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골목길을 참 좋아한다. 내 나라뿐 아니라 처음 가 보는 지방의 도시나 외딴 섬의 골목길들, 아니 남의 나라 골목길들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아마도 내가 어린 시절을 막다른 골목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막다른 골목 끝에 있던 막다른 대문 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린 시절의 집에 관한 추억 때문인지 지금도 어디든 골목길에 서면 어머니 뱃속처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곤 한다.

기억 속의 첫 번째 골목길은 서울 내수동의 좁은 골목이다. 그곳에는 가게는 없고 집들만 오롯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 집에서 골목길을 걸어 나와 가게가 있는 큰길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었을까? 어릴 적엔 길게만 느껴지던 그 거리는 지금은 사라져 재어 볼 수가 없지만, 아마도 그건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 세월의 거리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두 번째 골목길은 인사동과 낙원동 골목이다. 낙원동으로 이사를 가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기억 속의 골목길들은 내 성장통의 아픔과도 맞물려 있다. 낙원동은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오피스텔이 들어선 것 말고는 별로 변한 게 없다. 종로 3가로 가는 길목에 있던 파고다극장이 사라진 것 말고는 낙원상가도, 지금은 서울아트시네마로 바뀐 허리우드극장도, 양품점도, 떡집도, 약국도 그때 모습 그대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파고다극장에서 본 영화 ‘돌아온 외팔이’가 생각난다. 날아다니며 칼싸움을 하는 홍콩 무협영화였지만 그때는 정말 인상깊게 보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시인 기형도가 파고다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었다. 낡고 음산한 파고다극장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낙원상가 4층에 있는 옛 허리우드극장인 서울아트시네마에 자주 간다. 좋은 영화를 많이 상영하기도 하지만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다. 학교에 가려면 긴 인사동 길을 지나가야 했다. 내 기억에 인사동 거리는 어수선한 느낌의 지금보다 옛날이 훨씬 좋았다. 천경자와 변종하의 그림이 걸려 있던 선화랑을 기웃거리며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기억이 난다. 쌀쌀맞게만 느껴지던 선화랑의 김창실 대표는 참 미인이셨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분도 자태 고운 할머니가 되셨고, 뭉크의 그림을 좋아하던 사춘기 시절의 나도 그 낯익은 골목길들과 함께 늙었다. 뉴욕에 체류하던 서른 살 시절, 꿈속에서도 그 골목골목마다 바리바리 음식을 차려 내오는 인사동의 한정식 집들이 늘 그리웠다.

미국에는 좁은 골목길들이 없다. 시내에서 산이 보이는 곳도 없다. 시내 한복판에서 산이 보이는 곳, 맘만 먹으면 금세라도 산에 오를 수 있는 곳, 아름다운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서울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예전에는 정말 몰랐다.

어제는 인사동 가는 길에 등(燈)축제가 열리고 있는 청계천의 불빛에 매혹돼 화려한 각 나라 등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걸었다. 늦가을의 정취에 청계천에 흐르는 물소리가 보태져 포근하고 정겨운 밤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이 같은 얼굴로 화려한 등축제를 구경하는 모습들이 행복해보였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자살 같은 것은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저 화려한 등들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따뜻한 행복의 불씨로 타오르기를 바라며, 등 하나를 지날 때마다 소원을 빌어 보았다. 전쟁 같은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아이들과 노인들이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풍요로운 나라가 되기를. 청계천의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인사동 길을 향해 걸었다.

지인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한정식 집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어서 이름이 낯설었다. 그 좁은 골목길에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인사동 길에서 크라운 베이커리를 끼고 돌아 작은 골목길로 걸어 들어간 곳에 ‘태화’라는 음식점 간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그 옛날 살던 우리네 한옥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고즈넉한 방 안에 앉아 방 천장의 서까래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저녁이었다.<-문화일보, 2010. 11. 18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111801033037191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