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은 우리 민족의 뿌리이며 정체성의 근간이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이 역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문을 연 곳이 국립농업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서 학예분야를 총괄하는 이가 있다. 20년 가까이 농협 농업박물관을 이끌었던 김재균 전 관장이다. “국립농업박물관의 기획에 참여했다가 초대(初代) 임원으로 오게 되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데, 박물관 역시 개관 후 3년이 중요합니다. 우리 박물관의 성격과 전통의 기초를 다지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립농업박물관 김재균 학예연구본부장의 일성이다.


자료 기증 협의(2022.5.17), 좌 김재균 


김재균이 박물관과 첫 인연을 맺은 건 2005년이다. 농협중앙회에서 박물관장 보직 공모를 시행한다는 지침이 발표되었다. 학부에서 고고인류학을 전공한 김재균은 고민 끝에 지원하게 된다. 직장인으로서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그 당시 김재균은 입사 17년 차로 10년째 홍보업무를 맡고 있었다. 홍보 분야에서 전문가 반열에 올라있던 김재균의 박물관행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왜 한직으로 가느냐?’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김재균은 지금도 가끔 ‘만약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

2005년은 농업박물관이 재개관한 해다. 1987년 개관한 박물관은 노후화로 같은 자리에 신축이 결정되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던가. 새 박물관인 만큼 새로운 관장이 필요했다. 김재균이 선택한 자리였다. 김 관장은 공사가 한창일 때 부임했다. 공사장 현장감독이 된 것이다. 현장은 온갖 기계음으로 요란했고 화학약품 냄새도 진동했다. 
개관일은 다가오는데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공사를 진두지휘하며 새벽에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몸은 고단했지만 새로운 박물관을 상상하다 보면 피로가 사라지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마무리되어 성대하게 개관식도 거행되었다. 축하도 잠시,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운영이 걱정이었다. 개관 준비에만 집중하다 보니 이후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출근하면 일차적으로 전시실을 돌며 전시품과 동선을 익히며 오류를 찾아 수정·보완하는데 노력했다. 다음으로 새로운 박물관에 맞는 업무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시너지 확대와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인접 박물관 인들을 만나 소통에도 힘썼다. 전시와 교육, 유물관리 등 운영 전반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하기 위해서다. 자투리 시간에는 박물관 발전구상에 집중했다. 무엇보다도 관장부터 전문성을 갖추어야 했다. 이를 위해 박사과정에도 진학했다. 
경력인정대상 박물관으로 지정받아 학예사 자격증 취득 희망자들에게 실무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설립 이래 처음으로 소장유물 문화재 지정도 추진해 두레 농기 4점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으로 그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간 쌓은 홍보 전문역량을 토대로 박물관을 알리는데도 진력했다. 
박물관에서 관(館)은 전시를 전제한다. 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과 모양, 용도가 특이한 유물들만 따로 모은 《이색농기구전》, 제주농업을 소개한 《제주농업유물전》, 봄 농사 도구들을 모은 《봄농사전》 등 적지 않는 전시를 개최했다. 매월 한 가지 농사 도구를 엄선한 《이달의 농기구전》도 성황리에 진행했다. 


모내기지도


2013년에 연 《농업보물전》은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농업유물은 왜 보물이 없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 전시는 농업유물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추후 농업유물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이 전시가 단초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2019년의 《섬농사, 섬에 살으리랏다》전도 큰 호평을 받았다. 섬에도 농업과 농민, 농산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전시였다. 전시를 위해 인적 드문 섬을 찾아 서너 시간씩 배를 타고 들어가 먼지 덮인 농기구를 수집하며 풍광을 카메라에 담아가며 촌로들의 경험담을 녹취했다. 이 모든 것은 김재균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기억의 수장고에 잘 보관되어 있다.
김재균은 경북 상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경상도라는 명칭이 경주와 상주에서 기인한 것에서만 보더라도 상주는 역사성이 깊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였을까, 김재균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중고등학교 때 역사는 그에게 가장 즐거운 과목이 되었다. 이것과 신설이라는 신선함을 계기로 학부와 대학원에서 고고인류학을 전공하게 된다.
“제가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1회 졸업생입니다. 신설학과라 전망이 좋을 것 같은 기대도 있었지만, 인간의 노정과 인류가 남긴 문화를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학문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요즘이야 취업이 잘되는 소위 돈 되는 학과에 관심이 있지만, 당시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학문을 해보겠다는 열의도 좀 있었고요.” 김 관장의 말이다. 
한편, 개관 후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2008년 봄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기 지역에 오래된 쟁기가 있으니 수집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는 늘 김재균을 설레게 했다. 다음날 소장자를 찾아갔다. 쟁기는 재래식 화장실 안쪽 벽에 오랜 세월에 쌓여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빗자루로 먼지를 털어내자, 그 자태가 드러났다. 이미 80대가 넘은 소장자는 선친이 20대에 직접 제작해 70년대까지 사용한 거라 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100년쯤 된 겨리쟁기였다. 이 지역 땅이 거칠고 돌이 많아 이런 쟁기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국립농업박물관에서 시민 대상 특강(2023.10.27)


슬쩍 기증이나 판매 의사를 떠봤지만, 선친의 손때가 묻은 거라는 이유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당한 말이었다. 끈질긴 수집 작전이 시작됐다. 마음을 움직여야만 했다. 수시로 안부 전화나 찾아뵙기도 했다. 물론 쟁기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일종의 ‘성동격서’ 전략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5년여 만에 기증 의사를 밝혀왔다. 그 쟁기는 2013년 농업 보물 제1호로 지정돼 《농업보물전》에서 수집 과정의 스토리와 함께 선보이게 되었다.
또 개관 후 얼마 되지 않아 노인 한 분이 도끼눈을 하고 관장실로 찾아왔다. 김재균을 보더니 대뜸 “당신이 관장이요?, 제사상이 엉터리던데, 당장 바꾸시오.” 막무가내 명령조였다. 설명해 드려도 이해하실 것 같지 않아 “예,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히 말씀드린 후 보내드렸다. 물론 제사상은 바꾸지 않았다. 제사는 가가례(家家禮)다. 지내는 방법이 집안마다 다르다는 얘기다. 토질과 쓰임에 따라 호미며 낫, 쟁기가 다르듯 말이다.
“이렇듯 박물관에는 박(博: 넓다)이 말하듯, 다양성과 다름을 인지하여 공감하고 소통하여 포용하는 가치가 내재 되어있습니다.” 김재균 관장의 박물관론이다. 
필자가 늘 가까이서 봐온 김 관장의 인품과도 연결된 지점이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 김재균(金在均, 1961- ) 
경북대 대학원 석사 고고인류학 전공, 한양대 교육학(박물관 교육) 박사. 농협중앙회 입사(1988), 홍보실 근무(1994),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장(2005-21) 역임. 현재 국립농업박물관 학예본부장(상임이사), 국가유산청 무형유산위원회 전문위원. 농협중앙회 회장상 수상,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박물관 발전 유공) 수상,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수상. 『박물관장이 쓴 農박물지 ‘남편을 기증해도 되나요’』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