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 궁극을 향한 새로움의 지속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원로화가 백원선(1946~ )의 개인전이 오픈스튜디오로 개최된다. 작가는 1994년 50세의 늦깎이 나이로 서울갤러리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80세에 이른 올해 56회의 개인전을 맞이한다.
30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구(球)-Karma〉, 〈멈춤-pause〉 연작 등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조형의 평면 작업과 부조형 평면 작업을 지속해서 선보여 왔다. 이 글에서 〈구〉, 〈멈춤〉 연작으로 약칭해서 살펴볼 작품 외에도 〈선(禪)-근원(根源)〉 등 작가의 또 다른 연작을 포함한 모든 작업은 때로는 동양 전통의 매질 위에 서구의 현대적 조형 언어를 접목한 것이거나 때로는 서구의 형식 위에 동양의 조형 정신과 내용을 얹은 것이기도 했다.
백원선은 이번에, 수장고에 있던 사연 많은 추억을 담은 미완성 작품들을 꺼내어 살펴보고 마무리해서 완성한 〈멈춤〉(2004~2012) 연작을 선보인다. 그러니까 이번 출품작은 엄밀히 말해, 이전에 작업하다가 오랫동안 작업을 멈춰둔 미완성을 꺼내어 완성의 마침표를 찍은 2024년 신작인 셈이다. 작가는 왜 미완성 작품을 꺼내 완성해서 새로운 작품으로 선보이려는 것일까? 이 연작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이번 개인전이 품은 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이 내세운 ‘궁극(窮極)을 향한 새로움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구(球)-Karma〉 연작
II. 변화를 위한 멈춤
백원선의 〈멈춤〉 연작은 1993년부터 지속해 온 〈구〉 연작을 잠시 멈추고 숨 고르기를 시도하는 중에 잉태한 것이다. 달리 말해, ‘구(球)’로 상징되는 ‘원(圓)’의 변주를 다양하게 실험해 온 여러 유형의 작품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작업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멈춤〉 연작이다.
그것은 비워진 화면을 대하면서 처음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 것이기보다는, 지금까지의 〈구〉 연작을 한지(韓紙)로 덮거나 가리는 방식으로 여러 가지 조형적 성찰을 거쳐 도달한 작업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구〉 연작을 덮은 한지를 일부 찢거나 잘라내고 또다시 덮기도 하면서 ‘구’의 옛 이미지를 땅속에서 발굴해 올린 것처럼 명료하게 드러내거나, 때로는 물속에 담그거나 혹은 엷은 천으로 덮은 것처럼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감춤과 드러냄의 대비적 미학을 실현한 작업이다.
백원선은 일곱 겹 이상 바른 한지를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뜯게 되면서 ‘음각’뿐 아니라 닥나무를 오브제로 도입하게 되면서 ‘양각’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아울러 추상을 벗어나고자 도입한 말(馬)을 위시한 동물의 형상을 통해 맞닥뜨리게 된 ‘추상과 구상’의 맞물림은 그녀의 작업을 음각/양각, 추상/구상 그리고 과거/현재가 맞물리는 새로운 작업을 낳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멈춤〉 연작 이전까지 추상에만 매진해 온 작가에게 다가온 ‘말’의 형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가에게 ‘말’이란 추상을 버리고 구상을 선택한 결과이기보다 추상과 구상이 미술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근본적 원인이자 화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작업에서 ‘말’의 형상은 ‘구’의 조형 실험이 펼쳐졌던 ‘추상’의 화면 위에 올라선 채 다양한 동물과 식물로 변주하면서 확장한 ‘구상’의 한 방식인 까닭이다.
주목할 것은, 백원선의 작품에 등장한 ‘말’은 수없이 많은 드로잉을 거쳐 선택된 후, 이전에 완성된 〈구〉 연작을 뒤덮은 한지 바탕 위에 음각(陰刻)의 형상으로 올라서고, 그 배경은 양각(陽刻)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겹겹이 쌓아 올린 한지라는 질료의 층이 음각으로 된 형상을 견인한 셈이다. 그러니까 ‘말’의 형상은 이미 완성된 〈구〉 연작이 자기 생명을 버리고 희생을 실천하면서 새로운 〈멈춤〉 연작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준 결과물인 셈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사랑에 따른 희생’처럼 눈물 나도록 처연(凄然)하고 가슴 먹먹한 ‘〈구〉의 〈멈춤〉을 위한 사랑’인 셈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서 ‘말’은 어떤 면에서는 회화의 본질을 탐색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응용된 이미지일 뿐이다. 백원선의 작품에서 말은 훗날, 닭, 개, 양, 돼지, 사슴 등 다양한 동물로 확장되었고, 골퍼, 발레리나, 비보이 등의 사람들로 변주를 낳았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말’이란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있어, 처음에는 우연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멈춤〉 연작을 낳은 필연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멈춤〉 연작에서 주요한 것은 ‘말’의 형상에 있지 않고 ‘말’이 전하는 멈춤의 메시지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작품 속 ‘말’은 한결같이 역동적인 동작을 멈추고 풀을 뜯으며 안식하거나 멀리 바라보는 정지 상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정지는 다음 동작의 준비 자세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다음 동작을 위한 포즈(pause, 멈춤)의 포즈(pose,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 잠시 쉬는 멈춤의 상황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듯이, 백원선의 〈멈춤〉 연작은 ‘새로운 작품이라는 변화’를 준비하는 작업인 셈이다.

