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미술사의 기본 얼개 세우기


김영호 / 미술사가, 중앙대 명예교수


I. 제주도립미술관이 기획한 <에콜 드 제주>전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제주도와 인연을 맺고 활동했던 도내 외 작가 44인의 작품 67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한국전쟁에서 국토재건과 경제도약의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번 전시는 출품작들을 학파 혹은 집단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그 계보를 제주 미술사의 관점에서 정리하기 위한 의욕적인 기획전이라 할 수 있다. 

제주 미술사의 관점이란 제주라는 그물망으로 걸러내는 태도(Perspective)를 말한다. 제주라는 환경적 조건에 근거해 제주미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탄생시킨 환경의 산물이라는 프랑스 역사가 텐느(Hipolite Taine)의 실증주의적 이론은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제주미술의 역사를 제주의 특수한 환경, 즉 시대적⋅지리적⋅문화적 환경 등을 바탕으로 진단해 본다면 흥미로운 개념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무속’, ‘유배’, ‘이산’, ‘난민’, ‘토착’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제주미술의 보편적 특수성을 규정하기 위한 용어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참고: 김영호, 「제주 미술사 어떻게 쓸것인가」, 제주촌제주인, 2005)

      
II. 제주도립미술관에 따르면, <에콜 드 제주>전의 기획 의도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프랑스의 <에콜 드 파리> 사례를 차용하면서 전쟁기에 제주도로 내려와 한동안 거주했던 이방인 미술가 집단을 소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파’ 혹은 ‘학교’의 뜻을 지닌 프랑스어 에콜(école)의 의미를 살려 이방인 화가들과 일본 유학파 화가들의 영향 속에서 전개되어 온 사립 및 공립 아카데미 미술의 전개 양상에 대해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카데미 미술의 확산을 위한 변곡점은 1972년 제주대학교의 미술교육과 설치를 전후한 시기가 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에콜 드 파리>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부터 제2차 세계대전(1939-1945)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방인 예술가 집단을 가리킨다. (넓게는 20세기 초부터 1950년대 사이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외국인 예술가 집단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 파리는 근대미술(Modern Art)의 용광로 역할을 하며 세계 각국의 청년들에게 예술의 성지와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에콜 드 파리> 작가들은 인상주의 이후 야수파, 입체파, 추상미술에 이르는 모더니즘 미술의 다양한 경향들을 태동시켰다. 그 여파는 1950년대의 한국에도 밀려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많은 작가들이 파리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1954년에 도착한 남관을 서두로 손동진, 김흥수, 박영선, 김환기, 함대정, 이성자, 이응로, 이세득, 변종하, 권옥연, 등이 도불 1세대 작가에 속한다.(참고 : 김영호, 「한국-프랑스 미술교류사: 문화수용 과정의 문제와 대안」, 프랑스문화연구 제16집, 한국프랑스문화학회, 2008)

한국전쟁 당시의 제주는 파리와 사뭇 달랐다. 국경의 장벽이 없는 파리의 개방된 열기와는 달리 절해고도 제주는 전쟁의 포성이 닿지 않는 육신의 피난처였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가족과 헤어져 단신으로 도착한 제주가 그들에게 제공한 것은 지친 몸을 품어줄 자연의 손길이었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남국의 풍경은 현세를 넘어선 이상의 세계로 다가왔다. 파리가 예향(藝鄕)으로 예술가들의 창작 의지를 자극하는 현실의 세계였다면 제주는 본향(本鄕)으로 열린 피안의 세계였다. 피난민 혹은 군인⋅군무원, 경찰 신분으로 입도한 이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고독과 불안 심리는 점차 대자연에 대한 순응과 예찬으로 전치되고 작품으로 표상되었다. 일출로 장관을 이루는 성산포 일대와 더불어 한라산 남단에 자리 잡은 서귀포가 피난민 화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참고: 김영호, 한국 근대미술 속의 서귀포, 서귀포에 뜬 큰 별들, 2015) 

비교는 차이를 낳는다. 파리가 세계미술로 열린 창이었다면 제주는 상처 입은 영혼을 보호할 닫힌 창이었다. 그리고 제주를 찾은 화가들은 제주의 내면에서 새로운 자연과 생명 그리고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새기며 이후 자신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장리석의 <남국의 봄>, 최영림의 <신화> 시리즈, 이중섭의 <나무와 달과 하얀 새> 등은 그 사례로 다가온다.) 


