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으로 제 기능을 갖춘 독자적인 건물을 마련해 미술관을 갖게 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미술관 건립은 《제29회 대한민국미술대전》(1980.10.2) 개막식에 참석한 대통령의 ‘야외조각장을 겸비한 미술관’을 건립해보라는 지시에 따라 정부 새 문화정책의 하나로 계획됐다. 그 후로 6년, 1986년 8월 25일 과천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이 그것이다. 미술관 건립을 진두지휘한 것은 김세중 관장이었다. 그러던 그가 개관을 2개월여 앞두고 58세로 급서했다. 원인은 과로였다. ‘모든 예술은 엄격하고 가혹한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이 따라야 하는 것.’(『주간 중앙』, 1976.2.1.) 그의 말이 새삼 떠오르게 된다. 그렇게 김세중은 우리 곁에서 멀어져갔다.

김세중 관장
그보다 1년 전, 고3이던 필자는 전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여름방학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개회사를 하던 김세중 관장님의 웨이브 진 머리와 세련된 풍모는 1주일 후 있었던 수료식 때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에 담겨 지금도 앨범에 유물처럼 남아있다. 필자가 김세중 관장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4년 모 문화예술전문지에서다. 이 잡지 봄호에는 「늙지않는 예술청년 金世中(김세중), 그 분방한 內面(내면)」(장명수)을 명제로 그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크게 실린 사진에서 우선 눈에 띈 것은 작업실에 〈이순신 장군 소조 두상(頭像)〉을 비롯한 여러 작품과 함께 프렌치 코트를 입고 서 있는 김세중 선생, 또 기독교성이 강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시인이자 아내 김남조 선생이 함께한 장면이었다. 그때 비로소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김세중의 작품이라는 것, 한때 문학 소년을 꿈꾸며 「겨울바다」, 「너를 위하여」, 「상사」와 같은 시를 읊조리며 사춘기 혼탁한 마음을 달랬던 시어의 작가가 다름 아닌 김세중 선생과 내외지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세중과 그의 작품, 김남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세중이 우연한 기회에 일본어로 된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책 『로댕의 말』을 읽고 조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것처럼. 필자는 이것을 계기로 가장 바쁜 고3 여름방학 때 광주에서 올라올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때문에, 김세중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고3에게도 적잖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김세중과 김남조 작업실에서, 1984.9.2
김세중은 1928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 때는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소년기 김세중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러다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한편, 김세중의 종교성은 그에게도 우리 미술사에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당시 미대 학부장으로 있던 장발(張勃, 1901-2001)과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던 한 수녀와의 만남은 김세중이 가톨릭으로 귀의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평화와 환희를 주제로 혜화동 성당, 절두산 성당 등 종교성이 강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장발의 영향임을 그는 여러 석상에서 밝힌 바 있다. 불교 신자였던 부모로 인해 가톨릭입교가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종교미술에 뜻을 두게 된 것을 그는 앞선 잡지를 통해 회고하고 있다.
‘부모님이 오랜 불교 신자이기에 가톨릭으로의 귀의가 괴로워 명동성당 기숙사에 들어가 3년을 지냈지요. 새벽 종소리가 울리면 일어나 미사를 드렸고, 아침을 먹고는 누구보다도 일찍 학교에 가 어두워질 때까지 작품에 몰두하는 구도자적 삶을 살았습니다. 종교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졸업 후 프랑스로 가려고 절차를 밟던 중 6·25가 터져 좌절되었지요.’(필자 재정리) 먼저, 이 대목에서 김세중의 순수한 심성과 흡입력, 집중력과 단호한 의지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그는 대학을 졸업(1950)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때 잠시 마산의 한 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일하게 되는데(1952), 이 무렵 같은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김남조를 만나, 55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혼배성사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 사이 53년 대학원 졸업과 함께 같은 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2학년 때 김종영과 김세중에게 조각을 배웠던 최종태는 ‘김종영 선생이 좋아 김종영 작품 같이 만들어 놓으면 김세중이 들어와 칼로 깎아버리기를 반복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한국미술기록보존소 자료집』(제5호)) 김세중이 전임강사가 된 지 1년 후의 일로, 그의 성품과 작품을 대하는 자세를 다소나마 알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천) 공사현장
김세중은 우리나라 대표 조각물을 다수 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광화문), 〈유관순 열사 동상〉(장충단공원), 〈애국애족상〉(국회의사당)’등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김세중은 교육자이자 조각가, 미술행정가다. 이중 국립현대미술관장, 서울대 미대학장, 한국미협 이사장으로 있으며 보여줬던 미술행정가로서의 역량과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공평·성실하고 책임 있게 일하는 게 내 소신이다. 사분오열된, 미술계 융화에 역점을 두고 화단 활성화에 최선을 다하겠다.’(필자 재정리) 미술인으로는 이경성에 이어 두 번째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부임(1983.11.)한 김세중이 모 일간지에 밝힌 인터뷰 일부다. 미술관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예산이 부족해 건립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위기에서 관계 기관을 찾아 미술관의 필요성을 피력했고, 정치인과 당국자를 만나 예산을 요구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비록 사후의 일이 되고 말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준비 도중 관장직에서 물러나(학자적 소신으로 문화공보부 장관과의 갈등에 따름) 바통을 김세중 관장에게 넘긴 다음 수고하신 김 관장이 불행하게도 타계하자 본인이 또다시 관장에 부임한 것은 운명적인 일이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가 타계하신 관장님의 명복을 빈다.’(필자 재정리) 9대에 이어 11대 관장으로 다시 일하게 된 이경성(李慶成, 1919-2009)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지』(1987) 발간사에 애도의 마음을 담았다.
1987년 이경성, 이준, 이어령 등 7인의 창립 이사가 ‘김세중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김남조 선생(金南祚, 1927-2023)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에는 ‘김세중조각상’을, 1990년 ‘김세중청년조각상’, 1998년 ‘한국미술·저작출판상’을 신설했다. 김세중과 김남조 부부가 1955년부터 살던 용산구 효창동 집을 기념사업회에 출연하여, 2017년 김세중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오늘 국립현대미술관을 있게 한 김세중을 정점에 두고 김남조가 설립한 김세중미술관을 지금은 장남 김녕이 맡고 있다. 관장 김세중의 일가다.
- 김세중(金世中, 1928-86) 경기도 안성 출생, 서울대 미대 조소과 학·석사, 서울대 미대 조소과 교수 및 학장·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대표·한국미술협회 이사장·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제10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역임,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광화문) 제작, 세종대왕상(여주 영릉) 제작, 제10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