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화가? 저항의 화가, 윤형근


김종근 | 미술평론가

그는 누구인가? 
윤형근 작가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한국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특히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물성을 실험하고 기법과 과정을 중시한 영향력 있는 미술가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과 더불어 이른바 단색화 운동과 관련된 가장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인 미니멀 아티스트로 평가된다.그의 작품세계는 추상회화에 있어서 독창적인 표현과 구성으로 독특한 예술적 세계를 구축했다. 워낙 생전에 말이 없어 많은 사람은 그를 ‘침묵의 화가’ 불렸다.
그러나 윤형근 작가의 작품은 그 출발이나 형식에서 서명은 침묵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의 예술가로 분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미술사에서 민주화를 주제로 하거나 독재를 비판하는 구체적 형상이나 미술운동은 1980년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이나 철학을 이렇게 철저하게 비구상이나 추상으로 표현은 사례는 현대미술사에 찾아보기 어렵고 국내외로 볼 때도 아주 이례적이다.
이런 시각과 의미에서라도 윤형근의 작품세계는 침묵의 화가가 아니라 불합리한 현실에 저항한 화가로 윤형근은 한국 미술사에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윤형근의 작품은 국내외적으로 새롭게 평가를 받아 그의 작품이 영국의 테이트 모던과 미국의 시카고아트인스티튜드, 독일 로이틀링겐 미술관 등에 소장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윤형근 작가는 1928년에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청주시로 편입이 되었지만 부친은 경기고보 출신의 지식인으로 서예, 동양화 등으로 유명했던 해강 김규진에게 사사할 정도로 예술적 소양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예와 사군자를 즐긴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윤형근은 아버지의 희망과 뜻에 따라 청주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청주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몇 달 후 해방이 되었고, 졸업 후 잠시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정확히는 미원금융조합에 서기로 입사 근무를 했다.
 청주사범학교 단기 강습과를 마치고 교사생활을 하던 중 윤형근은 그림에 뜻을 굽히지 않고 1947년 21살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에 시험을 치르면서 제1기로 입학을 했고  (서울대 1회 졸업생은 정창섭과 박노수 등)이 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환기 시험 감독을 만나게 된다. 서울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였으나, 불행히도 윤형근은 미 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제적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윤형근에게는 많은 시련이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에 막상 입학하게 되지만 반정부 운동에 가담한 시위 전력 있는 사람은 서울대 복학을 시켜주지 않아 부득이 학교를 떠나게 되고, 홍익대학교로 편입하게 되는데, 이때 서울대에서 홍익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가 도움을 주어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에는 대학 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험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윤형근은 스승 댁인 김환기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나란히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1960년 김환기의 큰딸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수화와 윤형근은 스승과 제자에서 장인과 사위가 되었다. 수화를 아버지, 수화의 부인인 김향란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홍익대를 졸업한 후 고향 청주여고에 교사가 됐지만, 다시 4·19 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여 부당한 발령을 받고 교사직을 떠나게 된다.
또한, 윤형근은 이미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는 이유로 1956년 서대문 형무소에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하는 등 그 이후에도 세 번의 복용과 한 번의 죽을 범위를 넘기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겪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이후 숙명 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66년 서울 신문회관 화랑에서 작가로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윤형근의 초기 그림은 비교적 밝은 색채에 감성이 풍부한 작품을 보여주었으며 매우 서정적이고 풍부한 감성으로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의 색채와 형태의 구성 등에 영향을 깊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작품은 과천에서 열린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 대표 추상미술가 47인의 작품 150여 점에서 확인된다) 
1973년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당시 윤형근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했던 부정입학 비리 사건을 폭로 '반공법 위반'의 죄명으로 서대문 형무소로 잡혀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시기 이후 윤형근의 작품에서는 초기 비교적 밝은 색채의 작업이 사라지고 전형적인 '검은' 작품의 색채와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경험한 윤형근은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작가로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서러움과 울분을 표현한 '속이 타들어 갈 때'의 색을 형상화한 듯 '청다색'이 등장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최종태 (조각가. 전 서울대 교수)는 윤형근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색채도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 대한 상처와 굴곡진 인생 이었을 꺼라고 밝힌 바 있다. (다큐멘터리 윤형근 ) 이런 그의 화풍은 당시 한국 미술의 흐름에서 비교적 흔하지 않은 캔버스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암갈색의 엄버(umber)는 흙색으로 실제로 토양에서 유래한 물감 이름인데 작가는 갈색엄버와 짙은 블루의 색을 섞어 푸른 기운이 있는 검정에 가까운 색채에 기름을 섞어 면포나 마포 위에 쭉 내려그었다.
