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186
기초 예술을 죽이는 국회
저자가 한 권의 책을 집필하고 받는 돈은 얼마나 될까. 책값이 8000원인 책을 초판 3000부 찍었을 경우 저자의 인세가 10%라면 240만원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책을 집필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한 권의 책을 집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내용에 따라 어떤 경우는 3개월,어떤 경우는 1년,어떤 경우는 3년이 넘게 걸리는 수도 있다. 짧게 잡아 5개월이 걸린다 해도(이렇게 빨리 쓸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앞의 인세를 월 평균으로 따지면 저자가 한 달에 받는 돈은 50만원도 채 안 된다. 물론 그 책이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수만명의 작가 중에서 극히 몇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책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경우는 어떤가. 화가가 책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그림이 주가 되는 그림책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와 글이 주가 되는 책에 삽화를 그리는 경우,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그림책 그림을 그릴 경우 화가는 평균 7% 정도의 인세를 받는다. 삽화를 그릴 경우는 평균 3%의 인세를 받는다. 그림책을 한 화가가 그려내려면 얼마나 걸릴까. 책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차만별이다. 우리 출판사의 경우,한 화가가 그림책을 빨리 그리면 1년이 걸린다. 삽화의 경우,걸리는 기간을 5개월로 잡아 보자. 같은 계산법으로 책값이 8000원인 책을 3000부 찍어 받는 인세는 두 경우 모두 월 평균 15만원이 채 안 된다. 작가와 화가가 최소한 밥은 굶지 않아야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기에 출판사들은 경우에 따라 일정 부수의 선인세를 미리 지급한다. 그나마 출판사와 관계를 맺고 일하는 작가와 화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우리 나라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미술,연극,무용 등 이른바 ‘기초 예술’의 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 지원 정책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물론 재정 지원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문화예술을 살리는 최소한의 필요 조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기초 예술 생존을 위한 법’이라 할 수 있는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지난 16대 국회에서 끝내 좌초되고 말았다. 문예진흥법 개정안은 문화관광부가 각계각층의 문화예술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난해 11월 국회에 제출한 법안이다. 주요 골자는 현행 관 주도의 문예진흥원을 폐지하고 대신 민간 위주의 ‘문화예술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다. 또 현행법 23조의 ‘모금을 할 수 있다’는 부분이 개정안에서 ‘기부할 수 있다’로 바뀌어 로또복권 수익금 등의 일부가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했다. 개정을 요구한 당사자인 문예진흥원은 “올해부터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폐지돼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환경이 바뀌었으므로 위원회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급한 법안이 왜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것일까.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은 문화예술위원회 11인을 문화관광부 장관이 위촉할 경우 편파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고 시비를 걸었다. 시비를 건 자들의 요구대로 결국 6명은 국회에서 추천하자는 의견까지 받아들였는데도 왜 또다시 거부되었을까.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KBS 수신료 분리안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과 연계한 정략적 이해 때문에 좌초시킨 것이다. 국회의장 직권으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해달라는 문화예술인들의 마지막 요구마저 묵살당했다. 국회는 결국 문화예술을 당리당략에 이용했다. 문화예술계의 자율적 창조 활동을 지원하는 법 개정이 우선인가, KBS라는 매체의 자율성을 위협하는 법 개정이 우선인가. 코뚜레 뚫다 소가 웃을 일이다. 17대 국회에서 국회가 문예진흥 개정법안의 주체가 되어 제대로 통과시키지 않을 경우, 이 땅에 문화예술의 꽃봉오리들은 피지도 못하고 하나둘씩 스러지고 말 것이다.
- 국민일보 2004. 3. 24 <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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