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의 밤: 노동자의 꿈 아카이브』(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1. 이하 『프밤』)는 랑시에르가 1981년에 쓴 국가박사학위논문으로 프롤레타리아가 한 사회의 일원으로써 어떻게 ‘평등’을 향한 투쟁에 참여했는지를 1830-1850년대 프랑스 노동자들의 저널과 일기, 편지들 속에서 찾아낸다. 그가 이들의 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사유’를 찾아내고자 시도한 것은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강조해온 경제적·물질적 토대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응하는 성격을 띤다. 이는 유물론적 계급투쟁의 결과로 얻어진 소비에트의 부패와 독재를 목도했기 때문이며, 그동안의 낡은 평등주의로는 공동체가 도달하고자 하는 ‘평등’은커녕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유토피아의 전적인 상실을 의미하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향후 랑시에르의 핵심 사상으로 정초하는 ‘감성의 분할’ 혹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작동한다. 그에 의하면 대장장이로 하여금 계속하여 모루를 쥐게 하고 그 밖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이미지에는 모종의 계획, 즉 플라톤 이래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위계질서가 숨어있다. 그들의 질서체계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과 관계없는 다른 사유나 말, 즉 다른 감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프밤』은 노동과 사유를 오가는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아카이브로 플라톤적 질서에 의해 사유라는 감각에서 배제된 프롤레타리아들이 자신들의 감성의 영역을 회복 혹은 확장하고자 분투했던 기록의 발견이자 축적이다. “이 책의 주제는 우선, 노동과 휴식의 정상적 연쇄에서 떨어져 나온 이 밤들의 역사다.”(10) 프롤레타리아의 사유가 이루어지는 밤은 일상 경험의 완만한 축적에서보다는 현실 세계의 외양이 동요하는 순간들로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판단 가능성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이미 차려진 저녁상을 받는 사제들에게나 잘 어울릴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논하는 것이 저녁 끼니가 달린 노동을 찾아 아침에 나서는 이들에게 훨씬 더 본질적인 이유다.”(40-41)
이러한 이유로 랑시에르는 경제적·물질적 토대 대신 프롤레타리아의 ‘사유’라는 감각적인 것에 주목하고 이의 재분할을 시도한다. 그에게 혁명은 물질이 아닌 ‘감각적인 것’의 영역을 재배치함으로써 완성된다. 지배자에 의해 분할된 우리 사회의 감각적인 것의 영역을 재분할하지 않으면 ‘평등’한 세상의 성취는 불가능하다. ‘감각적인 것’의 영역은 다른 무엇보다 ‘말’과 ‘글’의 지위에 따라 분할된다. 따라서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은 기존의 질서에서 배제된 자들의 ‘말’과 ‘글’, 즉 그들의 사유를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가운데 형성된 새로운 질서다. 『프밤』이 단순한 프롤레타리아들의 문학탐구서나 사회문화사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평등’으로 대체하려는 공동체 이상으로 채워진 전복의 담론서다.
프롤레타리아의 말과 글의 지위를 회복하고자하는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사유뿐 아니라 인민의 명예롭게 노동하는 낮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의 담론을 함께 다룬다. “고귀한 정념들의 비밀을 배우고자 하는 주변적 노동자들과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돌보고자 하는 주변적 지식인들 사이에 생긴 미증유의 마주침,”(42-43) 즉 지식인들의 밤에 사로잡힌 프롤레타리아들의 담론이 인민의 명예롭게 노동하는 낮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의 담론과 변증법적으로 마주칠 때 힘이 발생하고, 이 힘이 평등한 공동체를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의 힘만으로 ‘평등’한 세상이 오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많은 다른 존재들의 합력으로 그 세상은 온다.
이러한 이유로 랑시에르는 지식인의 세계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자기의 이익에만 반응하면서 사랑하고 고통 받고 위험을 감당하고 헌신하는 자의 정념을 겪어보지 못한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미지의 것을 찾아 탈주하는 이들로 창안자, 시인, 인민과 공화국을 사랑하는 자, 미래 공동체들의 조직자와 새로운 종교의 사도들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전자와 대립할지언정, 미지의 것을 찾아 탈주하는 모든 자들과 교류한다. 이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명분을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평등’이 편만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전념과 욕망을 견지하기 위함이다.
