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에 들다 - 검거나 흰 공성(空性)의 우주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작가 이영의 작업은 형식적 차원에서, 오방색 그림, 검은 그림, 흰 그림 순으로 전개되었다. 내용상 그것은 오방색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 계승과 낯섦을 통한 현대적 변용, 먹그림을 통해 무명(無明), 무상(無常), 공즉시색(空即是色)의 불교 철학에 관한 조형적 성찰, 그리고 한지 콜라주의 하얀 바탕 위에 네거티브 형상의 반구(半球)를 넣어 시도하는 공성(空性)의 우주에 관한 탐구 등으로 정리된다. 
‘2025년, 흐름에 들다’는 주제를 내세운 무우수 갤러리 초대 개인전에는 검은 그림과 흰 그림이 소개된다. 검은 그림과 흰 그림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영의 작업이 함유하는 미학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I. 검은 그림 – 무명에서 무상의 깨달음을 견인하는 수다원의 세계   
이영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검은 그림은 장지 위에 먹과 흑연을 올린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이전의 오방색으로 가득한 불화 전통을 계승하는 초기 작업을 거쳐 나온 작업이다. 그의 작업 초기에는 전통 불화에 등장했던 오방색을 사용하면서도 불교적 도상을 해체, 분절, 왜곡하거나 표현주의적 방식으로 낯선 변용을 감행하는 등 현대적 조형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선보였다. 당시 그의 작업에는 사찰의 지붕, 불탑, 연꽃, 범종, 불상, 부처님의 의습(衣襲) 등 부분 형상이 왜곡되거나 클로즈업된 채로 등장하는 때도 있었고, 도상의 일부분이 격자무늬 속 모듈 안에 각각 배치되는 멀티플 아트(multiple art) 형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서구의 조형 언어를 통해 동양 전통의 형식을 낯설게 만들고 전통미의 변용을 다양하게 모색한 실험이었다. 동양화의 분채(粉彩), 봉채(封彩), 암채(暗彩)와 같은 전통적 표현 기법과 함께, 유화, 아크릴, 수채화, 파스텔 등 서구적 재료를 두루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전통미의 변용을 견인하는 조형 실험의 일단이었다. 
이영이 이러한 오방색이 선명한 조형 실험으로부터 갑작스레 색을 비우고 검은 그림을 그리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재로 작업실이 전소되었던 경험에서 기인한다.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작업실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을음과 검댕이, 소멸과 절멸, 그리고 검디검은 절망의 폐허와 잿빛 주검이 된 회백색의 우울이었으리라.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당시 작가의 심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 avidyā)’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흔히 ‘무지’, ‘무식’을 의미하는 무명은 불교에서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정의된다. 즉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인식이나 집착에 빠져 있는 상태” 또는 “생사윤회(輪廻)의 고통을 지속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무명을 제거함으로써 깨달음(열반)에 이른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읽고 난 화재 이후의 참담한 현장에서 목도한 ‘고통의 근원’을 어찌 제거할 수 있을까? 작업실에 가득했던 오방색 작품들을 화재로 잃고서 그는 검은색으로 된 새로운 작업에 천착하게 된다. 