멈춤-pause, 2012, ink. Korean paper on cavas, 73x63cm_작가 소장

멈춤-pause, 2012, ink hanji mulberry on canvas, 162x130.3cm_판매
멈춤-pause, 2012, 한지, 닥나무, 캔버스, 162x112cm
멈춤- pause, 2013, 먹, 한지, 닥나무,162.0x130.3cm_작가 소장
멈춤-Pause, 2012, 한지.먹.닥나무, 64x64_판매
III. 감싸기와 들어내기를 통한 선(禪)의 가시화
백원선의 〈멈춤〉 연작이 ‘새로운 변화를 위한 멈춤’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때, 그녀의 이번 개인전이 함유하는 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감싸기와 들어내기를 통한 선(禪, Zen)의 가시화’로 풀이한다. 작가의 〈멈춤〉 연작에서 발견되는 ‘감싸기와 들어내기’라는 조형 언어란 무엇이고 그것이 불교의 ‘선’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선불교가 주로 좌선(坐禪, zazen)을 통해 지식이나 이론적 이해 그리고 번잡한 생각을 비우는 명상적 수행과 더불어 현재 순간에 집중하는 경험을 통해 직관적 깨달음을 얻는 것이듯이, 백원선의 〈멈춤〉 연작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구〉 연작을 잠시 멈추고 명상 같은 비움의 과정을 통해 직관적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명상 같은 비움’의 과정이라니?
백원선의 〈멈춤〉 연작에서 ‘명상 같은 비움’은 멈추기를 구체화하는 감추기 혹은 감싸기와 같은 조형 언어로 시작된다. 이전 작품을 한지로 뒤덮어 가린 상태에서 멈추기를 행하고, 명상하듯이 과거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조용히 성찰하면서 새로운 연작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싸기(envelop)’의 조형 방식은 무엇을 마치 봉투나 가리개처럼 덮어 가리는 은폐(隱閉)의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듯이, 그녀는 일차적으로 이전의 〈구〉 시리즈 작품을 한지로 뒤덮는 은폐를 실천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백원선의 은폐 전략은 불투명하면서도 배면이 비추는 한지의 반투명한 매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감춤과 드러냄, 투과와 반(半)투과’와 같은 은폐와 탈은폐의 효과를 동시에 드러낸다. 100% 닥으로 된 한지인 순지는 배접하는 양에 따라 2합장지, 3합장지 등으로 두께를 달리하면서 다른 투과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백원선의 작업에서 은폐와 탈은폐 사이를 잇는 주요한 인터페이스(interface)가 된다. 작가는 얇디얇은 순지를 여러 번 겹쳐 붙여나가는 과정을 통해, 순지 자체를 경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감싸고, 감추는 효과적인 매개체로 활용한다.
그렇다면, 한지로부터 감쌈을 당한 은폐의 대상은 어떠한가? 그것은 영원히 사라진 존재인가? 일순간에 감춰지고 지워지게 되는 ‘소멸의 사건’ 혹은 ‘상실의 순간’을 거치면서 시각적으로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것은 은폐의 위장막 아래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백원선의 작업에서 한지의 피부 아래에 가려진 이전의 〈구〉 연작은 부재의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전히 표피 아래 실존하는 실재(réalité)라는 점에서, 잠재태(潛在態, le virtuel)이자, ‘잠재적 실재(réalité virtuelle)’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백원선의 작업에서 감싸기, 가리기, 숨기기라는 은폐 방식은 무엇인가 영원히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벗기기, 들어내기, 드러내기와 같은 탈은폐의 욕망을 견인한다. ‘은폐’ 혹은 ‘감싸기의 방식’이 이전에 실행했던 무엇의 진행 자체를 멈추고 마치 선불교의 명상처럼 호흡을 가다듬은 상태에서 새로운 작업을 잉태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그 새로운 작업은 한마디로 ‘들어내기(develop)’ 혹은 ‘비우기’라는 음각의 조형 방식을 통해서 탈은폐(脫隱閉)의 전략을 실행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백원선은 선불교의 명상 과정처럼 조용한 성찰과 부단한 조형 실험을 통해서 한지로 뒤덮였던 〈구〉 연작 이미지나 ‘말’로 대별되는 동물 이미지를, 한지를 찢거나 오려내어 해체하면서, 들어내고 비우는 탈은폐의 전략을 이차적으로 실행한다.