III. <에콜 드 제주>전에 소개되는 작가군은 크게 세 개의 그룹으로 정리될 수 있다. 전시장의 관람 동선을 따라 1. 한국전쟁과 제주미술, 2. 아카데미와 제주미술 그리고 3. 제주미술의 성취들이라는 제명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전시장 중앙에 가설물로 재현해 놓은 ‘산호다방’은 관람객들의 쉼터를 겸하는 공간으로 다방문화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로 연출되어 흥미롭다.

이번 전시의 [첫 번째 그룹]인 ‘한국전쟁과 제주미술’은 다시 두 개의 소집단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1950년 전쟁기에 난민과 종군 화가, 군인, 경찰 등의 신분으로 제주에 내려와 활동했던 이방인 작가들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귀향한 제주 작가들이다. 이방인 작가들은 장리석을 비롯해 이중섭, 최영림, 홍종명, 김창열, 이대원, 최덕휴 등이 있으며, 일본에서 유학한 제주 작가들은 고성진, 조영호, 장희옥, 박태준 등이다. 한편 제주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강용택의 경우도 별도의 눈길을 끈다.

‘한국전쟁과 제주미술’은 전쟁과 일제라는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 낸 난민 미술과 이산(디아스포라) 미술이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 할 것을 요구한다.   
 
