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를 서로 공명하게 해주는 백자


하계훈 | 미술평론가

<공명하는 백색들>을 주제로 한 천안미술관의 기획전시는 우리 전통 도예의 대표적 오브제인 백자로부터 스토리를 끌어내 오고 있지만  ‘백색 (white)’이라는 키워드는 시공을 초월하는, 좀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전 세계의 모든 시각예술에서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폭넓게 인용해 온 개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의욕적인 도전이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러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천안시립미술관이 서울공예박물관과 협력한 공예기획전의 성격을 띤다. 이는 천안과 서울 두 도시의 문화예술 교류 확대와 연대를 모색하는 첫 시도로서 백자라는 전통 공예 장르를 통해 전통의 재현을 넘어서서 현대 도자에 이르기까지 작품에 담겨서 전해진 오늘의 시대정신과 조형 언어를 폭넓게 탐구해보는 시도다. 이를 통해 천안미술관은 현대와 전통, 공예와 미술의 만남을 통해 우리 시대의 예술 창작 발전을 조망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하고 있다.

백색은 색채 심리학에서 깨끗함, 명료함, 신선함, 개방성과 솔직성, 순수함과 선함, 절대적 자유 등 긍정적인 개념 대부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종교를 비롯한 우리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채택됨으로써 숭배 대상의 복장과 그 종교 지도자의 제례 복장에서 흰색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한다. 종교를 넘어선 우리 삶의 관습에서도 관혼상제에서 흰색이 주요 색으로 등장한다든지, 전쟁터에서 휴전을 위한 타협 의사의 표시로 백기를 든 전령이 상대편에게 의사전달을 한다든지, 또는 항복과 전투 포기의 의미로 백기를 든다든지 함으로써 백색은 우리 삶의 그 자체이며 평화와 선(善), 비폭력성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백색과 관련하여 서양미술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가 그린 수태고지 장면에서 성모 마리아 앞에 놓인 백합꽃은 순결과 재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얀 아셀라인 (Jan Asselijn)의 작품  <The Threatened Swan>에 묘사된 백조는 조국을 수호하는 동물로서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도메니키노 (Domenichino 1581 –1641)의 작품  <처녀와 유니콘 >에서 흰색 유니콘은 처녀성과 순결을 상징한다..

이밖에도 말레비치 (Kajimir Malevich)는  1918년 제작한 자기 작품에서 흰색의 의미를 무한성이라고 했고, 프라이머가 발라진 흰색 캔버스에서 절대적 순수함을 읽기도 하였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는 미학적 의미 추출 이외에도 작품이 제작되기 한 해 전인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공산혁명에 대응하는 정치 사회적 은유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비치의 흰색에 대한 해석도 이번 전시를 포함한 일반적인 백색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미술사에서도 백색은 조선 시대 조형 미학에서부터 최근까지 국제적 관심을 받던 단색화의 전개 양상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단색화 화가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해온 일본의 평론가들과 기획자들은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悦)의 의견을 따라서 우리 조선의 미술을 대표하는 색으로 (비록 비애미(悲哀美)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백색을 주목한 바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가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절제 미학의 색으로서 백색을 즐겨 입고 쓰고 해왔던 것도 강조되고 있다. 야나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백색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과 종결에 동반했으며, 탄생인 동시에 되돌아감의 상징이다. 이처럼 백색은 우리의 전통과 국민 정서에 공명하는 대표적인 요소인 것이다.

미술관 측에서는 이번 기획의 의도가  ‘도자예술이 지닌 다양한 시도와 가능성을 통해 쓰임을 넘어 예술적 대상으로서 공예(백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함’이라고 한다. 즉 백색이라는 시각 요소가 함축하는 다양한 상징성과 미감을 백색의 도자(백자)로부터 출발하여 의미와 성격, 미학적 담론의 확장 등을 모색하는 전시로서 주제에 부합하는  27명의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한다.

