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서 1959, 이경성, 장욱진, 정규, 최순우



전 퐁피두센터 관장 퐁튀스 훌텐(Pontus Hulten) 국립현대미술관 내방, 1989, 
유준상, 심광현, 임세택, 안소연, 이화익, 김현숙, 퐁튀스 훌텐, 이윤신, 이경성, 박규형


‘현대 미술이라는 미의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그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겠다. (-중략-) 그들의 정신 내용이 생동하는 생명감에 충만되었으며 날카로운 야성과 높은 개척자적 정신을 지니고 있고 또한 왕성한 소화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면 왜 그들이 유랑의 길손이 되어 그들이 머물러 있던 고향을 그처럼 박차고 고초 많은 유랑의 길손이 되었는지. (-후략-)’
 
이경성은 ‘미의 유목민(遊牧民)-제2회 《현대미협전》 평론문’(『연합신문』, 1957.12.18)을 통해 당시 우리 현대미술의 양상을 진단하며 그 개척정신의 발로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며 현대미술의 게르(유목민의 거주지)에 모여든 유랑자들은 왜 그 험난한 길을 걷고자 하는지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을 통해 자답한다. 이경성은 3·1 만세운동이 발화점이 되어 독립운동이 먹물처럼 번지던 때에, 외래문화의 흔적이 이미 이끼처럼 켜켜하던 인천에서 태어났다. 일본소설에 빠져 맛본 고교입시에서의 세 번의 낙방, 15세 때 장사하시던 아버지의 권유로 겪은 사기전(沙器廛)의 실패,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학교 졸업장으로 도전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学) 별과(別科) 지망과 인천에서 출발해 36시간 만에 도착해 시작한 도쿄 유학 생활 등 유·청소년기의 도전과 방황. 그리고 일본 현지를 오가며 또는 피난의 고초 속에서 겪었던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6·25전쟁은 이경성이 질곡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시대 상황과 중첩된 당시 이경성의 삶은 그가 말한 50년대 중반, 고향을 박차고 현대미술의 벌판으로 유랑을 떠나야만 했던 ‘미의 유목민’들의 처지와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경성이 평생을 인문학의 토양 위에서 미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근간은 독서 습관에서 발원한다. 보통학교 때부터 일본 잡지 『소년구락부』, 일본 작가 기쿠치간(菊池寛),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등의 소설은 평생 책과 함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는 회고집 『어느 미술관장美術館長의 회상回想』(시공사, 2000)에서 밝힌 바 있다. 그가 일본으로 간 것은 메이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미술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은 먼저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있던 고향 친구 이남수를 만나면서다. 시간이 나는 대로 그의 안내로 도쿄에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봤고, 더러는 도쿄미술학교를 찾기도 했으며 이남수가 가지고 있던 화집이나 미술 관련 서적을 보기도 했다. 자주 접하는 화가나 작품 양식을 익힘으로써 차츰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경성은 먼저 문학에서 방향을 바꿔 와세다대학 법률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이미 미술의 감성적 분위기에 친숙해진 터라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해야만 법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일차방정식 같은 단조로움과 달달 외워야만 하는 법률공부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법의 힘이 강할수록 미술은 전혀 상반된 자력으로 이경성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미술로의 전향을 결정하지만,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라 화가보다는 미술비평가나 미술사가의 길을 가기로 하고, 25세(1943년)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 미술사 전공에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구두시험관(官)으로 참여한 일본의 저명한 학자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 1881-1956)와 조우한다. 그는 이경성에게 ‘한국의 미술사는 일본인에 의해 연구되어왔다. 지금이라도 너희 미술은 너희가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해준다. 한편,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자 입학한 지 두 달도 못 되어 귀국하게 되고 이듬해 박수남과 결혼하게 된다. 이경성이 박물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1934년부터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있던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44)에 의해서다. 이경성이 도쿄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도쿄상대 유학생 이상래가 우현의 처남이었다. 우현이 필요로 하던 책을 이상래와 함께 구해, 보내는 심부름을 한 게 인연이 되어 그때부터 서신으로나마 우현의 지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현이 일찍 세상을 등짐에 따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인천 출신에 창영보통학교 동문이라는 점은 열네 살 터울을 넘어 서로를 각별하게 여겼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한편, 우현의 제자격인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이경성은 이후 예술과 문화, 박물관의 도반이 된다.


석남미술이론상을 제정하기 위한 첫 준비모임, 2005, 
왼쪽부터: 조은정, 김달진, 이경성, 최열, 최태만, 정준모


우현의 지도는 고고학에 뜻을 두고 장차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종사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져 인천시립박물관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27세 때인 1945년 10월 박물관장 발령을 받고 6개월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46년 4월 1일 문을 열기까지 개관 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인천시의 적극적인 의지와 미 군정의 도움으로 향토관을 개편한 박물관은 변변한 소장품조차 없었다. 향토관에 남아있던 선사 유적과 개화기 유물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빌려온 유물, 일본인에게 몰수해 세관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약간의 물건, 국내외 인사와 어느 골동상이 기증한 도자기와 기금, 일본인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에서 빼앗아와 부평조병청에 보관하고 있던 종(鐘)과 불상 등으로 전시실을 꾸며 겨우 개관할 수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떠난 부산 피난길과 피난 생활, 전시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애환과 에피소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게 10년간의 관장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는 1954년 인천시립박물관을 떠나게 된다.

그가 이대 조교수 겸 박물관 참사(參事)가 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이는 이화학당을 이끌던 김활란 박사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1958년 박물관 신축 계획이 추진된다. 이경성은 심형구 관장을 도와 이화여대박물관이 1961년 신축·개관하기까지 업무를 실무추진한다. 이후 그는 제9대와 11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아 운영과 교육, 연구의 기틀을 다졌고, 1983년에는 워커힐미술관장으로 부임해 개관을 주도했다. 호암미술관 자문위원, 일본 소게츠미술관(草月美術館) 명예 관장, 모란미술관 자문위원도 역임했다. 그는 미술이론가와 행정가, 기획자로 또 뮤지엄 관장으로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대, 우리나라 현대미술문화의 한 중심에 있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같은 문화시설이다.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 과학박물관처럼 미술관은 미술박물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박물관’하면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이 고미술을 대상으로 하며 ‘미술관’은 근대 이후의 작품으로만 국한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근대미술관이 얼마나 잘 조성되어 있는지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가 근대와 현대 미술관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문화 척도를 세계에 과시하고 문화정책이 선진 대열에 낀다는 뜻이다.’(필자 재정리) 

1981년 03월 『공간空間』(165호)에 ‘현대미술관 건립의 당위성-여섯 평론가들의 제언’에서 그가 밝힌 박물관과 미술관 인식은 지금도 유효한 화두다.


- 이경성(李慶成, 1919-2009) 인천 출생, 아호 석남(石南), 와세다대 법률과 졸업, 와세다대 문학부 미술사 중퇴, 미술인, 미술이론가·행정가. 홍익대 교수·인천시립박물관장·국립현대미술관장·워커힐미술관장 역임. 석남미술문화재단 설립(1989), 국민훈장 목련장(1972)·보관문화훈장(1984)·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1992) 수훈. 예술평론상(예술평론가협의회, 1981)·세종문화상(1994)·일신문화상(1995)·자랑스런박물관인상(박물관협회, 1999)·예술문화상 ‘대상’(예총, 2000)·자랑스런미술인상(미술세계, 2001)·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화부, 2003) 수상. 『미술입문』, 『공예개론』, 『한국미술사』 등의 저서와 여러 편의 논고, 초대 개인전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