우선, 이산 미술이란 일제 강점기에 제주를 떠나 일본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미술이며 단순 유학과는 다른 차원의 해석과 의미가 요구되는 영역이다. 서로 떨어져서 헤어지게 된 개인적 혹은 사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작품의 성취도 같을 수 없다. 위에 언급한 고성진, 조영호, 장희옥, 박태준 외에도 미술계에 잘 알려진 송영옥, 양인옥, 원용식, 김광추, 변시지 등이 있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농업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나 한국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이석주도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다. 이산 미술인들의 범주를 좀 더 확대하면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대에 중국이나 러시아로 이주한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향후 조사 연구가 필요한 이들은 제국시대 일본이 앞서 받아드린 서구 근대화의 열기와 식민시대를 살았던 한국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 사이에서 독자적인 미술 노정을 걸었던 인물들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난민 미술은 한국전쟁 당시에 제주를 찾아 입도한 이방인 집단에 속한 미술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장리석, 이중섭, 최영림, 홍종명, 김창열, 이대원, 최덕휴 등은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근대미술의 경향을 제주에 소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홍종명은 오현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시내에 화실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가 배출한 제자들은 후에 서울대학과 홍익대학 등에 진학해 중앙화단으로의 진출에 물꼬를 터놓았다. 장리석은 종군 화가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내려왔으나 내부 사정으로 군속의 울타리를 떠나 난민 신분으로 살아가며 화가로서 제주 풍경과 해녀를 주제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경우다. 장리석과 동갑이며 평양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이중섭 역시 제주의 바다와 해변 풍경에 가족을 등장시켜 하나의 전형적 이미지를 세우는데 성공을 거둔 사례다. 서귀포에 머물렀던 1년 남짓 동안 그린 그림의 일부가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에 소장되어 지금도 제주를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한국전쟁과 제주미술’은 화단의 형성기라는 관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3년 휴전 소식이 알려지고 난민 작가들이 육지로 새로운 이동을 준비할 무렵 제주 미술계는 제주 출신의 일본 유학파 작가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직화 되기 시작했다. 1955년 2월 제주미공보원에서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되며 제도적 정비의 단계를 밟게 된 것이다. 초대 회장에는 김인지가 추대되었고 부회장에 홍정표와 홍완표, 상임위원에는 일본에서 귀국한 조영호, 장희옥, 박태준  등이 선출되었다. 김인지는 서귀포에서 태어나 대정보통학교와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공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면서 교직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일본의 동경사범학교 부속 동광회 도화강습과를 수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의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서 1935년부터 3차례 입선하면서 제주 최초의 서양화가, 제주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소개된다. (그는 교육자로서 도내의 초등학교 교사와 고등학교에 강사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제주KBS 방송 총국장과 제주시장을 지내며 지역사회에 헌신했다.)
5월에 개최된 제주도미술협회 창립전에는 서양화, 유화, 콘테화, 서예, 공예 등 105점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제주신보>에 따르면 5일간 7,000명이 관람한 것으로 보도(1055년 5월 21일자)되고 있다. 이후 7월에는 학도미술전, 8월에는 제1회 미술강습회, 10월에는 제주시제 경축 미술전 등을 개최하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제주도미술협회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휴안 상태’에 접어들기도 했으나 도내에서 단체 차원의 협회전과 학생미술전 그리고 공모전 등을 개최하며 제주의 미술문화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IV. <에콜 드 제주>전의 [두 번째 그룹]으로 분류되는 ‘아카데미와 제주미술’은 앞서 언급한 첫 번째 그룹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도내의 중등학교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후진들을 양성했던 작가들과,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가 신설되면서 교수로 초빙되어 전문교육을 실시했던 작가들이다. 우선 ‘미술교사, 제주미술을 이끌다’라는 제명의 안내문 아래 소개되는 첫 번째 집단의 전시실은 1960년대 이후 미술 관련 교육활동에 헌신했던 미술인들이 망라되어 있다. 당시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개인 화실을 운영하며 후진을 양성했던 양창보, 강태석, 김원민, 김택화, 강영호, 고영우, 조석춘, 천병근, 고영만 등이 소개되고 있다. (고영만은 39년간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미술 교사로 봉직했던 교육자이자 화가로 제주도립미술관 2층에서 회고전이 별도로 개최되고 있다.) 이들은 이방인 작가들과 도내 선배 미술인들의 영향을 받아 육지에서 정규교육과정을 밟거나 교사 자격 취득을 위한 단기과정을 받고 돌아와 활동하면서 1960년대 이후 제주미술 아카데미의 얼개를 세워 나갔다. 개인적인 이유로 제주에 입도해 오현중⋅고등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생들에게 작가로서의 삶과 예술적 노정에 귀감을 보였던 강광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아카데미와 제주미술’ 그룹의 두 번째 집단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 미술교육의 시작과 학원미술의 재건’이라는 제목의 안내문으로 소개되는 집단이다. 1972년 제주대학교는 교육부로부터 미술교육과 신설 인가를 받아 이듬해인 1973년 국공립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술교육과가 창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에서는 공교육을 통한 미술인 양성이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미술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제주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활동했던 문기선, 양창보 외에도 변시지, 허민자, 부현일, 강길원 등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양창보는 제주여자고등학교와 오현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4년 제주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주화단은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의 설치로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재학생의 작품을 선보이는 제대미전을 연례적으로 개최하고 1979년 부터는 전도중고등학교 미술실기대회 등의 공모전을 통한 지역의 미술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도내 고등학교 미술반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미술전시회도 학원미술의 재건 시기의 괄목할 만한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V. <에콜 드 제주>전의 [세 번째 그룹]은 제주에서 태어나 예술가로서 제주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자신의 화업에 독자적 성취를 거둔 70세 전후의 중견⋅원로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미술의 성취들’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세 번째 그룹 역시 두 개의 집단으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도내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지역 화단을 지켜온 이들이며,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귀향하거나 현지에서 활동해 온 작가들이다. 이들 세 번째 그룹에는 이미 작고했거나 예술가로서 활동을 중단한 작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을 미술사적 맥락에서 되돌아 소개하려는 기획 의도가 엿보인다.  