2개 층의 미술관 전시장에  3개의 부문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마지막에는 천안미술관과 협력한  서울공예박물관의 이동형 아카이브인  ‘백자공예상자’를 통해 백자 재료와 장식기법, 그리고 제작 과정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파악하는 부문이 덧붙여진 이번 전시는 본 전시 <공명하는 백색들 >의 주제와 결합하여 공예의 가치를 입체적으로 전달해 주면서 전시의 내용을 한 단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출품작 모두가 주제와 들어맞으면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회화, 입체, 영상, 설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양하고 풍성하다. 도입부의 근대  1세대 화가들의 회화 작품은 백자로 대표되는 백색이 우리 역사와 전통에서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달항아리와 꽃을 모티브로 초기 작업에 몰두하여 색점 추상 작품으로 우리 미술사에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김환기의 작품에서부터 도상봉, 이응노, 장욱진 등 많은 예술가는 창작의 전 과정에서 꾸준하게 한국적 조형미의 원천을 전통 백자의 아름다움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저마다의 기법과 언어로 화폭에 담았다.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달항아리들이 전시장 중앙에 배치된 도예가 김판기의 도자 작품과 함께 전시됨으로써 관람자들이 백자의 이미지와 실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천안에서 활동해 온 신양섭은 백자로부터 영감을 받은 회화를 통해 소박한 흙의 정서를 전달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진행해 오고 있으며, 이융세는 물에 불린 한지를 화판에 바른 후 백색 바탕 위에 추상적 이미지를 올리는 작업을 통해 아버지(이응로)를 따라 타국 프랑스에서 지내면서도 한국의 정서를 몸으로 간직해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종무의 백자각병이 포함된 정물화 속의 백자는 자기 표면에 청색으로 그은 작가의 간결한 획을 통해 실물 백자보다 더 운치 있는 그림 문양이 더해진 백색의 도자로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백자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그리기나 빚기 이외에 디지털 사진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작품들도 있다. 사진작가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구본창은 백색의 배경에 다양한 기형을 가진 백자들을 촬영한 작품들을 모니터에 담아 차례대로 보여주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백자의 색과 거의 같은 배경에 놓인 오브제들은 실제로 생활에 이용되던 기물이었을 듯한 백자들을 마치 무중력의 허공에 떠 있는 듯하게 포착함으로써 일종의 종교적 의식에 도입된 성물 같은 신성성(神聖性)을 느끼게 해주면서 전시장을 순간적으로 경배의 공간처럼 전환해 준다.

전시는 실물 도자를 중심으로 현대 도자  1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부터 현재의 청년 작가 세대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제작 방식에서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생활 기물로서의 도자와 작품으로서의 도자의 스펙트럼을 넓게 펼치는 개성 있는 작업을 한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백자, 과거와 현재를 잇다’, ‘백자, 손으로 생각하다’, ‘백자, 새로움을 시도하다’라는 소제목 아래 전통의 기법을 지키면서 새로운 조형 어법을 탐구하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작가마다 전통 도예의 기법과 정신을 참조하면서도 각자의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들만의 공예 언어를 적극적으로 창출하려는 창작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백자를 기본으로 김익영, 이기조, 이반디로 이어지는 세대 간의 연결성은 백자 전통의 계승과 변용이 동시에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자를 포함한 우리 도자의 미감을 음미하는 방법으로서 독특한 전통 서가 형식의 아카이빙 회화를 펼친 강미선, 그리고 자개와 대리석 등으로 표현된 작품들을 백자의 이미지로 치환한 김덕용의 회화 작품들과 백자를 이용한 서구적 조형을 설치작품으로 확장한 데비 한의 작품들은 전통적 백자 예술의 현대적 확장과 조형 탐구의 장을 다채롭게 전개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백자의 원료인 백토를 이용하여 뚫새김이나 색상을 더하는 기법을 구사하는 유승희와 백자 도판에 회화적 이미지를 전개하는 채수용, 백자에 스모킹 기법을 가미하여 흑색과 백색의 자연스러운 문양을 만드는 김혜경의 현대적 도자기 등은 천안 지역의 공예 예술을 든든하게 지켜온 작가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이외에도 백자를 통해 환경과 공동체 의식, 죽음 등 다양한 시대 담론으로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작업으로서 4m의 대나무 마디 하나하나를 도자로 구워 쌓아 올린 이승희의 <타오>, 김원정의 한 상 가득 사기그릇이 차려진 밥상 <열의 한 술, 산>은 도자를 통해 우리 삶의 정신과 일상에서의 많은 부분을 사유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공명하는 백색들>전은 제목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백색에 초점을 맞춘 도자예술에서 출발하여 일상과 예술을 유연하게 포용하는 공예와 미술의 접촉면을 넓힘으로써 우리들이 두 장르의 울림을 공명하며 전통을 넘어서서 동시대의 조형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