사유로부터 배제된 자로서 ‘타자’인 프롤레타리아는 외부의 다른 존재와 협력하는 과정에서 연대에 필요한 난관과 고통과 함께 내면적인 고통을 감내해야한다. 감각적인 것의 분할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사유에서 고통은 감각적인 자리를 빼앗겼다는 분노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착취 가운데 있으면서 착취와는 다른 것, 즉 노동과 사유가 하나의 무대 위에 양립할 수 있다는 자아인식에 이르는 동안 부딪히는 고독과 불안에서 발생한다. 이는 낮의 노동의 고통을 뛰어넘는다. 비록 어느 한 측면일지라도 공동체에 ‘평등’이 어떻게 정치(定置)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이러한 고통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공동체의 ‘평등’을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돌보고자 하는 주변적 지식인들과 공모하여 지배질서에 의해 규정된 낡은 신화에 저항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자들의 밤,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의 언어, 아첨이 필요 없을 만큼 잘난 자들의 이미지를 전유해내고자 하는 이 모험에서 직조공과 제화공과 목수와 대장장이가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신들의 말할 권리에 대해, 하나를 희생시켜야 다른 하나가 인정되는 분리 논리에 의해 이끌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해, 동시에 묻는 무대가 펼쳐지도록 하는 내기. 착취로부터 계급의 발화로, 노동자 정체성으로부터 집단적 표현으로 곧장 뻗은 길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이러한 우회를 거쳐야만 한다.'(45)
『프밤』은 낮의 노동과 밤의 사유를 오갔던 1830-1850년대 프랑스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을 이끌었던 부르주와 지식인들의 광기를 제1부 가죽작업복을 입은 사람, 2부 부서진 대패, 3부 기독교도 헤라클레스 등 총 3부, 12장에 걸쳐 묘사한다. 랑시에르가 개인들의 유용한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미학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분리하는 오랜 장벽을 무너뜨리는, 진정으로 급진적인 행동을 수행했던 사람들이라고 인정한 ‘사유’하는 프롤레타리아-시인 고니, 화가가 되고 싶었던 철물공 질랑, 예술가로 인정받고자 부르주와와 결합하는 측량기 제조업자 뱅사르, 노동자의 자력에 따른 개인적 상승과 피억압 프롤레타리아의 구출을 동시에 추구하였던 기계공 클로드 다비드 같은 이들의 흥분과 좌절과 환희로 점철된 사유하는 밤의 기록들, 새로운 공동체 이상을 좇아 노동자들을 이끌고 뉴올리언스로 향했던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에티엔 카베의 수차례에 걸친 도전과 좌절, 그 속에서 벌어졌던 질병과 배신과 분리의 역사를 읽는 재미는 이 책의 제일 덕목이다. 나아가 580여 쪽에 이르는 긴 분량을 읽으면서 랑시에르의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이상과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집요한지를 확인하는 일, 철저한 자료 수집과 분석을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감각적인 것의 발견, 감각적인 것의 재분할이 공동체에 ‘평등’을 기입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분명한 신념을 확인하는 쾌감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관건은 『프밤』이 기록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과 사유가 지금 독자인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선에서 분신한 프롤레타리아 아방가르드 전태일이 있었던 한국 땅에서 어느 새랄 것도 없이 프롤레타리아란 용어의 함의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하나의 이유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단언하듯 모든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봤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 꿈틀거릴 수 있는 이 용어의 특성에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경제와 정치권력을 가르는 계급적 대립이 대중의 소비욕을 채워주는 대량생산된 값싼 제품의 스펙터클한 광고와 지배자가 계획한 시혜적 수사(修辭)와 복지 속으로 은폐하고, 20세기 이후 꾸준히 진행해온 인간 주체의 약화 혹은 해체 작업이 급기야 수많은 객체 속에 인간에 대한 존중마저 용해한 오늘날, 그 의미는 희석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노태우 정권이후 꾸준히 진행해온 노동자 계급의 정치·경제적 위상의 상승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었던 피지배, 소외, 가난의 상징성을 소각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중세시대의 계급 사회를 거쳐 산업혁명 이후, 단순하지만 확고히 자리 잡은 부르주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를 통해 각인된 가난하고 소외된 계급에 속한 노동자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렇다면 노동과 사유의 이분화에 근거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하고 그들의 ‘말’과 ‘글’에 사유의 지위를 부여하여, 오래전 그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향한 이상을 회복할 것을 제안하는 이 책은 지금 독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랑시에르는 “우리에게 말과 사물, 이전과 이후, 가능함과 불가능함, 동의와 거부의 관계의 자명함을 문제화하는 것을 가르쳤던 이들의 더욱 정묘한 지혜를 새롭게”(16) 배울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그 관련성은 랑시에르가 능동적인 해석자로 당대 프롤레타리아들의 텍스트를 읽고 그들에게 ‘주어진’ 감각의 자리를 재배치하여 변혁의 문고리를 잡았듯이, 독자 스스로 감각의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 내게 ‘주어진’ 질서와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고 사유하고 실천하기를 원할 때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