우선 ‘국립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 신설’이라는 제명의 안내문으로 소개되는 도내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들은 강동언, 김병화, 고영석, 백광익, 오석훈, 김순관, 김창해, 박유승, 박조유, 고재만 등이 있다. 한편 ‘제주 바다를 건넌 작가들’이라는 제명의 안내문 아래 소개되는 작가들은 김영철, 김종석, 강요배, 고영훈, 이성만 등이다. 이들을 굳이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는 이유를 해명하자면 이번 전시 제목이 <에콜 드 제주>로 아카데미에 초점을 둔 전시이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모호한 편 가르기의 저변에 스며있는 불편한 진실이 제주미술의 발전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이 그룹에 속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활동 반경이 제주를 넘어서 있다. 이번 전시에 제시된 작품을 보더라도 두 집단 사이에 표현의 주제나 형식도 구분되어야 할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예술가에 있어 유년기를 포함한 청소년기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인성으로 체화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작품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출신대학이나 출신지를 은밀히 내세워 불온한 무리를 이루려는 생각은 환태평양으로 열린 제주미술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버려야 한다.
           

VI. 마지막으로 <에콜 드 제주>전의 전시장 중앙에 설치된 다방 공간은 기억의 소환 장소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다방 전성기’라는 제명의 안내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은 1970년대에 미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며 인기를 끌었던 ‘산호다방’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휴식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일부 관람객들에게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허락하며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국적인 커피향에 실려온 다방문화의 붐은 비단 제주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명동에 개업한 다방은 갤러리 문화가 정착되기 전에 미술가들의 전시와 토론 그리고 사교의 공간으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한국전쟁 시기에 제주를 찾은 피난민들의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절반을 넘는 15만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는 문인을 포함해 미술인, 음악인, 연극영화 분야의 당대를 대표했던 문화 예술인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정부의 고위 관리나 부유층 가족들이 포함된 피난민들은 칠성로 일대에 모여들어 전쟁 속에서도 활기 넘치는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는 언론의 보도는 당시의 상황을 헤아리게 해 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탄생했던 다다(Dada) 처럼 제주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뒤섞인 열기로 요동치고 있었다. 길고 짧은 기간 동안 이들은 칠성통에 자리잡은 칠성다방(1942)을 비롯해 새로 개업한 동백다방(1951), 남궁다방(1953), 오아시스다방(1954), 청탑다방(1959)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세태를 정보와 뉴스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다방문화를 일으켰다. 1950년대에 주목되는 개인전으로는 1954년 강태석, 1954년 조영호, 1955년 구대일 파스텔화전, 1956년 김창해전, 1957년 고영만 김택화 2인전 등이 조사되고 있다. 동백다방에서 작품을 소개한 작가들을 보면 홍정표, 현중화, 장희옥, 박태준, 한명섭, 김택화, 김병화, 김형찬 등이 알려져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탑다방, 무지개다방, 호수다방, 산호다방, 요안다방, 대호다방 등이 다양한 행사들을 소화해 냈다. 특히 대호다방은 ‘관점 동인’ 창립전이 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소라다방이 문을 열어 산호다방, 대호다방과 더불어 다방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민들이 떠나기 시작하면서 제주의 미술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제주의 예술을 살리는 일이었다. 이러한 자각은 위에 언급한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전시를 위한 전문공간으로서 미술관이 건립되기 시작하는데 1970년대에 개관한 미술관으로서 동인미술관, 세종미술관, 신천지미술관, 기당미술관 등이 시대에 부응하며 문을 연 공간들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지방문화 진흥 정책에 따라 건립된 제주문화예술회관이 전시장과 함께 공립미술관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VII. 이상에서 보듯 제주 근대미술의 노정은 전쟁과 이산의 시기를 거치며 특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제주로 피난 내려온 이방인 미술인들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귀향한 제주 미술인들이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제주의 근현대미술사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배경으로 배태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며 성장했다. 시대를 관통했던 미술인들은 공립과 사립 아카데미를 통해 후진을 양성했고 서울과 제주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며 섬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우리는 이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을 예술 작품을 통해서 만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주인들의 독자적 성취를 육지와 대양으로 되돌려 퍼트리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에콜 드 제주>전은 제주 미술사의 기본 얼개를 세우기 위한 기획전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이 의욕적인 전시회가 제주미술의 계보를 다지는 사업으로 계속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제주 미술사의 관점을 무속, 유배, 이산(디아스포라), 난민, 토착 등의 비평적 개념으로 정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권한다. 이번 <에콜 드 제주>전의 범주를 넘어서 있고 따라서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무속’과 ‘유배’ 미술은 제주 미술사의 정립을 위해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201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