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관찰하고 해석하여 제시하는 작가의 힘
하계훈 | 미술평론가
장우진의 작품은 개인적 이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작가의 생활 이력을 살펴보면 청소년 시절 부모님을 따라 북아프리카 지역과 유럽에서 생활하였으며 귀국 후 국내에서 미술대학 교육을 받은 다음 미국에서 석사, 그리고 다시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은 작가는 늘 자신의 생활 공간에서 정서적, 지적으로 민감한 촉수를 유지하며 주변을 관찰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도 작가는 울산과 같은 공업지역과 대도시의 빌딩들을 바라보면서 도시의 성장과 쇠락의 시간 사슬을 포함한 사회적 이슈와 지역의 역사, 환경과 공해의 문제 등 다양한 사유로 예술 창작의 세계를 넘어서서 작가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은은하게 수행해 왔다.
이러한 작업에 필요한 시각적, 심리적 기제로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회화나 벽화 형식의 대형 화면구성과 사진을 기본으로 하여 이것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수고스러운 디지털 콜라주 작업이었다. 이번 전시에는 이러한 작업들 가운데 서울과 대만의 도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사유를 드러내는 디지털 콜라주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정우진의 디지털 콜라주 작품들은 도시 공간에서 우리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개체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올해는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원래 문학 분야에서 시작한 문예사조이지만 초현실주의 미술을 포함한 이 운동의 기저에는 19세기 말부터 1차대전 직전까지 서유럽인들이 자부심과 신뢰감을 가지고 이성의 합리성이 그들의 사회를 발전의 가도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던 호시절(Belle Epoque)의 환상에 대한 실망과 그것에 대한 역습 운동인 다다(Dada)를 계승하는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파리에서 9000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 땅에서 장우진의 작품 속에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한 표현 기법 가운데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이 발견된다. 시인 로트레아몽의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라는 구절은 초현실주의 세계에서 유명한 문구다.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물의 전치(轉置)는 과학적 합리성이 언제나 진리나 선(善)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확장된 새로운 감각과 시각에 대한 체험을 요구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구사하는 이유가 “인간 내면의 복잡한 풍경을 펼쳐 보이려는 시도”라고 한다.
작가의 말처럼 터무니없이 높은 건물, 빌딩 숲 사이에 조성된 어색한 인공 자연, 그리고 그 안에 얼룩말과 타조, 기린 옆에 배달용인 듯한 모터사이클, 나뭇가지에 매달린 흔들의자 등이 배치된 장면들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이지만 그러한 말도 안 되는 풍경이 장우진의 작품 속에서 보란 듯이 펼쳐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하지만 우리들의 꿈속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있을 수도 있는 이러한 장면들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말처럼 장우진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저변에 숨은 잠재의식이나 상상력이 발동하여야 할 듯하다.
다만 장우진의 작품이 초현실주의 미술과 근본적인 궤를 달리하는 점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작품 제작의 행위에 내재한 의식과 철학을 앞세우는 만큼 미학적 작품성이 담보되지 않은 측면이 발견되는 반면에, 장우진의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적 속성을 담아내면서도 치밀하게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화면의 완성도를 향한 작가의 손노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2010년쯤에 시작한 인물 형상의 입자가 전체적으로 파도나 산의 형상을 구성하는 작품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울산에서 선보였던 <바람의 형상: 개미지옥 2022>이나 <바람의 형상 : 천국을 찾아서 2022>와 같은 작품은 작가가 우리의 사회와 삶을 관조하는 데 있어서 분석하고 재현하는 과정에 날카로운 관찰, 해석의 논리와 함께 해학적 여유를 갖추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주목되기도 한다.
최근 장우진의 작품에서는 포토 콜라주에 적극적 색채를 도입함으로써 작품이 함축된 메시지를 넘어서는 조형성에 좀 더 신경을 집중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만의 낡은 고층 건물 사이로 시원스럽게 열린 푸른 하늘,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초록의 나무들과 고층 건물에 비치는 다양한 조형 요소들이나, 건물 옥상에 배치된 녹슨 컨테이너와 매끈하게 외관이 정돈된 건물의 대비에 동원된 조형 요소들은 모두 다 작품의 주제를 떠나서 회화적 모티브로서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난 만큼 초현실주의 미술이 당대의 미술계와 사회에 미친 충격과 당혹스러움이 오늘날의 장우진 작품에서 같은 비중과 농도로 다가오지는 않겠지만,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오르려는 오늘날의 물신 숭배적 욕망에 사로잡혀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국가나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실은 자연스럽게 도피적 혹은 비판적 목적에서라도 100년 전 초현실주의적 사회비판을 시도한 예술가들의 발언을 소환하게 된다. 장우진은 자신의 생활 궤적에서 포착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작가적 해석과 재현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 전체를 위해서 독배를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적 패기(thymos)와 같은 직설적 신념을 대놓고 제시하기보다는 작품의 예술성과 해학 등으로 엄폐(掩蔽)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작가의 의식과 시선의 날카로움은 한 세기 전의 초현실주의자들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장우진이 함께 살아온 우리 시대의 여느 작가의 작품들보다 그의 작품을 품위 있게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배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