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제주미술의 변화상 : 1950년대-1970년대 

김영호 | 미술사가, 중앙대 명예교수

I. 역사는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거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역사란 고정불변의 사실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상대적인 실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미술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작품의 제작 년도나 기법을 기록하는 아카이브의 범주를 넘어 그 작품이 지닌 가치나 의미 혹은 상징 따위를 가변적인 것으로 해석할 때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선 진실이 주어진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즘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미술양식의 경우도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허용된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틀과 방식을 현재라는 시대상에 맞게 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전후 제주미술의 형성과 전개’라는 주제를 내건 이번 심포지엄은 당대의 작가 명단과 그들이 생산한 작품을 기록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서 변화상을 이끌어낸 동인이나 그 가치를 정립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주제가 되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전후 제주미술의 변화상’은 큰 틀에서 제주미술의 형성이라는 논점과 그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제주미술의 형성이라는 말은 부담스러운 주제다. 제주미술의 모양이 전후 시기에 비로소 갖추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도적적인 제안을 해야만 한다. 가령 제주 근대미술의 태동은 김인지로부터 비롯되었고 그의 유화 작품 <애>(1835)는 제주 근대미술의 시원을 알리는 작품이라는 선언이 그것이다. 그리고 제주 근대미술 형성을 전후 시기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과 합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논점을 중심으로 ‘전후 제주미술의 변화상’을 정리할 경우 논리적 타당성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 타당성의 결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하는 심포지엄이라는 토론과 합의 장치일 것이다. 심포지엄은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두 사람 이상의 전문가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며 결론을 도출하는 일이다. 필자는 제주미술의 형성과 전개라는 대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주요 개념으로 무속, 유배, 이산(디아스포라), 난민, 토착 등의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제주미술의 특수성을 보편적 논리구조로 연구하기 위한 잣대들로 제시된 것이며, 제주미술의 역사를 제주의 환경적 조건에 근거해 정리하기 위한 실증적 해석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전후 제주미술의 변화상을 10년 단위로 거칠게나마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1950년대는 난민 미술가와 일본 유학 미술가들의 조우가 제주미술의 불꽃을 만들어내는 시기로 근대미술의 형성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제주에서 활동하던 김인지에 의해 서울에서 피난 내려온 작가들과 일본에서 귀국한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융합이 실현되고 있다. 이러한 합류의 열기에 힘입어 제주 화단이 조직되고 제주도미술협회가 출범하게 된다. 이어지는 1960년대는 난민 미술가들이 떠나고 난 제주 화단의 동공화 현상과 이를 계기로 제주 출신 미술인들에 의한 자성과 자각의 시기라 정리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는 제주 작가들에 의한 현대미술 집단의 태동기라는 점이 부각될 수 있다. 당대의 한국 화단 전반에 걸쳐 나타나 지역 현대미술의 확산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제주의 관점, 부산의 혁동인, 광주의 에포크 등이 이 시기에 출현한 그룹들이며 이후 남부현대미술제라는 정기 행사를 통해 지역 미술의 위세를 결속하게 된다. 1972년 제주대학에 미술교육과 개설은 미술 전문교육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II. 1950년대의 제주미술은 두 개의 집단, 피난민 미술가들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제주 출신 미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자는 난민과 종군 화가, 군인, 경찰 등의 신분으로 제주에 내려와 활동했던 이방인 작가들이며, 후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귀향한 제주 출신 작가들이다. 이방인 작가들은 장리석을 비롯해 이중섭, 최영림, 홍종명, 김창열, 이대원, 최덕휴 등이 있으며,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작가들은 고성진, 조영호, 장희옥, 박태준 등이다. 한편 제주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김인지와 강용택의 경우도 별도로 연구되어야 할 작가들이다. 김인지(1907-1967)는 서귀포에서 태어나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 출품작 <애(崖>로 입선한 이래 1936년과 1938년 제15회와 제17회에 각각 <서귀항>과 <해녀>로 연속 입선해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게 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한 작가들은 위에 언급한 고성진, 조영호, 장희옥, 박태준 외에도 미술계에 잘 알려진 송영옥, 양인옥, 원용식, 김광추, 변시지 등이 있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농업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나 한국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이석주도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다. ‘이산(디아스포라) 미술’이라는 해석틀의 범주에서 조사 연구가 더 필요한 이들은 일본이 앞서 받아드린 서구 근대화의 열기와 식민시대를 살았던 한국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 사이에서 독자적인 미술 노정을 걸었던 인물들로 제주 미술사 연구를 위한 중심축의 하나라 생각된다.