문제는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과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의식이다. 
무엇보다 윤형근이 사회와 현실을 바라다보는 눈은 매우 정직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성품이었다. 그는 작가의 일기에서 빈번하게 그 합리적 도덕성을 기록으로 발언했다.  
“나는 무엇이고 옳지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 화가 난다. 협상을 두고 볼 수가 없다. 편리한 쪽에서 양지쪽에서 사는 그라운드를 보면 화가 난다. 비겁한 놈들이다. 왜 정정당당하게 살지 못해” 라고 주장했다.
미술창작이나 작품도 그러한 맥락에서 기준이 되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피상적으로 표피가 알록달록하고 빛깔이 곱고 뭐 이런 게 아름답다고 난 생각 안해.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인간이 바로 서야..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에요.
...가장 높은 품격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 이렇게 예술가의 인간관과 도덕적 가치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했을 때 강한 색채가 눈에 띄는 색면 추상화인데 이 때의 출품작이 2021년 유족이 작업실을 정리하며 발견,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69-E8’(1969)을 과천관 전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다.
시대의 여러 상황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윤형근은 초기에 서정적이고 감수성 있던 다양한 색채들이 점진적으로 암갈색으로 바뀌고 더욱 어두워졌다.
작가는 이러한 색채의 변화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 좋아야 했던 20대 청춘을 그래서 다사롭고 고운 색채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어둡고 살가운 빛깔로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정의와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던 윤형근은 작업실에 칩거하면서 틀어박혀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자신의 진정한 철학과 속마음과 생각을 색으로 담은 작품을 쏟아냈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단순히 추상주의 화가나 색면 추상작가로만 분류할 수 없다는 중요한 이유이다. 윤형근의 성정과 스스로의 기질,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겪은 후 그의 작품은 점점 색채와 형태에서 더 깊고 단단 해지며 감정이 색채로 변화한 것이다. 
격동의 시기에 울분이 거대한 검은색 기둥으로 변하여 윤형근의 70~80년대 대표작들이 된 것이다. 그의 현실에 대한 저항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5일 쿠데타와 전두환 장군의 계엄 정부에 항의한 광주항쟁 사태에 깊은 분노와 좌절을 느낀 윤형근은 평화를 찾기 위해 그해 12월 파리로 향했다. 
당시 그는 “예술은 똥이다.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 죽은 거냐 ” 울분을 토해냈고 예술의 무용론을 주장했다.
광주항쟁 때 시기의 작품 색을 보면 기둥들이 쓰러지는 모습과 서로 기댄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물감이 번지다 못해 하염없이 아래로 흐르는 듣는 모습은 시대의 아픔을 담담히 담아낸 슬픔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발견된다” 표현하기도 했다.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과 마치 쓰러진 기둥들이 검은 피로 흘리고 있는 상징적인 작품 이미지를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윤형근의 작품은 다시 한 번 더 변화가 오는데 파리에서 작품들은 그전 작품들과 비교해 한층 심플하고 간결해졌다.  
그러나 청년기의 아픈 상처를 겪은 그는 90년까지 색채를 없애고, 강한 번짐 효과와 여백을 활용한 특유의 천지문(天地門) 양식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땅과 하늘이 만나 검은색을 이루며 새로운 문을 여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윤형근은 이러한 자신의 패턴을 천지문으로 명명했고 천지문(天地門)은 하늘, 땅, 문을 의미하는 작가의 브랜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하늘을 뜻하는 울트라 마린 블루의 '청색', 흙의 색인 번트엄버의 '다색'을 섞은  '청다색'을 린넨, 캔버스, 한지 등 재료 위에 큰 붓으로 그어 내려 색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한 것이다. 격동의 시기를 다른 화가들이 겪지 않았던 고통을 윤형근은 모두 겪었다.
