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박물관학(Museology)을 공부한답시고 한참 박물관 관련 법령에 매몰된 적이 있다. 법에 명시된 것이 박물관의 전부인 양 죄다 외우려 덤벼들었고, 칡뿌리 캐들어가듯 연혁 법령과 조례 등을 파고들어 제·개정의 근거를 들춰내고자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연계 법령을 찾아 정리하고 중요한 것들은 별도 파일로 정리해 두기도 했다. 그게 박물관의 전부라도 된 듯 알량한 지식을 팔아가며 학생들까지 가르쳤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박물관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게 된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제주 아프리카박물관 한종훈 관장님의 안내로 한라산 중산간에서 본 ‘물(水)·바람(風)·돌(石)박물관’에 의해서다. 유동룡(이타미 준)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먼저 물박물관은, 전체적으로는 육면체인 노출콘크리트 건축물에 둥그렇게 뚫린 천장, 녹슨 철판 사각 수조 그리고 입구에 붙은 ‘Water Museum’이라는 명패가 전부였다.



유동룡 일본건축사무소에서(2002)


유동룡미술관 유이화 관장


그 멀지 않은 곳에 맛배 지붕을 한 작은 건물이 ‘Wind Museum’이다. 10여 cm 너비의 목재 판재들을 2cm 정도 일정한 간격으로 떼 수직으로 세우고 지붕 역시 그렇게 지은 아주 단출하지만, 건축가의 손길이 묻어 있는 각 잡힌 집이다. 집의 높이와 폭은 5m가 될까 말까 했으며, 길이는 20여m쯤 되었던 거로 기억된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세상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구조로 인식했다. 이는 불교의 만다라(Mandala)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도형이다. 서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 보편적인 도식에서 하늘을 원형으로 보았던 것은 밤하늘의 천체가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에서며 땅은 네 방위를 기초로 위치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유동룡은 설화 같은 천지의 형태와 원리를 ‘Water Museum’에 기가 막히게 담아냈던 것이다. 대개는 큰 나무에 작은 나무의 가지를 가져와서 하는 접붙이기(接木)를 역으로 해낸 것이다.

원형 천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단 한순간도 같은 형상이 아니며, 이를 통과해 방형 수조 물속으로 흡수된 피사체 역시 시시각각 각기 다른 장면을 연출한다. 이에 더해 물속에 깔아 놓은 자갈돌들의 검은색은 철 성분을 최소화해 만든 진열장의 유리처럼 사물을 더욱더 선명하게 했다. 바람이 불면 물결로 인해 대상은 달리(Salvador DALÍ)의 작품처럼 왜곡되고, 해 질 무렵에는 자갈마저 갈옷 색으로 물들게 한다. 춘하추동 계절은 물론 비와 눈이 내리는 작은 변화도 유동룡의 물거울은 블랙박스처럼 정확히 포착해 냄은 물론이다.

이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건축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사이에 드러나는 세계. 즉,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이다.”라고 했던 유동룡의 건축 미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Wind Museum’ 역시 같은 문법이다. 정연한 목재 사이를 관통하는 바람은 단 한시도 같은 소리가 아니다. 다른 것은 ‘Water Museum’이 시각이라면 ‘Wind Museum’은 청각이다. 둘 다 무형(無形)과 무소유를 유물화해 낸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인류의 오랜 신화적 담론을 기저로 그의 작품에 광대한 생장소멸의 우주관을 담아내려 했다. 휴관 없는 이 박물관들은 찰나의 시공간을 기획전으로 엮어 매 순간순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선견과 심오한 서사적 개념이 유동룡의 박물관론이다. 당시, 필자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법은 2009년에야 무형의 자료를 박물관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유동룡의 박물관관(觀)과 비교할 때 소유라는 유물론적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편협한 개념이다.

이렇듯 ‘물(水)·바람(風)·돌(石)박물관’ 등을 통해 제주도와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바람의 건축가’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유동룡은 그림, 음악, 시에도 능한 건축 철학가이다.



Water Museum


유동룡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80-90년대 우리나라와 일본은 빠른 시대의 흐름을 타고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를 마주하던 유동룡은 건축을 비롯해 시대성이 결여된 것들에 고민하며 건축을 통해 사람들의 온기와 원시성을 담고자 했다. 이때는 그가 비움과 관계를 중시하며 무위자연의 사상을 습합하려 했던 모노하 예술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던 시기이다. 이미 물성과 본질에 집중하고 있던 유동룡은 결핍된 균형에 돌, 흙과 같은 원초적인 재료로 회복의 메시지를 이식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물이 ‘구정미술관(현 구정아트센터)’과 ‘각인의 탑’, ‘M빌딩’ 등을 비롯해 앞서 언급한 박물관들이다. 특히, 국내에 처음 선보인 ‘구정미술관’(준공: 1982)은 유동룡을 선택한 온양민속박물관의 설립자 구정 김원대(1921-2000) 선생의 높은 안목으로 인해 그를 우리나라에 알리게 한 계기가 된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는 건축”을 지향하는 그의 딸, 건축가 유이화는 아버지의 유업을 잇고자 미술관을 설계하고 문을 열었다. 유동룡이 떠난 지 10년 만에 제주도 저지예술마을에 둥지를 튼 ‘유동룡미술관’(개관: 2022.12)이다. 결코, 무위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유동룡의 심오한 건축관과 박물관관을 딸 유이화를 통해 발현하며 생장소멸의 우주관으로 그가 지금도 숨 쉬고 있음을 미술관은 보여주고 있다.




- 유동룡(庾東龍, 1935-2011. 이타미 준) 재일한국인 건축가, 무사시공업대학 건축학 학사. 제주영어교육도시 건축 총괄 책임자, 일본 민예관 운영 위원, ITAMI JUN ARCHITECTS CO. LTD설립, 이타미 준 건축설계연구소 설립. 무라노도고상·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아시아 문화 환경상·김수근 문화상·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한국건축가협회 작품상 수상. 미술품 컬렉터. 『이조 민화』,『이조의 건축』, 『조선의 건축과 문화』, 『한국의 공간』 등 저술.

- 유이화(庾梨花, 1974- ) 건축사, 미국 프랫 건축과 학사, ITM건축연구소와 ITM유이화건축사사무소 대표, 아버지 유동룡의 파트너로 활동. 한국건축가협회상 BEST 7·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 건축물 부문 본상·IF 디자인 어워드 건축 부문 본상·German Design Award 2019 등 수상. 아버지와 함께한 작품 외에도 와인타임 사옥, 발트하우스, 이노이즈 사옥, 아주 좋은 꿈터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