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의 사연 – 탈경계에 관한 조형적 성찰과 실험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한영권의 작업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점유하고 있는 견고한 구조로부터 언제나 탈주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모더니즘적 잔재의 구조를 허무는 일이지만, 원론적으로는 고정 관념으로 뒤덮인 현실을 삐딱하게 주시하고 현실에 대한 다른 해석을 지향하는 작가의 예술적 자율성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삐딱하게 보기, 다르게 보기’를 위해 그는 어떠한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는가? 그것이 담은 미학적 성취란 과연 무엇인가? 



II. 견고한 구조의 안팎에 대한 성찰   

모더니즘의 이상은 구조주의 철학에 힘입어 세계를 이성과 과학에 기초한 질서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주지하듯 100년이 안 되는 시기에 이러한 모더니즘은 신기루의 탑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이 세계를 재편하고 포스트모더니즘 풍토의 산포(散布)를 목도하는 이 세계에는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의 담론이 넘쳐난다. 

작가 한영권은 오늘날 시대에도 잔존하고 있는 모더니즘의 관습과 구조주의적 사유에 대해 이의 제기한다. 즉 고정화된 관념과 정의에 대해 이의 제기하고 다르게 보기를 시도한다. 우리는 안다. 오늘날에도 고정된 정의를 ‘거부할 수 없는 DNA’로 정당화하며 상투적인 보기의 방식을 강요했는지를 말이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실재와 허구,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흑백 논리로 규정된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던가?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결정론이나 명시적 사고 또는 제도와 이념의 강요하에 학습된 개념들은 다른 이해와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 속에, 세계의 현상 속에, 정치적, 종교적 신념 속에 투사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 즉 정체성이라는 단단한 정의(定義)는 다양성과 가능성이라는 성질을 억압하고 구속하고 있다. 여전히 신화처럼 숭배하며 특정 권력을 배경으로 일방의 힘이 작동하는 이 구조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견고하게 굳어진 규정을 재구축하고 내부와 외부가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경계라는 벽을 낮춰서 상호 간에 경계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 그의 사유는 타당하다. ‘정체성이라는 단단한 정의’, ‘견고하게 굳어진 규정’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해석을 요청할 것이자, 건강한 현대 사회를 위해서 지속해서 재구축되어야 할 것들이다. 하물며 예술의 영역에서 ‘견고한 정의, 규정, 구조’라는 것은 또한 어떠한가? 적어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이것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DNA가 더 이상 없는 다원주의 시대에는 다원주의 미술을 용인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구 모더니즘의 강령이 구축했던 ‘거시적 담론 안에 포섭하려는 환원적 구조주의적 세계’나 ‘형식적 미학에 경도하는 추상적 내재율에 대한 숭상’을 걷어치워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에 따라 장르적 경계로 분별된 매체 미학’을 탈주하고 ‘포스트 미디엄’ 시대에 걸맞은 예술 사유를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예술의 영역에서 ‘견고한 정의, 규정, 구조’를 어떻게 탈출하는 것이 좋을까? 한영권은 그가 탈출할 ‘견고한 구조와 의미’의 장 혹은 그 경계에서 탈주하는 관계의 미학을 고민한다. 그것은 역설이다. 그것은 마치 크라우스(R. E. Krauss)가 구조주의 언어 기호학자 그레마스(A. J. Greimas)의 기호사각형(Carré sémiotique)의 틀을 빌려와 ‘영역 확장에서의 조각’이 직면한 다원화 경향을 고찰했던 것과 유사하다. 크라우스가 구조주의를 탈주하기 위해서 구조주의의 모델을 가져와 포스트 구조주의를 성찰하는 것처럼 한영권은 ‘견고한 구조’를 탈주하기 위해서 ‘견고한 구조 사이에 기거하고 있는 경계 안팎’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구체적으로 한영권은 “고체처럼 굳어진 대상들을 전치(轉置)나 중첩 등의 방법으로 접목”함으로써 대상 안팎을 액체처럼 유연하게 만들고자 한다. ‘전치’는 “일상의 어떤 사물을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겨놓는 초현실주의 기법”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개념과 연동한다. 데페이즈망은 ‘사물이 지닌 원래의 특성을 탈주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한영권이 지향하는 ‘전치’와 맞물린다. 그의 또 다른 조형 방식인 ‘중첩’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형적 유사성을 지닌 것들을 서로 맞물리게 함으로써 원래의 의미를 변주하는 것이다.