그리하여 그런 현실의 울분을 쏟아버린 듯 검은 기둥의 그림은 마침내 윤형근 작가의 심볼로 브랜드화 되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작품은 더 단순해지고 명료해지는데 번짐도, 색채의 변주도 없는 간결함과 거대한 검은색이 화폭을 메울 뿐이었다. 이 시기의 작업을 하나 같이 “고독과 죽음에 대한 통찰의 결과물”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작가의 고백은 그러한 심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들 죽었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조셉 러브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있고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2004년 5월 8일의 일기에서).
 침묵의 회화, 화가로 불리던 윤형근은 사실 현실의 모순에 가장 저항한 모더니스트 저항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색채도 형태도 작업 과정 간결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 절대적인 강렬함과 매력이 있다. 윤형근은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기둥으로 저항을 품은 작품들을 통해 절제된 감정이 현대미술의 색채와 조형 언어로 풀어내는 데에 성공했으며 이것이 윤형근의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업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1991년 미국 미니멀리즘의 최고 작가 도널드 저드와의 만남도 간과할 수 없다. 국내 개인전 차 한국을 방문한 저드는 눈여겨보던 윤형근의 화실을 찾아 그림 세 점을 샀고 미국 뉴욕과 텍사스 중 마르파의 치나티 파운데이션을 통해 윤형근의 개인전을 주선했다.
도널드 저드와 만남 이후 윤형근은 더욱 확신을 갖고 자신의 조형 세계를 펼쳐 나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욱 단순하며 작품들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단색의 형상이 축약 단순화되면서 명료해져 갔다. 
기존의 번짐과 검은 기둥 시리즈보다는 후기로 갈수록 크고 대작 위주의 회화 작품에 몰입했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의 시기 작품은 순수 먹빛에 가까운 물감과 색과 뛰어난 비례를 통해 작가가 추구해온 현실에 대한 초월, 그 순수함을 표현함으로써 서양 미니멀리즘을 포함하는 세계와 또 윤형근만의 독창성을 보여주었다.이 검은 기둥의 작품을 보며 국내외 주요 평론가들은 아주 중요한 미술사적 평가를 남기고 있다. 일본의 유명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 (中原佑介)는  “검은색 기둥은 침묵의 회화“라고 하였으며 말을 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 말의 안으로 확산시키는 힘이 존재한다고 하였고, 미국 평론가 조셉 러브는 ”윤형근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림을 보는 이가 눈을 뗀 다음에도 파고드는 강한 현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윤형근의 그림에서 한국 시골의 흙냄새가 연상된다고도 하였다. 조셉 러브(Joseph Love) 는 그의 회화는 약삭빠르고 퇴폐적인 것을 거부하는 그의 천성에 기인한 회화라고 하였으며 인간이나 혹은 예술에서나 이런 유형의 참신함은 계속 권장되어야 할 자세”라고 하였다. 
또한, 이우환은 ”윤형근의 중성화된 손의 힘이 캔버스와 매개되어 새로운 시각적인 장면을 창조하였다고 하였으며 철저한 자기 수련이 반영된 결과“라고 논하였다.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윤형근은 정말로 성실하고, 정말로 겸손하게, 예술가의 삶의 태도가 그 사람의 고유함과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온 새로운 저항의 화가로 평가 기억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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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윤형근의 기록, 윤형근, 박경미 외 기록, PKM북스, 2021
2)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 Yun Hyong-keun』, 2018, 국립현대미술관.
3) 양성희, 「모노크롬 운동 선도 윤형근 展」, 『문화일보』, 1999. 3. 26.
4) 윤형근의 기록, 윤형근, 박경미 외 기록, PKM북스, 2021
5) 김기현, 윤형근, 단색(單色) 회화, 단색(丹色) 비평 충북. 2023
6) 김용익. 윤형근에 대하여(1, 2,3,4,5,6,7). 2022.11월28일 . Profyongik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