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한나절, 그림전 두 곳을 들렀다. 옛 그림이 있는 전시회다.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문화예술 잔치들이 다채롭게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그림전, 하필 옛 그림을 찾아갔을까. 가을이 이유이지 싶다. 가을은 되돌아보고, 추억을 끄집어내고, 성찰하는 것과 어울린다.

미술관, 갤러리는 조용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기가 좋다. 옛 그림은 또 어떤가. 옛 그림은 긴 세월이 만들어낸다. 좀이 슬어 해진 비단의 올올마다에, 웅숭깊은 맛이 나는 먹빛에 수백년의 시간이 쌓였다. 그 시간들만큼 사연이 녹아있다. 끄집어낼 이야기가 있으니, 생각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지난 봄과 여름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낙엽과 닮았다.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회 ‘화훼영모대전’에는 60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고려 공민왕 작품이 나왔으니 600년이 넘는다. 화훼영모화를 모아 더 반갑다. 사소하고, 소소하다는 이유로 주목을 덜 받은 게 화훼영모화 아니던가. 닭도 있고 패랭이꽃도 있는 정선의 화첩, 김홍도의 개,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은 그 정교한 세필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이함의 작은 그림 ‘秋禽棲棠(추금서당)’은 한바퀴 돌고 다시 가서 봤다. ‘가을 새가 해당화 가지에 깃들었으니’ 가을 냄새가 듬뿍 난다. ‘향기는 멀수록 맑다’는 강세황의 화제 ‘香遠益淸(향원익청)’은 그 뜻을 두고 되새기게 한다.

학고재 갤러리의 ‘춘추’전에는 옛 그림과 지금의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백하 윤순의 ‘초서’와 송현숙의 ‘13획’이, 정선의 ‘인왕산도’와 정주영의 ‘인왕산 8-1’, 정선의 ‘박연폭도’와 이세현의 ‘Between Red-111’, 석파 이하응의 ‘묵란첩’과 김홍주의 ‘Untitled’…. 서로 색채도 구도도 닮지 않았다. 작가의 시선도 다르다. 그런데 그 속은 닮았다. 수백년 시공을 넘어 예술가는, 예술의 정신은 그렇게 서로 소통한다. 아주 흥미롭다.

옛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먹 가는 모습, 붓질 장면도 그려봤다. 숱한 소장자들의 수백년 동안 이어진 가슴설렘도 상상했다. ‘거저 줄테니 딱 한 개만 고르라면, 어떤 작품을 점 찍을까.’ 전시회에 함께 간 벗과 낄낄 웃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 도심 속에서도 제 철을 증명하는 단풍든 나뭇잎과 꽃들, 투명한 햇살과 하늘…. 자판기에서 차 한잔을 뽑아들어 벗과 소소한 즐거움을 공짜(!)로 잘 누렸다. 새삼 힘이 난다.

60여년 전에 작가 조지 오웰은 썼다. “확실히 우리는 불만족스러워할 필요가 있으며, 잘못된 현실을 최대한 잘 견디는 방법을 찾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고. 맞는 말이다.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보편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가치관마저 뒤엉키는 현실을 그저 잘 견뎌내는 방법만을 찾아선 안된다.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 거대한 구조적 문제를 잊어서도 안된다. 오웰은 곧 이어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생활 속의 모든 즐거움을 다 죽여버린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는 런던 시민들에게 도심에 찾아온 “봄을 즐기자”고 권했다.

너나없이 먹고 살기에 바쁘다. 정의, 공정의 개념까지도 헷갈리는 이 땅은 삶을 더 팍팍하게 한다. 생활 속의 작은 즐거움을 맘껏 만끽할 수 있는 세상, 모두가 꿈꾸는 더 나은 사회이지 싶다.

벗이 말했다. “오웰의 말이 백번 맞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의 맛을 알아야 그 속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참된 저항의 힘도 얻는 것 아니냐?”고. 곁에 말없이 다가온 가을날,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 그 속에서 힘을 얻어본다.
<경향신문 20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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