그는 검은색의 새로운 작업을 통해, 색(色)의 존재를 지식, 명예, 부귀, 욕망 같은 무용(無用)의 것으로 간주하고 지우거나 비움으로써, 공(空)의 상황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태도 전환은, 창작을 통해서나마 그가 ‘무명’의 상황을 벗어나는 경험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장지에 흑연과 먹을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는 지난한 노동을 통해 만든 그의 검은 그림은 모든 색을 덮어 고통(苦)을 지우고 비운 공(空)의 그림이자, 모든 색을 품은 빛(光)의 그림이기도 하다. 패널 위에 한지를 겹쳐 붙인 바탕 면이 만드는 저부조의 마티에르와 더불어 그것의 심층으로 침투하는 짙은 먹의 깊이 그리고 화지 위에 갈아 넣은 흑연이 반사하는 빛의 영롱함을 보라. 그의 그림은 농묵과 담묵을 일필휘지로 담아내는 사대부 문인화가의 자기 수련의 태도이기보다는 먹과 흑연을 반복적으로 화지 위에 텁텁하게 쌓아 올리면서 “자아라 할 만한 영원한 실체도 없다”는 무아(無我)의 철학과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성찰을 거듭하는 선승(禪僧)의 ‘명상화’에 가깝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글은 그의 검은 그림을 “무명에서 무상의 깨달음을 견인하는 수다원(須陀洹)의 그림”이라고 평한다. 여기서 수다원은 산스크리트어인 스로타빠나(Srotāpanna)를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으로, “흐름에 들어간 자”라는 뜻을 지닌다. 이번 전시에서 이영이 내세운 주제 ‘흐름에 들다’를 상기한다면, 그에게 수다원의 그림이란 “해탈과 열반으로 향하는 성스러운 흐름(法流, Dharma Stream)에 들어서는 그림”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수다원의 세계는 사각의 화면 위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텍스트를 자음과 모음으로 겹겹이 중첩하고 다시 그 위에 흑연과 먹을 가득 입힌 〈길〉 연작뿐만 아니라, 원으로 형상화된 〈카르마〉, 〈만다라〉 연작이나 부처 형상을 원 속에 품은 〈명〉 연작, 그리고 부처의 의습에 따온 선들을 격자무늬 속에 표현한 〈인연〉 연작 등 다양한 ‘검은 그림’ 속에서 드러난다.




II. 흰 그림 – 색즉시공과 ‘공성의 우주’  
이영의 작업에서는, ‘무명에서 무상의 깨달음을 견인하는 수다원의 세계’, 즉 ‘윤회의 현세적 고통으로부터 떠나 열반으로 향하는 도법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의 세계’는 검은 그림뿐만 아니라 흰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어쩌면, 수다원의 세계는 이 흰 그림에서 더욱더 구체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Cosmos-흐름에 들다〉 연작에 드러난 작품명처럼, 흰 그림에서는 도법의 흐름에 들어선 수다원의 우주적 세계관을 응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 연작에서 이영은 패널을 장지로 덧씌우고 그 위에 다시 반야심경의 텍스트를 한지로 잘라 콜라주의 방식으로 빼곡하게 덧붙인 하얀 바탕을 만들고 중앙 화면에 그릇처럼 움푹하게 파인 원형의 반구를 넣었다. 그는 이 원형의 반구 안에 아교를 바른 후 유릿가루를 도포하고 천연 채색을 통해 미묘한 색의 울림을 담았다. 
그런데, 이 연작이 드러내는 흰 그림은 물감 색이 아니라 바탕 면을 가득 채운 한지 자체의 물성으로부터 온 것이다. 한지를 잘라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들고 반야심경의 텍스트를 한자씩 정성을 들여 묵상하듯 콜라주로 화면 전체에 붙여 나간 까닭에 화면은 텍스트로 꽉 차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텅 빈 듯한 흰색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 연작은 ‘색즉시공(色即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이라는 반야심경 속 불교 철학을 효과적으로 전한다. ‘색(형상, 물질, 존재, 채움)은 곧 공(비형상, 비물질, 비존재, 비움)’의 세계이자 ‘공은 곧 색’이라는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그의 작업에서 ‘색(화면을 가득 채운 텍스트의 형태와 한지라는 물질과 그리고 반구 안에 바른 유리분과 천연 채색이라는 물질)은 곧 공(덧붙여 있어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의 비존재, 흰색이라는 비움의 색 그리고 비워진 네거티브의 반구)’임과 동시에, 거꾸로 ‘공은 곧 색’인 셈이다. 