〈휴(休)〉(2017)


이러한 ‘전치’나 ‘중첩’은 한영권의 작업에서 명확히 분별된 채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한 지점에 방점이 찍힌 상태에서 또 다른 지점과 공유하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글 ‘휴’ 자를 입방체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의 이미지로 변형한 작품 〈휴(休)〉(2017)는 텍스트가 이미지라는 다른 맥락 안으로 들어와 이미지처럼 인식되는 ‘전치’를 이룬 것이자. 텍스트와 그것을 시각화하는 이미지가 ‘중첩’되는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이를 성취한 것이기도 하다.  




〈정확하고 견고한 사고〉(2017)


또 다른 예로, 그의 작품 〈정확하고 견고한 사고〉(2017)는 캔버스 좌측 하단부터 대못, 중간 못, 작은 못을 박아가면서 ‘자’의 눈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형식은 ‘자’의 모양을 띠고 있지만 내용은 ‘정량의 틀’로서의 ‘자’의 기능을 탈각시켰다는 점에서 ‘자’를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위치시킨 ‘전치’의 효과를 발휘한다. 역으로 말해, 이 작품은 ‘정확하고 견고한 구조를 전치한 사고’를 유발하는 무엇이 된다. 그것은 분명히 ‘자’를 둘러싸고 있는 형식과 내용의 ‘중첩’을 도모하는 것이자, 또 다른 한편, ‘자’의 실재와 ‘자의 그림자’라는 허구를 맞물리는 ‘중첩’을 도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견고한 혹은 견고해 보이는 구조의 안팎 혹은 경계에서 유발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영권은 어떠한 사물이나 이념의 ‘견고한 구조’를 탈주하기 위해 먼저 중첩이나 전치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견고한 구조’를 직조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그것에 집중한다. 이후 그는 ‘견고한 구조의 안팎 혹은 사이의 경계’에서 오랫동안 서성이면서 종국적으로는 ‘견고한 구조’를 천천히 무너뜨린다. 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탈 구조주의를 성취하는 역설을 성취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III. 경계 존재 또는 배제된 것들에 관한 관심      

한영권은 구조의 안팎과 경계를 작품의 표면 위에 끌어올리는 작업을 통해서 경계의 주변에 서성이거나 엎드려 있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인다. 경계 존재 혹은 배제된 것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까? 이 경계 위 존재는 피상적으로 이쪽과 저쪽으로부터 용인받지 못한 채 배제된 것들일 수 있지만, 한영권은 그것을 양쪽 모두 포섭하는 능동적 주체로 전치하고, 재정의한다. 



〈Neighborhood〉(2020)


