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론
죽음 이후의 탄생-이배 작품의 존재론적 미학 (1편)
김성호(미술평론가, 미학예술학 박사)
서론
이 글은 이배(1956~ )의 1990년 도불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적 작품에 관한 미학적 분석에 치중한다. 필자는 그것을 죽음의 문제의식과 연동하는 존재론적 미학으로 탐구한다. 먼저 필자는 이배의 작품에 내재한 질료적 속성으로부터 유출되는 '죽음을 상정한 숯의 메타포', '숯과 검정의 연금술', '불과 빛'과 같은 개념들을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주목한다. 필자는 개념 분석과 아울러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그의 회화를 '운동성의 무엇'으로 파악하면서 '획(劃)의 풍경'으로 명명한다. 아울러 그의 2001년 이후 시작된 새로운 작업들을 '창작의 염(殮)'과 같은 주제의식으로 풀이하면서 그가 '죽음 이후의 탄생'이라는 존재론적 미학을 어떻게 탐구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죽음으로부터 - 숯의 메타포
이배의 작품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존재의 현현(顯現)을 정지시키고 속박하는 것이자 차안(此岸)의 현실계로부터 피안(彼岸)의 현실 너머의 세계로 탈주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의 의지를 좌초케 하는 새드엔딩임과 동시에 주검을 열반(涅槃)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해피엔딩이기도 하다. 이배의 작품에서 죽음이란 자연 혹은 사물의 주검으로부터 귀납되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즉 그의 작품은 자연 혹은 사물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과 관계한 존재론적 미학을 제시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인간에게 죽음은 타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간접체험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죽음과 관계한 존재론적 미학은 언제나 비유를 통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 로드킬을 당한 야생동물,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은 자연 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수한 인공의 사물들 역시 이러한 인간의 죽음과 관계한 존재론적 사유의 대상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배의 작품에서 그것은'숯'으로 대별된다.
'숯은 모든 사물의 마지막 종착지이다. 현실의 존재를 모두 벗어버린 마지막 물성이며 순수한 물질이다.'1)
숯은 나무라는 생명체가 최종적으로 죽음에 이른 주검이자 그의 언급에서처럼 사물의 마지막 종착지이다. 즉 그것은 자연체로부터 화장(火葬)이라는 장사 의식을 통해서 사물로 변이된 최후의 존재이다. '물질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사물이라고 정의한다고 할 때, 그것은 애초부터 자연체와 변별되지 않는 동격의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화장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체의 주검으로부터 오브제 속성의 단순한 사물로 추락한 마지막 종착지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환된 '단순한 사물'로서의 숯이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서 이배 작품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이배가 드로잉 작업을 위해서 숯을 사용하면서 죽은 사물에 질료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련의 창작의 과정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논하기 전에 숯이라는 단순한 사물이 이와 같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전환되는 일련의 존재론적 미학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숯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배에게서 '에너지에서 나온 물질이자, (...) 그 에너지를 다시 발산해내는 물질'로 이해된다. 즉 그것은 자연체의 주검을 재확인하는 '불의 탄화작용으로 생성된 자연물질이면서 그 불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죽은 듯이 보이지만 결코 에너지가 소멸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물질'2)인 것이다.
우리는 작가 이배가 '숯'을 주검과 생명의 자웅동체인 질료, 즉 자연체의 죽음에 이른 주검의 변형체이자, 잠재적 생명의 에너지를 지닌 존재로 해석하면서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 주된 재료로 등장시키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사용된 숯이라는 재료가 작업 초기부터 재료 자체 내에 지닌 존재론적 미학, 즉 '소멸/생성'의 미학 또는 '부재/존재'에 관한 미학을 탐구하는데 집중한 것이 아니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그가 처음 숯을 자신의 작업에 재료로 사용한 것은 순전히 경제적 현실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1990년 2월 파리에 도착하여 이어간 그의 화업에서 당시의 궁핍했던 경제적 상황은 한국에서처럼 여유로운 재료 사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경제적 수입이 없던 당시에 그것도 외국에서 화업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파리 화방에서의 높은 가격의 화구들을 구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배는 작업을 위한 재료로 숯을 처음 사용하게 된 에피소드를 다음처럼 들려준다.
'제 작업실 근처에 마침 조립물품과 건축자재를 파는 곳이 있어서 둘러보았더니, 바비큐용 나무 숯들을 큰 자루에 담아 팔고 있었습니다. 저는 뚜렷한 사용 목적이 없이 그 숯 자루 하나를 들고 왔지요. 글쎄요, 가져온 이유를 든다면, 제가 서울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학창시절의 경험을 떠 올려서일 겁니다. 그때 저는 목탄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었는데, 파리 초창기에 발견한 이 숯들도 실상 미술대학 시절 사용했던 그 목탄과 동일한 재료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다행스럽게도 자루 하나에 담긴 숯으로 일주일 동안 작업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이 사실은 당시 저로서는 대단히 고무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왜냐면 숯이란 재료 덕분에 비싼 가격의 화방 재료들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놓고 얼마든지 작업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
그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드로잉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구입했던 바비큐용 숯은 당시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는데 있어 당면했던 경제적 어려움을 타계할 수 있었던 매우 유용한 해결책이 된 셈이다. 그는 당시 세이타 제조공장 건물 안에 마련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지속해나가면서, 단순히 드로잉 재료로만 간주했던 값싼 숯이 자신의 향후 작업에서 주요한 메타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인체 드로잉을 위한 재료로 단순히 목탄처럼 사용되었던 바비큐용 숯이 다양한 실험적 모색을 거듭하게 되면서 점차 다양한 표현 언어를 지닌 질료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반투명한 아크릴 용매에 담갔던 숯덩이를 사용하게 되면서 두터운 숯가루 층을 캔버스에 효과적으로 고착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나 고착된 숯들을 반복적으로 문질러서 흥미로운 마티에르 효과와 물질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던 다양한 실험들은 향후 그의 작업에서 숯이라는 재료가 '질료로부터 메타포로' 발전해나가는 주요한 계기들이 된다.
이배 작업이 발견하게 된 '숯의 메타포'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삶, 소멸/생성 사이의 합체가 현현(顯現)시키는 존재론적 미학 뿐 아니라 사물의 존재론부터 인간 존재론을 유추케 하는 암시적 메타포(implicit metaphor)라 할 것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사물의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삶을'을 이끌어내는 활유법(活喩法)'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이배 작업에서 숯은 '사물의 죽음/삶'을 표방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죽음/삶'으로 확장되는 메타포를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로부터 죽음에 이른 연약한 숯덩이가 다시 불을 피우는 생명력으로 되살아나 형질 변화의 메타포를 실행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연금술과 같은 것이다.


이배_불의 이슈(issue)_숯 덩어리 집합_70 x 70cm x 60cm_1998
(아래 2~5 생략. 2015년 발간될 김성호의 미술평론집 및 출전 참조하실 것)
2. 삶으로 - 숯과 검정의 연금술
3. 사물로부터 인간으로 - 불과 빛
4. 형태의 변형과 운동 - 획(劃)의 풍경
5. 죽음 이후의 탄생 - 창작의 겹과 염(殮)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