〈Cosmos-흐름에 들다〉 연작에서는 또 다른 조형 방식을 선보이기도 한다. 사각형의 패널을 평행 사변형이나 마름모꼴로 변형한다든가, 화폭을 격자무늬로 분할해서 그 속에 여러 개의 반구를 병렬 배치하는 등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조형 방식으로, 그는 장지의 바탕 면 위에 천연 채색과 은박, 활석분 등으로 가득 채운 다음, 그 위에 흰색의 한지로 반야심경 텍스트를 올림으로써 색 위에 공을 덮는 색즉시공의 철학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조형 실험을 통해 이영이 작은 화폭 위에 올려놓는 우주는 ‘공성(空性)의 우주’라고 할 만하다. 불교 철학에서 ‘공성’은 문자적 의미로는 ‘비어 있음’ 또는 ‘무상함’을 가리키지만, 단순히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없이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즉 공성은 모든 존재가 고정된 자아나 실체를 가지지 않고, 인연(因緣)이라는 직접적인 원인(인)과 간접적인 조건(연)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의 철학을 전한다. 이영은 패널을 횡이나 종으로 연장하여 색색의 반구체를 병렬적으로 선보이는 〈Cosmos-연〉 연작이나, 마치 달의 타원형 궤적처럼 개별 패널마다 반구체를 다른 위치에 놓은 〈Cosmos-순행〉 연작을 통해서, 연기의 철학, 즉 사물이나 현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는 다른 요소와의 관계에 따라 형성되면서 변화를 거듭한다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선보인다. 
이렇듯 이영의 흰 그림은 존재와 비존재, 물질과 비물질, 채움과 비움과 같은 대립적 관계를 불러와 서로 연결된 ‘색과 공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면서 ‘색즉시공과 공성의 우주’ 그리고 ‘연기’의 세계를 선보인다.




III. 에필로그
이영의 무우수 갤러리 초대 개인전을 “흐름에 들다 - 검거나 흰 공성(空性)의 우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는 이 글은 그의 작업을 검은 그림, 흰 그림으로 나눠 “무명에서 무상의 깨달음을 견인하는 수다원의 세계”와 “색즉시공과 공성의 우주”로 해설했다. 
그러나 그의 검은 그림과 흰 그림은, 색과 공의 세계가 다르지 않듯이, 공성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마치 주검을 상징하는 검은 숯이 불을 피워 종국에 주검의 완결인 흰 재가 되듯이, 그리고 그 흰 재가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이, 죽음과 삶은 공성의 세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연기의 철학을 드러낸다. 또한 감산혼합으로 모든 빛을 품은 ‘흰빛’이나 가산혼합으로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은색’이 공성과 연기의 차원에서 다를 바 없듯이, 이영의 작업에서 모든 색을 다 잃은 ‘흰색’이나 모든 색을 다 품은 ‘검은색’은 공성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이영의 검거나 흰 작업을, 전시 주제, ‘흐름에 들다’와 연관하여 불교적 교리에 빗대어 본다면, 욕계(欲界)의 욕망과 그에 따른 고통을 벗어나 무색계(無色界)을 지향하는 욕계출리도(欲界出離圖) 혹은 고요한 열반의 세계를 염원하는 열반적정도(涅槃寂靜圖)라고 할 만하다. 다만, 불교 철학뿐만 아니라 실험적 현대미술에 천착하는 그의 작업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이 글은 그의 작업과 이번 전시를 다음처럼 정리한다: 작가 이영은 이번 전시를 통해 ‘무상의 깨달음을 견인하는 수다원의 세계’와 ‘색즉시공과 공성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종국적으로 자신의 예술가적 위상을 “영원한 나, 고정된 자아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철학에 투사한다. 세계를 대면하고 현재를 사는 예술가로서 정주하지 않는 끝없는 조형 실험과 더불어 놀라운 변화를 항시 추구하면서 말이다.
(20250408)  

김성호, 「흐름에 들다 - 검거나 흰 공성(空性)의 우주」, 『이영-흐름에 들다』, 전시 카탈로그, 2025 
(이영-흐름에 들다展, 2025. 04. 30~05. 19, 무수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