그러니까 백원선의 작품에서 ‘감싸기’는 이전 작품을 한지로 뒤덮은 콜라주(collage)와 같은 것이며, ‘들어내기’는 뒤덮인 한지를 찢고 오려냄으로써 동물, 식물 그리고 인간을 데콜라주(décollage)와 방식으로 잠재태 혹은 잠재적 실재를 우리의 눈앞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들어내기와 비우기의 방식을 통해서 비가시성을 가시화하는,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탈은폐 전략의 본성을 백원선은 “한지의 선(禪)”이라는 메타포로 제시한다.
즉, 작가는 자기 작업에서 한지의 표층 아래로 이미 사라진 것들로 보였던 잠재태를 비우기와 들어내기라는 창작을 통해 우리의 눈에 새로운 존재로 되살려내는 근본적인 본성을 ‘한지라는 매체가 함유하고 전유하는 선불교의 철학’으로 풀이하고 그것을 화두로 제시한 셈이다. 풀어 말해, 명상 같은 비움의 과정과 현재 순간에 집중하는 수행적 창작실험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직관적 깨달음을 얻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멈춤〉 연작을 가히 “감싸기와 들어내기를 통한 선의 가시화”라고 해설할 만하다.

멈춤-Pause, ink hanji mulberry, 64x64cm

멈춤-Pause, 2006, ink hanji mulberry, 64x64cm.
멈춤-pause, 2014, 한지.먹.닥나무, 캔버스, 91x72.2cm_판매
IV. 오래 사는 회화 – 궁극을 향한 새로움의 지속
작가 백원선이 오래전에 작업하다가 멈춘, 미완성의 〈멈춤〉 연작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펴보고 완성해서 전시로 선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녀의 〈멈춤〉 연작이 이전의 〈구〉 연작의 표면을 덮고 감싸기와 들어내기라는 은폐와 탈은폐를 통해 자기 점검을 꾀하는 시간을 통해 회화 창작에 대한 사유를 튼실하게 하기 위함이다.
백원선은 30년이 넘는 창작 세월 동안 이러한 자기 성찰을 통한 중간 점검의 시간을 오픈 스튜디오라는 형식으로 2018년 이래 2019, 2021, 2022, 2024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해(혹은 격년) 선보여 왔다. 자신의 과거 작업을 유형별 혹은 주제별로 새롭게 구성하면서 불교 선 사상의 실천으로 간주할 만한 자기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마련한 것은, 생명을 입고 ‘오래 사는 회화’를 지속해서 창작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창작에서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는 과도한 왜곡이나 표현의 오류를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고 향후 창작에서 이러한 지점을 교정하고 수정하려는 결단의 시간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갖고자 함이다. 이러한 유형의 전시는 평생을 예술과 함께 살고 죽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속해서 실천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 다짐과 결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가히 ‘궁극을 향한 새로움의 지속’을 꾀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왜 ‘새로움의 지속’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이 글은 베르그송(H. Bergson)이 평생 천착해 온 지속(Durée)의 철학을 재론한다. 자연 본성이 드러내는 지속 속에서의 시간 변화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에 의해서 그 존재가 마감된다. 그것은 과거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지속(durée irréversible)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존재론적 위상을 환기한다. 따라서 백원선이 일정 기간의 과거 작업을 연작이나 시기별로 범주화해서 ‘지금, 여기’에 다시 소환하는 오픈 스튜디오 형식은 역설적으로 과거로 결코 되돌아가는 퇴행성의 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결단의 발로인 셈이다. 즉 현실계의 지평에 선 우리의 ‘체험적 시간(Durée vécue)’에 근거한 ‘삶의 지속(durée d'une vie)’ 속에서 이질적인 사건과 새로운 변화가 연속되는 것처럼 늘 새로운 창작을 창출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이 지속을 파악하는 것이 ‘지성(intelligence)’이 아닌 ‘직관(intuition)’인 것처럼, 백원선은 ‘선(Zen) 사상의 핵심 요체인 명상과 체험 그리고 직관으로 이 세계를 대면하면서 서구와 동양의 형식과 내용을 혼성하는 자신의 작업을 펼쳐나가는 중이다.
백원선의 이번의 오픈 스튜디오가. 이전에도 그랬듯이, 비반복적(non-répétition)이고 예측불가능(imprévisible)한 지속의 시간 속에서 마련한 잠시 멈춤의 순간을 통해서, 늘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과 변화(évolution)가 가득한 모습의 ‘오래 사는 회화’를 실천해 나가는 주요한 사건과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아울러 오늘도 ‘궁극을 향한 새로움의 지속’을 향한 발걸음을 점검하는 백원선의 창작 여정이 언제나 찬란히 빛나길 바란다. (20241130)
출전 /
김성호, 「멈춤 – 궁극을 향한 새로움의 지속」, 『백원선』, 카탈로그, 2024.
(백원선 56회 개인전-멈춤, 2024. 12. 02~12. 27, Won-Sun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