작품을 보자. 옆집 문 밑에 가득 쌓인 우편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Neighborhood〉(2020)는 경계 존재 또는 배제된 것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가득 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 고지서, 잡지, 전단 등이 뒤섞인 채 아파트 문 밑에 끼어있는 우편물은 집주인에게 아직 전달되지 않아 ‘역할을 끝내지 못한 존재’이자, ‘아파트 문과 바닥 사이에 임시 거주하고 있는 비루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직 수거되지 않은 문 밑의 우편물이란 발신과 수신 그리고 문과 바닥 사이에서 그 어느 측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배제된 존재, 즉 경계 존재이다. 전시장에서 실제로 선보인 작품은 이러한 우편물 일부를 절단한 이미지를 합성지에 출력한 후 틈이 없는 벽과 바닥 사이에 밀착시켜 일상에서 보아왔던 풍경처럼 꾸며놓은 것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사물들은 경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배제된 존재이지만, 전시장 속 작품은 ‘전치’와 ‘중첩’의 조형 언어를 통해서 일상의 맥락을 탈주하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이 작품은 마치 일상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를 모방해서 만든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품 〈브릴로 박스〉(1964)가 더 이상 사물이 아닌 예술이 된 것과 같은 맥락의 ‘전치’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주지하듯이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사물과 예술 사이의 식별 불가능성(indiscernibility)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인해 단토(A. Danto)가 예술사에서의 거대 서사(master narrative)의 종말, 즉 예술 종말론 선언을 구상하게 된 직접적 계기의 작품이었다. 오늘날은 무수한 작가의 작품 세계에 담긴 ‘미시 서사(micro narrative)’만이 살아 꿈틀거리는 다원주의 미술의 시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 한영권이 천착하는 ‘미시 서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일상에서 늘 맞닥뜨리는 상투적이기까지 한 ‘견고한 정의나 구조’를 달리 혹은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그 구조의 안팎 혹은 경계를 주목하고 만나는 일에서 출발한다. 달리 말하면 관성적인 구조적 사유의 틀을 벗어던지고 구조들 사이의 빈틈과 경계에 주목하면서 ‘전치’와 ‘중첩’과 관련한 소소한 예술적 행보를 실천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빈틈과 경계는 구조로부터 미끄러진 잉여(剩餘)의 존재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것은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존재이지만, 이쪽이나 저쪽을 한데 아우르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이기도 하다. 한 인물 사진의 좌우를 엇갈리게 이어 붙인 중간 지점에 붉은 날인을 한 작품 〈간인(間人)〉(2019)이나 두 개의 동물 뼈를 마치 운동화처럼 가죽끈으로 이어 붙인 작품 〈월경(越境)〉(2017)은 이러한 경계의 가능성을 조형적으로 실험한다. 



〈마음대로 노래한 비평 Op.X〉(2023)



또 다른 작품을 보자. 작품 〈마음대로 노래한 비평 Op.X〉(2023)은 금속판을 눈금자 형상으로 레이저 커팅을 시도하고 우레탄 도색을 거쳐 조각으로 만든 후 마치 사다리처럼 전시장 벽에 세움으로써 중첩과 전치를 실행한다. 즉 눈금자와 사다리를 중첩한 이미지를 통해서 정량적 기능의 자를 오고 내리는 다른 기능의 사다리 맥락으로 ‘전치’한 것이다. 무엇을 위한 전치인가? 평형을 이룬 두 개의 금속 프레임 사이를 잇고 있는 긴 눈금, 중간 눈금, 작은 눈금이 일정하게 배치된 이미지는 사다리의 외형과 유사성 차원에서 일정 부분 중첩되는데, 눈금자나 사다리라고 하는 두 사물의 기능이 모두 탈락한 또 다른 맥락의 예술이라는 존재로 전치된 것이다. 

그런데 작품명이 왜 ‘마음대로 노래한 비평’인가? 직관적으로는 명확한 치수가 새겨진 눈금자를 다른 맥락인 사다리로 치환하는 사유를 해학적 비판으로 지칭한 제명으로 읽힌다. 예를 들어 6.8cm라는 치수를 생각해 보자. ‘육점팔’이라는 수를 표시하는 서구 전통의 정합한 수사(數詞)는 경계를 예리하게 나누는 한 지점에 국한되어 있지만, ‘예닐곱’으로 표시하는 동양 전통의 수사는 특정한 경계의 범주를 함께 아우른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정량적 지시를 미루고 정량적 판단에 초점을 맞추는 날것의 비평적 사유인 셈이다.



〈마음대로 노래한 비평 Op.X〉(2023)


