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란 작가론
소비사회와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우울한 환영
김성호(미술평론가)
전화기, 팩스, 계산기, 사진기, 녹음기, 비디오카메라, 내비게이션 등 그 동안의 차별화된 전문 영역의 개별 기기들은, 오늘날 각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내던지고 컨버전스(convergence)를 외치면서 우리가 그러쥔 스마트폰 안으로 사뿐히 들어와 앉았다. 손바닥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시대에 작가 최혜란은 새로운 문제의식들을 자신의 작업 안에서 되뇌고 곱씹는다.
내비게이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따라 핸들을 돌리거나 전자기기들로부터 나오는 정보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전자적 유토피아 혹은 디지토피아(Digitopia)의 세계를 꿈꾸는 현대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노예로의 추락이 아닐까?실제의 오프라인 현실계에서는 타자 앞에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주체의 내면을 SNS와 같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장에서 일기장을 쓰듯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인의 왜곡되고 전도된 욕망 때문이 아닐까? 분명코 그것은 현대인이 모두 체감하는 ‘병적 징후(sign)’의 일단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 원인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증후군(syndrome)’이기조차하다.
최혜란은 그녀의〈Ipone Series〉 작업에서 특정 브랜드의 스마트폰이 콘텐츠 생산 시스템으로 구축한 앱(App)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통한 편리한 삶이 외려 주체들의 삶을 통제하고 강제하는 아이러니 자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수많은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유형들이 실제로는 '디지털 인터페이스(interface)'가 만들어내는 지독한 환영에 다름 아님을 선언하는 그녀 작품의 메시지는 액정 화면이 꺼진 스마트폰에 비친 자신의 자화상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 가상의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를 성취하는 ‘앱아이콘’들의 실재란 허망한 신기루에 다름 아니다. 앱의 시스템은 ‘당신이 정보 생산의 주체’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그 실상은 ‘정보 소비의 주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팩트를 깨닫게 될 때, 우리를 마비시켰던 디지털 환영은 그 정체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낸다.
최혜란은 최근의〈Relocation Series〉작품에서 ‘현실/가상’ 사이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했던 그간의 디지털 환영에 대한 문제의식을, 쇼윈도를 인터페이스로 삼아서 일상과 현실의 장으로 끌고 내려온다. 그것은 일견 상점 쇼윈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투영(내부)/반영(외부)’이 교차하는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것은 시공간이 각기 다른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오버랩시킨 것이다. 그것은 각기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을 수시로 감행시키는 조합적 화면을 구축한다. 예를 들어 작가는, 공원에서 나들이하는 가족, 도심을 걷는 익명의 행인들, 커피숍 안에서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연인들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의 사건들을 쇼윈도 이미지에 함께 겹쳐놓음으로써 그것이 마치 쇼윈도 내부/외부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처럼 위장시켜놓는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 이미지를 참조한 하이퍼 리얼리즘의 출중한 테크닉과 더불어 그것에 의한 환영을 구축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관객들이 저마다 발견해내길 기대하는 것이다.

최혜란_relocation-4_캔버스에 유채_33.3×53cm_2012

최혜란_relocation-5_캔버스에 유채_72.7×116.8cm_2012

최혜란_relocation-8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12
컴퓨터 모니터, 스마트폰 액정화면이 ‘가상/현실’을 매개하는 인터페이스이듯이, 그녀의 작품에 표현되고 있는 쇼윈도는 현대의 소비사회의 ‘화려한 욕망/비루한 현실’을 매개하는 유효적절한 인터페이스이자, 오늘날 디지털 환영에 잠입하는 멋진 은유적 인터페이스가 된다. 실제 촬영된 사진을 중첩시키는 렌티큘러 작업은 이러한 은유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전통적 회화의 영역인 환영과 사각의 프레임을 고수하면서 이것을 가상현실과 현실 간의 인터페이스로 전환시키는 그녀의 회화적 재능은 괄목할만하다. 현대의 소비사회의 충만함으로부터 이면의 허망한 부재의식을 이끌어내는 깊은 통찰과 이것을 비트는 비판적 메시지, 정교하고도 세련된 회화적 장치는 또 어떠한가? 그것은 신진의 위상마저 넘어선다.
그럼에도 남겨진 관건이 있다면, 이러한 점들에 비해서 그녀만의 고유한 날것의 회화적 언어와 독창적인 작품 세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의외로 작가 외부를 대면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작가 내부에 잠입하는 문제의식으로 전이하거나 양자가 함께 비중 있게 작동하는 지점에서 쉽게 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출전/ 김성호, “소비사회와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우울한 환경”, (최혜란 작가론)『화성시문화재단 신진작가』, 카탈로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