한편 ‘난민 미술’의 해석틀 범주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방인 미술가들은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한국 근대미술의 경향을 제주에 소개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평양 태생으로 평양 광성고보와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홍종명은 한국전쟁기에 서울을 거쳐 제주로 내려와 오현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시내에 화실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거주하며 가르친 강태석, 김택화 등은 후에 서울대학과 홍익대학 등에 진학해 중앙화단으로의 진출에 물꼬를 터놓았다. 장리석은 종군 화가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내려왔으나 내부 사정으로 군속의 울타리를 떠나 난민 신분으로 살아가며 화가로서 제주 풍경과 해녀를 주제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경우다. 장리석과 동갑이며 평양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이중섭 역시 제주의 바다와 해변 풍경에 가족을 등장시켜 하나의 전형적 이미지를 세우는데 성공을 거둔 사례다. 제주를 찾은 화가들은 제주의 내면에서 새로운 자연과 생명 그리고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새기며 이후 자신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장리석의 <남국의 봄>, 최영림의 <신화> 시리즈, 이중섭의 <나무와 달과 하얀 새> 등은 그 사례들이다. 
 
‘한국전쟁과 제주미술’은 화단의 형성기라는 관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3년 휴전 소식이 알려지고 난민 작가들이 육지로 새로운 이동을 준비할 무렵 제주 미술계는 제주 작가들 특히 일본 유학파 작가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직화 되기 시작했다. 1955년 2월 제주미공보원에서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되며 제도적 정비의 단계를 밟게 된 것이다. 초대 회장에는 김인지가 추대되었고 부회장에 홍정표와 홍완표, 상임위원에는 일본에서 귀국한 조영호, 장희옥, 박태준 등이 선출되었다. 제주도미술협회는 5월 창립전과 7월 학도미술전, 8월 제1회 미술강습회, 10월 제주시제 경축 미술전 등 단체 차원의 협회전과 학생미술전 그리고 공모전 등을 개최하며 제주의 미술문화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III. 1960년대의 제주미술은 자성과 자각의 시기였다. 전쟁이 종료된 이후 난민 미술가들이 육지로 떠나고 난 제주 화단의 동공화 현상이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제주 출신 미술인들의 자구적 노력이 시작되었다. <에콜 드 제주>전에 소개된 ‘아카데미와 제주미술’은 1960년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당시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개인 화실을 운영하며 후진을 양성했던 양창보, 강태석, 김원민, 김택화, 강영호, 고영우, 조석춘, 천병근, 고영만 등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이방인 작가들과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 등 도내 선배 미술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육지에서 정규교육과정을 밟거나 교사 자격 취득을 위한 단기과정을 받고 돌아와 활동하면서 1960년대와 그 이후 제주미술 아카데미의 얼개를 세워 나갔다. 제주대학에 미술교육과가 개설되기 이전까지 제주 화단의 분위기는 1960년대 초의 혼란한 국가 정세의 영향 속에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보낸 모색과 자성의 시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구미지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1960년대는 68혁명과 히피로 대변되는 저항의 시대이자 문화적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사상이 고개를 들었던 시대였다. 팝아트를 시작으로 누보레알리즘과 아르테 포베라 그리고 서술적 구상 등의 포스트모던 그룹이 태동된 시대이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는 1961년부터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등을 필두로 전전 시대 수준의 경기 회복을 거쳐 1964년 도쿄올림픽을 치루면서 경제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하고 있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중국은 전통문화를 뿌리채 흔들고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탄압받던 시대였다. 이렇듯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은 1960년 학생민주의거와 1961년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반도 최남단의 제주도가 격변하는 국내외의 정치 상황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가졌던 모색과 자성의 시간이란 어떤 의미인지 정리하는 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IV. 한편 1970년대의 제주미술은 ‘현대미술 집단의 태동기’로서 정리된다. 제주 최초의 현대미술 단체로 알려진 ‘관점동인’의 탄생이 그것이다. 기존의 아카데미 미술이 추구하던 조형방식과 다른 조형성을 내세운 비구상 계열의 작가들로 구성된 이 동인은 제주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공유하며 제주 미술의 새로운 향방을 모색하는 변곡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의 창립 멤버는 강광, 강요배, 오석훈, 고영석, 백광익, 김용환, 정광섭 등 7명이었다. 1972년 신설된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는 미술 전문교육을 통한 현대미술의 수용 현상을 가속화 하는데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1978년에 창립한 ‘돌맹이회’는 제주지역 최초의 청년작가 동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중, 문성률, 양영근, 현익찬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후 시상청년작가회로 그룹명을 바꾸며 다양한 양식적 실험을 전개해 왔다. 제주지역에서 발현한 현대미술 집단의 태동은 한국 현대미술의 지역확산 추세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제주의 ‘관점’, 부산의 ‘혁동인’, 광주의 ‘에포크’ 등이 이 시기에 출현한 그룹들이며 이후 남부현대미술제를 통해 위세를 결속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72년 제주대학교는 교육부로부터 미술교육과 신설 인가를 받아 이듬해인 1973년 국공립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술교육과가 창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에서는 공교육을 통한 미술인 양성이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미술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1970년대의 제주미술은 서울에서 교육을 받은 미술인과 도내에서 교육을 받은 작가들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도내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들은 강동언, 김병화, 고영석, 백광익, 오석훈, 김순관, 김창해, 박유승, 박조유, 고재만 등이 있다. 한편 이번 제주도립미술관 전시에서 ‘제주 바다를 건넌 작가들’로 소개되는 작가들은 김영철, 김종석, 강요배, 고영훈, 이성만 등이다. 이 모호한 편 가르기의 저변에 스며있는 불편한 진실이 제주미술의 발전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예술가에 있어 유년기를 포함한 청소년기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인성으로 체화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작품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출신대학이나 출신지를 은밀히 내세워 집단이기적 무리를 이루려는 생각은 환태평양으로 열린 제주미술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버려야 한다.
           