동명의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자. 화분에서 눈금자가 천천히 솟아오르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반복하는 키네틱 아트인 〈마음대로 노래한 비평 Op.X〉(2023)은 수치로 구조화된 눈금자의 정량적 지시를 배반하는 비평적 사유를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마치 견고한 구조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혀를 내밀고 조롱하듯이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지속되는 눈금자의 움직임으로 인해 1, 2, 3처럼 관측이 가능한 숫자로 된 실수(實數)의 세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물리학자 슈뢰딩거(E. Schrödinger)가 허수(虛數) i를 사용하여 ‘a+bi’라고 하는 ‘중첩’되는 수, 즉 복소수의 식을 통해 관측 불가능한 세계를 설명했던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연상하게 만든다. 관측 불가능한 세계? 그것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cat)’라고 하는 물리학적 사유 실험에서처럼 상자를 열어 삶과 죽음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상자 안에서 삶과 죽음의 상태를 ‘중첩’해서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과 맞물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이 실험이 확률과 기댓값을 중시하는 양자역학의 불완전한 면을 비판하기 위해 논증되었음에도, 오늘날에는 양자역학을 이해하도록 하는 가장 대표적인 실험이 되었다는 역설은 한영권의 이 작품이 드러내는 의미와 일정 부분 맞물린다. 화분 속으로 숨고 나오기를 반복하는 그의 ‘움직이는 눈금자’가 ‘구조/탈 구조’뿐만 아니라 ‘사물이라는 실재/그림자라는 허구’와 맞물리거나 ‘가시성/비가시성 그리고 삶/죽음’의 경계 주변에서 ‘중첩된 무엇’으로 간주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웃집의 쌓인 우편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인 〈Neighborhood〉가 담고 있는 ‘경계 존재 또는 배제된 것들에 관한 관심’은 〈마음대로 노래한 비평 Op.X〉이라는 동명의 두 연작, 즉 눈금자 형상의 조각 설치와 더불어 키네틱 아트에서도 고스란히 전개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즉 구조의 경계 언저리에서 이쪽과 저쪽을 모두 아우르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서 말이다. 



IV. 에필로그 

한영권의 또 다른 연작을 살펴보자. 일명 나뭇잎 연작이 그것으로 그는 바람에 떨어져 흩날리는 플라타너스 잎에 감정 이입하고 나뭇잎을 둘러싸고 있는 안팎의 사연을 작품으로 소환한다. 그것은 추락하는 나뭇잎이라는 사물로부터 추출하는 배제와 잉여 그리고 나무와 나뭇잎 사이의 경계 존재에 대한 감성적 성찰에 대한 기록이다. 



〈김성호〉(2024)


그는 벌레 먹어 숭숭 구멍이 뚫린 나뭇잎에 주변 인물의 손 모양을 중첩해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명인 〈류병학〉, 〈김성호〉, 〈홍명섭〉, 〈한영권〉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가 만난 비평가, 작가 그리고 자기 손을 촬영한 이미지를 나뭇잎에 투각의 방식으로 만든 나뭇잎 연작은 그에게 식물 대상과 인간 주체의 관계를 중첩해 놓기에 족하다. 나뭇잎으로 전치된 손바닥 형상! 그것은 일차적으로 식물의 잎맥 그리고 인간의 혈관과 주름 형상이 지닌 외적 유사성으로 인해 출발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생로병사를 안고 죽음을 향한 삶의 여행을 지속하는 내적 유사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뭇잎은 퐁티(M. Merleau-Ponty)의 견해처럼, 인간이 대상화해 불러낼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인간 주체와 교류하는 또 다른 주체이다. 퐁티에게서 지각의 주체는 전인적 주체를 아우르는 ‘살(la chair)’로서의 신체이되, 인간의 살’이자 ‘사물들의 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퐁티의 철학에서 주체와 대상은 분리되지 않으며 중첩되어 있고, 상호 교류한다. 퐁티의 사유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이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듯이, 한영권의 나뭇잎 연작은 ‘사물-인간-관객-예술’의 경계를 중첩하고 그 경계의 의미를 확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영권은 주체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관한 소소한 기록인 이 나뭇잎 연작을, 관객에게 전시 형식으로 선보이고 난 후 ‘손을 내어준 사람들’에게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그가 이 나뭇잎 연작을 재료와 대상을 선택해 혼자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는 “나 때문에, 그리고 내 밖에 있던 이유로” 나뭇잎 연작이 탄생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한영권은 견고한 구조를 탈주하기 위해서, 배제된 것들 혹은 경계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오늘도 구조의 안팎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소소하지만 진지한 예술 실험을 지속하는 중이다. ●


출전/

김성호, 「안팎의 사연 – 탈경계에 관한 조형적 성찰과 실험」,  『2023 자공공 기획전시 - 작은 파티 드레스』, 전시 카탈로그, 2023, pp. 60-63. 

(2023 자공공 기획전시 - 작은 파티 드레스, 2023.11.13~11.26, 영등포 아트스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