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흥 관장 ⓒ 촬영 최동호, 제공 김남흥
“금요일이 되면 제 에너지는 전부 소진되고 맙니다. 밥 먹을 힘도, 씻을 기력도 없습니다. 경기가 최악인 데다, 빚까지 늘어 틈틈이 외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외줄타기 인생이지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김남흥의 목소리에는 바짝 마른 고단함이 먼지처럼 묻어 있었다.
1966년생인 김남흥 관장은 서른네 살이던 2000년에 용지를 매입해 미술관 건립을 시작했다. 벌써 24년째 진행 중이다. 그가 미술관을 생각하게 된 직간접적인 동기는 몇 가지가 된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것과 서귀포에서 태어나 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제주도를 떠나 본 적이 없는 토박이임에도 제주를 잘 모른다는 자책감에서다. 대학에 와서야 이를 깨닫고 제주를 알기 위해 향토자료실을 찾아다니며 향토사와 역사 공부에 진력했다. 그러나 자료를 볼수록 활자 뒷면에 숨어있는 그 뭔가는 초점이 맞지 않은 난시처럼, 아른거릴 뿐 또렷이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관련 자료를 닥치는 대로 복사해 일일이 대조했고,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원주민들도 인터뷰했다.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천수와 방사탑 같은 제주 특유의 자연과 신화성이 강한 향토유산이었다. 마을 단위에서 부정과 악의 출입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방사탑(防邪塔)은 민간신앙적 특성이 강할뿐더러 제주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체 중 하나다.

김남흥 관장 작품(2014)
다음으로 용천수(湧泉水)다. 화산섬 제주는 현무암으로 인해 수분이 쉽게 빠져나가고 마는 특성상 물을 가둘 시설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장치가 용천수다. 방사탑이 신앙적인 정신의 사유물이라면 용천수는 생명의 기초가 되는 실용적 유산인 것이다. 이 모두가 제주성과 향토성이 강할 뿐 아니라 돌과 삶, 자연과 인간, 하늘과 땅, 섬과 바다, 정신과 물질 같은 관계성에서도 그 영역이 심오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둘 다 특유의 조형미까지 더해 미술을 전공한 김남흥에게는 큰 매력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제주의 풍광을 화폭에 담으며 작가를 업으로 삼고자 했던 목표는 손에 잡혀가는 듯했다. 그러자 또 다른 욕망이 백록담의 운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미술관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주성을 중심으로 한 포용적인 사고와 안목이 지금의 미술관을 있게 했다고 김남흥은 말한다.
돌하르방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제주의 대표 상징물이다. 돌하르방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향토사학자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이 지은
『탐라기년(耽羅紀年)』(1918)에 ‘갑술 30년(청 건륭 19년)에 제주 목사(牧使) 김몽규(金夢奎)가 옹중석(翁仲石)을 성문 밖에 세웠다.(甲戌三十年 淸乾隆十九年 牧使金夢奎設翁仲石於城門外)’는 기록이 전해진다. 옹중석은 중국 진시황 때 나온다. 진나라가 흉노의 침입을 막고자 만리장성을 쌓을 때 완옹중(阮翁仲)은 매우 용맹하여 흉노족을 벌벌 떨게 했다. 그가 죽자 진시황은 그의 동상을 성문 앞에 세우게 한다. 이를 본 흉노는 완옹중이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도망갔고, 이후 성문 앞에는 수호상으로 옹중석을 세웠다고 한다. 제주의 옹중석은 돌하르방인 셈이다.

돌집을 짓고 있는 김남흥 관장(2019)
“미술관을 기획하면서 제주성을 탐구하지 않았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조각공원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척박한 제주의 향토성과 선인들의 삶을 쫓다 보니 막다른 골목에서 돌하르방을 만나게 되었지요. 돌하르방은 본질의 이해 정도에 따라 의미 또한 달라집니다.” 김남흥은 돌하르방을 재해석해 ‘평화’의 가치를 담고 있다. 진나라의 옹중석과 제주의 하르방이 무언가를 막는 대유물이라면 김남흥에게 하르방은 이를 승화한 공생의 메신저다.
제주 조천읍에 사유지 10,000㎡(3,000평)을 구입하고 마을 땅 6,600㎡(2,000평)을 임대하여 북촌돌하르방공원을 조성했다. 그동안 돌하르방 120여 점과 동자석과 방사탑 등 100여 점을 제작했다. 중간에 커다란 시련도 있었다. 2013년에 대형화재로 160㎡(200평)짜리 미술관 건물이 전소되면서 김 관장의 작품을 비롯해 700여 점의 소장품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것이 제주 돌집을 짓게 된 계기다. 지금까지 총 13채의 집을 지었다. 미술관 내에 5채, 미술관 인접한 곳의 2채는 김 관장의 연구실과 화실로 사용하고 있다. 나머지 6채는 돈벌이를 위해 지어 줬다.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은 급감했습니다. 코로나가 풀리자 해외여행이 활성화되었고, 자유를 갈망하는 감정적 수효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미술관을 운영해야 할지 암담합니다. 적자분을 외부 일에서 메꿔야 할 형편입니다. 집 짓는 것은 1년 정도 걸리는 더딘 일입니다만, 건축을 알아가다 보니 보람도 큽니다. 무엇보다도 현무암 한 장 한 장을 쌓아가다 보면 하심(下心)이 생기고 성찰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김 관장의 허기진 합리화다.
돌하르방미술관은 방문객 중 15-20%가 외국인이다. 관람객 중 재방문율도 높은 편이다. 제주의 정체성을 잘 발현한 까닭이다. 여기에다 건축가로도 변신한 김 관장의 작품이, 늘 새롭게 선보이는 변화가 매력을 더해준다. 김 관장은 몇 가지 꿈이 있다. 미술관이 지역민이 공유하는 문화 센터가 되었으면 한다. 또 예술학교를 열어 문화향유의 갈증을 해소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취학 아동이나 학생,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연 4-5회 문화탐방과 1일 미술학교를 우선 시작했다. 간단한 만들기나 그리기를 통해, 예술이 소질 있는 사람이나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영역임을 느끼게 하여 삶의 가치를 새로이 한다는 점에서 반응은 좋은 편이다.
20여 년 전부터 필자가 봐 온 김남흥 관장은 짙은 피부에 다부진 체구, 표정이 쉽게 변화하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다. 이번 여름 제주를 찾았을 때 김 관장은 더 검어진 얼굴에 더 묵직하게 변해 있었다. 그를 본 순간 문득, 살아있는 돌하르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장신구박물관 이강원 관장을 보면서 느꼈던 ‘관장은 소장품을 닮아 간다.’는 나름의 생각이 소환되었다. 얼마 전 그는 아내에게, “참 힘든 시기인데, 이 어려움에도 이런 재주라도 있어 얼마나 감사한가. 두 아들과 함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 또한, 얼마나 의미 있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같은 학교 연극동아리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아내는 굳은살 박인 남편의 손을 슬며시 잡아주었다고 한다.
미술관에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나 돌집이 있냐고 필자가 묻자, “애정 없습니다. 그저 양심껏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미술관을 나서자 태양은 배웅하던 그를 광배처럼 감쌌고 그런 김남흥은 옹중석 같았다.
- 김남흥(金南興, 1966- ) 제주 출생, 제주대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 학사, 작가 겸 건축가, 북촌돌하르방미술관 관장, 대한민국 미술대전·제주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제주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개인전 6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