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치유의 꽃
하계훈 | 미술평론가
꽃은 인간의 생활과 정서의 중요한 부분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 생활 속에서 탄생과 사망, 존경과 사랑, 기쁨과 슬픔, 축하와 위로 등의 모든 순간에 꽃은 다양한 정서의 메신저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교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리고 그 경우에 꽃은 직설적인 오브제로서 제시되기도 하고 혹은 은유적 상징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태초에 꽃은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에게 내어준 에덴동산에도 피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님의 탄생 순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술이 중세의 종교에 봉사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근대까지 절대군주와 그에게 봉사하는 아카데미즘의 영향 속에 놓여 있을 때, 화가들은 그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고 평가와 보수를 받아야 했다. 그러한 틀 속에서 몇 가지 장르 구분에 있어서 정물화는 종교화나 역사화와 같은 거대 서사를 담기에 적합하지 않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시민 사회에 들어서면서 과거의 종교나 세속 군주의 삶과 사유만큼이나 보통 사람들의 삶이 가치 있게 다루어지게 됨으로써 평범한 일상의 기물들과 에피소드 역시 작은 서사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활과 연관된 정물화의 수요도 증가하게 되었다.
김경화는 미술대학과 대학원의 훈련 과정을 마친 뒤부터 줄곧 꽃을 모티브로 하는 정물화를 자신의 예술 창작의 중심에 놓고 평생을 지내왔다. 풍성한 꽃다발이 테이블의 중심에 놓인 작가의 대형 화면은 화병 주위를 감싸는 행복의 기운과 생기가 가득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이러한 꽃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서 생명의 부활과 기쁨, 위로, 치유와 같은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고 있다. 가지에서 꺾였지만, 생명의 물이 담긴 화병에서 부활하는 꽃들은 화면을 방향(aroma)으로 가득 채워주는 듯하다.
김경화의 작품 속 꽃들과 잎사귀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힘으로 허공에 퍼져 나가듯 폭발적인 곡선의 운동을 나타낸다. 작품이 주는 분위기만 볼 때 김경화의 생활 이력과 작업 과정은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엄격한 부친 슬하에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낸 작가에게 들판에 나가 현장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게 허용되지 않았고 실기실에서 스승들의 아카데미즘 풍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러한 상황의 타개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었던 정물화에서 작가는 자신의 타고난 색채감각과 조형 철학을 실현할 창작 활동의 의미와 기법을 꾸준하게 발전시켜 왔다.
회화를 전공한 김경화는 무엇보다도 재료의 매력에 빠져 줄곧 유화 작업을 해왔으며 요즈음 많은 작가가 유화보다 아크릴이나 다른 합성 재료를 물감으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일종의 유화 전통 단절을 염려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에 북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지는 유화 기법은 원래 색채의 중첩과 뉘앙스의 표현, 수정의 상대적 편의성 등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김경화의 작품에서의 유화는 이러한 장점을 넘어서서 19세기 말부터 반 고흐나 앙리 마티스, 라울 뒤피 등이 개성적이고 리듬감 있게 화면을 구성할 때 사용했던 자유로운 방식으로 유화의 매력을 발산시키고 있다.
조형적으로 볼 때 김경화의 작품은 밝고 화려하게 보인다. 밝은 원색과 약간의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화병 속에서 분출하듯이 전개되는 꽃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은유적 표현인 것처럼 생명력과 아름다움 떠올리게 해주고 있으며, 다가가서 보았을 때 꽃잎 하나하나는 부드럽게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색채에 있어서도 화면은 물감의 혼색이 많지 않음으로써 채도가 높고 화사한 느낌을 주며 생명력을 담은 꽃들의 모습과 색채가 전해주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인해 보는 사람들에게 기쁨, 치유, 희망을 전해주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대형 화면 속에 꽃들과 함께 표현되는 그 주변의 과일, 책, 찻잔 등의 소품들은 이 꽃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주체로서 작가의 존재를 감지하게 해준다. 이번 출품작들 가운데 100호 캔버스가 여러 점 연결된 대형 파노라마 화면을 보여주는 <나의 가는 길은>(2021)과 <정금 같이 되리라>(2021) 등의 작품은 작가의 주요 모티브인 꽃이 놓인 작업실의 사적 공간에 관람객들의 시선을 초대하고 있다.
김경화의 꽃병 속 꽃들을 더욱 생기있게 해주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세심하게 선택한 배경의 색채와 그 색채를 평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모티브인 테이블 위의 꽃들이 입체적 풍성함을 띠게 만들어주고 조형적으로 화면을 주도할 수 있게 해주는 점이다. 그리고 밑그림이 생략된 채 곧바로 화면에 적용되는 즉흥적 붓 터치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약간의 흰 여백이 주변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주요한 꽃을 중심으로 한 모티브의 선명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관람자들은 이러한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의 이력을 짐작하면 밝고 희망과 기쁨이 가득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꽃들이 가득 채워진 밝고 화려한 공간의 에너지와는 대조적으로 김경화의 개인사에는 사랑하는 형제를 여의는 슬픔이 있었으며 건강상의 치명적인 위기의 순간이 작가의 창작을 멈추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예술적 열정과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절망과 고뇌가 아닌 희망과 치유를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한 모티브가 꽃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꽃은 단순한 정물화의 모티브에 불과한 게 아니라 개인사의 희로애락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치유의 약이며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마음 수행의 안내자이자 예술 창작의 길잡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