면, 아베돈이 찍은 예술가, 정치인, 영화배우 등 유명 인사들의 초상사진들에서는 모델의 미묘한 심리가 부각된다. 아베돈은 모델의 감추어진 이면들, 공적 인물로서 흔히 갖는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자신의 다면성을 드러내는 순간, 이 극도로 응축된 긴장의 순간을 포착한다.
패션모델이나 유명 인사들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스펙터클을 구성한다면, 1979년부터 84년까지 제작했던 «미국의 서부에서(In the American West)»라는 시리즈는 목장, 탄광, 가축 시장, 유전 개발 지역, 도축장, 도로 건설 현장, 남루한 식당과 사무실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나 부랑아, 노숙자 등 사회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계층을 찍은 사진들이다. 약속의 땅, 서부의 카워보이들, 미국의 신화를 이룩한 정복자나 개척자들의 강인하고 멋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힘겨운 노동에 지치고 더렵혀진 소시민들이다.
이런 유형의 사진과 화려한 패션 사진은 분명 이질적인 장르에 속한다. 하지만 사진을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사상의 표현으로 보았던 아베돈에게 있어, 이 두 장르는 모두 초상 사진이란 보다 큰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 투명성과 모호성, 아첨과 솔직함, 거짓과 진실, 추함과 아름다움 사이를 오가는 초상 사진의 복잡한 개념에서 어느 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기보다는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상기시키고 환원시키는, 서로가 서로를 항상 필요로 하는 변증법적 요소들처럼 작용하고 있다. 마치 아베든 자신과 모델이 주고받는 심리적인 대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