V. 마지막으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제주미술에 대해 언급할 때 다방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을 헤아려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국적인 커피향에 실려온 다방문화의 붐은 비단 제주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명동에 개업한 다방은 갤러리 문화가 정착되기 이전에 복합 문화공간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제주를 찾은 피난민들의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절반을 넘는 15만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는 문인을 포함해 미술인, 음악인, 연극영화 분야의 당대를 대표했던 문화 예술인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정부의 고위 관리나 부유층 가족들이 포함된 피난민들은 칠성로 일대에 개업한 다방에 모여들어 전쟁 속에서도 활기 넘치는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는 언론의 보도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 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탄생했던 다다(Dada) 처럼 제주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뒤섞인 열기로 요동치고 있었다. 칠성통에 자리잡은 칠성다방(1942)을 비롯해 새로 개업한 동백다방(1951), 남궁다방(1953), 오아시스다방(1954), 청탑다방(1959) 등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세태를 정보와 뉴스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다방문화를 일으켰다. 1950년대에 주목되는 개인전으로는 1954년 강태석, 1954년 조영호, 1955년 구대일 파스텔화전, 1956년 김창해전, 1957년 고영만 김택화 2인전 등이 조사되고 있다. 동백다방에서 작품을 소개한 작가들을 보면 홍정표, 현중화, 장희옥, 박태준, 한명섭, 김택화, 김병화, 김형찬 등이 알려져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탑다방, 무지개다방, 호수다방, 산호다방, 요안다방, 대호다방 등이 다양한 행사들을 소화해 냈다. 특히 대호다방은 ‘관점 동인’ 창립전이 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소라다방이 문을 열어 산호다방, 대호다방과 더불어 다방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전시를 위한 전문공간으로서 미술관이 건립되기 시작하는데 1970년대에 개관한 미술관으로서 동인미술관, 세종미술관, 신천지미술관, 기당미술관 등이 시대에 부응하며 문을 연 공간들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지방문화 진흥 정책에 따라 건립된 제주문화예술회관이 전시장과 함께 공립미술관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VI. 이상에서 보듯 전후 제주미술의 노정은 전쟁과 일제 식민지의 과정을 거치며 특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제주로 피난 내려온 이방인 미술인들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귀향한 제주 미술인들이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제주의 척박한 문화적 환경을 헤치며 자수 성가했던 미술인들의 일구어낸 업적도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다. 제주의 근현대미술사는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도 제주 특유의 환경적 요인을 배경으로 배태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며 성장했다. 시대를 관통했던 미술인들은 공립과 사립 아카데미를 통해 후진을 양성했고 서울과 제주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며 섬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우리는 이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을 예술 작품을 통해서 만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주인들의 독자적 성취를 육지와 대양으로 되돌려 퍼트리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주 미술사의 관점은 제주의 특수한 환경적 요인을 기반으로 삼아 무속, 유배, 이산(디아스포라), 난민, 토착 등과 같은 비평적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평적 개념들을 실증주의적 분석틀로 삼아 향후 제주 미술사를 올바로 정립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제주도립미술관 학술심포지엄 ‘전후 제주미술의 형성과 전개’202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