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감동 추구하기보다
자극적 상상력에 더 열광 <이건 어째 심했다. 난, 표현을 구속하거나 창작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최근에 뜬 '바람의 화원'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속에서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한 것은 좀 그렇다. 우리 문화사의 위대한 한 화가를 왜곡시킨 황당함에, 미술사 전공자로서 마음 한쪽이 씁쓸하다.
신윤복은 누가 뭐래도 멋진 '남자'이다. 자가 입보(笠父)이고, 호는 혜원(蕙園)이라는 점이 잘 말해준다. '입보'는 삿갓 쓴 남자를 이르는 미칭(美稱)이다. '혜원'은 난초향 짙은 뜰이란 뜻으로, 문인 취미에 걸맞은 아호이다. 정조(正祖) 연간 김홍도나 이명기와 함께 어진(御眞) 화사로 활동한 신한평의 아들이다. 도화서 화원으로 첨사 벼슬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관객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열게 하고 여자로 성전환당한 원인제공자는 신윤복 자신이긴 하다. 그는 관아의 후원에서 벌인 고위관료들의 여성행각부터 서민 남녀의 내밀한 뒷골목 만남까지 유교적 예절에 빗나간 애정사를 숨김없이 표현하는 한편, 개울에서 목욕하거나 빨래하는 등의 여성생활에 가까이 다가갔고, 〈미인도〉 같은 여인초상화를 남겼다. 그 선묘나 색감은 화사하면서 감미로워 여성취향을 짙게 풍긴다.
'여류화가 신윤복'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얘기하기도 낯부끄러울 만큼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사람들은 이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지난 10월 간송미술관의 가을 회화전에 신윤복을 만나러 장사진을 이룬 인파가 그 한 징표이다. '역사적 오답(誤答)'이라는 원작 소설가의 말대로, 신윤복을 부흥시켜 준 셈이다. 까칠한 우리 시대에 신윤복이 왜 되살아 왔는지 뒤돌아보자.
신윤복의 풍속화는 1805∼1813년 사이에 그려진 것들이다. 18세기에 쌓았던 정치·경제와 문예의 긍지가 무너지는, 곧 조선사회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순조시절이다. 세도정치의 시작과 함께 삼정(三政)의 문란이 자행되는 봉건사회의 해체시기에, 퇴폐적인 향락과 도덕적 해이를 들춰내어 영상화했다는 데 신윤복의 위대함이 있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그런 한편 인간의 감성에 솔직한 모습들이 생생한 신윤복의 화면은 근대를 앞둔 시기의 개방적 산물이기도 하다.
발칙스러운 신윤복이 다시 세상에서 빛을 본 것은 100년 뒤 1920∼1930년대이다. 일제강점에 의한 식민지 시절 대공황까지 겹쳐 민족이 고통스럽던 때이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문화코드로 등장한 모던-뽀이나 모던-걸과 동시에 신윤복의 풍속도가 떴다. 여러 화가들이 신윤복의 풍속도와 춘화들을 즐겨 모사했다. 또 성냥갑 그림이나 목욕탕의 벽장식, 그리고 광고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1930년대 대공황에 비견되는 불안스럽고 무력한 요즘, 또다시 신윤복 신드롬이 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여성으로 희화화된 신윤복은 현대 한국사회의 문화지형으로 읽힌다. 자극적인 상상의 표현이어야 사람들 마음을 끌고, 성정체성 혼란이 대중의 취미로 자리 잡힌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적 진실과 픽션의 왜곡 사이를 두고 논쟁하는 일은 진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훈련되어 매서운 신윤복의 손끝에서 되살려진 19세기 조선의 분방한 모던 남녀, 그들의 아름답고 정밀한 이미지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때 어떤 패션이 유행했나를 알려주는 복식사전의 역할마저 할 정도이다. 이처럼 세밀한 고증으로 자기 시대를 꾸밈없이 드러낸 회화의 사실미는 분명 상상보다 감명 깊다. 신윤복 풍속도를 보고 '상상하기' 못지않게, 지금 '신윤복 되기'가 필요한 시대는 아닐까. < 조선일보 200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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