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공미술에 관한 단상
1. 공공미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공공미술의 본질적인 역할과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공공미술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미술입니다. 미술은 원래부터 공공성을 띠고 시작하였습니다. 사회 공동체 내 지배 및 피지배계급이 형성되면서(이건 인간이 생겨난 태초부터 진행된 현상입니다) 미술의 공공성은 지배계급이 사적으로 독점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미술은 끊임없이 이러한 공공성의 변질 혹은 자리 바뀜에 저항하였습니다. 미니멀리즘, 대지미술, 개념미술 등이 미술제도와 작가, 미술을 독점하려는 계층을 지지하는 미술에 저항하였고, 이들 미술이 공간적으로 미술관 밖에서 이루어진 결과물들이 공공미술의 형태, 특히 60년대 이후 공공미술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미술관 밖에서 이루어지는 해프닝, 퍼포먼스, 공동체 미술, 공공장소의 미술작품 등 다양한 형태로 공공장소에 펼쳐지는 미술은 원래의 모습대로 인간의 삶에 밀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도시미관개선, 지역 활성화를 위해 공공미술 작품이 거리나 광장에 세워진다고 해도, 그것의 밑바닥에는 미술 스스로 그 본질적인 역할을 회복하려고 하는 자기 성찰적 혹은 내재적 비판 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내재적 비판의 미술이 아니라면 진정한 공공미술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것은 내재적 비판이라는 과정을 거쳐 진전해온 미술의 역사에서 이탈한 미술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공공미술의 역할과 사회적 기능은 미술을 인간의 삶에 밀착시켜, 어떻게 하든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공공은 대중, 공적 장소를 동시에 지시합니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사적 장소가 아닌 공적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대중의 이익을 위한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들은 거의 모두 이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첨예함은 그 이익이 ‘누구를 위한 이익이냐’에서 발생합니다. 즉 대중을 누구로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공공미술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 장소, 소통의 문제도 결국은 공공미술이 누구를 위한 미술인가 혹은 누구를 위한 미술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수렴합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대중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위치(position)를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대중은 엄밀히 ‘몫 없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몫 있는 자들의 이익을 미술이 챙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 사회 속에서 몫을 충분히 챙기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공미술은 피지배자들과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면 “몫 없는 자”들의 편에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기존에 안착된 이러한 권력 관계로 형성된 구조를 ‘치안’이라고 부르고, 이의 조정 행위 혹은 결과를 '정치'라고 합니다. 공동체 내 미술에게는 ‘치안’의 상태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정치'의 역할이 주어져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공미술은 ‘치안’의 상태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 편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불평등한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비판하는 데에 사회구성체의 한 요소로서 미술이 갖는 기능과 덕목이 있습니다. 특히 공공미술은 이런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야 합니다. 강조하여 말하지만 이런 미술은 도시의 미적 개선과 상충하지 않습니다. 공공을 상대로 공공미술을 구상하는 가운에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작가의 표현은 얼마든지 더 아름다운 형상, 적어도 지금 한국 건물들 사이에 다수 존재하는 조잡한 형상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아직 공공의 편에서 사회이슈를 바라보는 미술이 아름다운 형상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사유의 결핍에 있을 가능성이 크지, 공공의 미술이라서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국 미술사에서 비판적 미술의 귀중한 소산물인 ‘민중미술’이 이러한 약점이 있다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이 점은 한국 미술이 비판적 미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토대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반증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랑시에르의 정치예술론이 말하는 ‘정치의 미술’의 표현방법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2. 전문가들은 공공미술의 장점으로 예술가 후원, 직업창출, 도시 미관 개선, 지역 활성화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공공미술의 경제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 공공미술의 본질적인 역할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공공미술은, 장기적으로 위와 같은 성과를 이루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공공미술은 대중의 호응과 평가로 이루어지는 미술입니다. 사회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미술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오늘날 대중은 공공미술의 향유권뿐만 아니라 소유권까지 주장합니다. 과거와 같이 관료 행정이 결정한 미술, 작가가 주도하여 만든 미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대중의 직접적인 철거요구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서울역에 설치되었다 철거논란에 휩싸인 슈즈트리 등과 같은 경우를 보면, 공공미술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비판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도시 미관을 평가하는 주체인 대중을 설득하지 못하는 공공미술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며, 그렇다면 공공미술의 경제적 효과는 허상이 되고 맙니다. 반복하자면, 공공미술은 공공의 호응 없이는 결코 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현재 공공미술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는 어떤 점이 있는지요.
현재 공공미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보다 보기 싫고 혐오스러운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속한 건물 사이에 있는 소위 공공미술들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도시미관을 개선하고, 지역을 활성화한다는 미술의 구체적인 형상들을 객관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심할지 모르지만, 거리의 풍경을 개선하기는커녕 훼손하고, 우리의 미적 감각을 일깨우기보다는 시각적 폭력에 가까운 형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형상들이 어떻게 지역을 활성화하고 거리를 활성화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조형물은 엄격히 미술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의 원인이 자본의 논리에 의한 제작과 강제적인 제도(1%법)의 부작용 이외에도, 미술 내적인 철학과 사유의 부재에 있다고 봅니다. 미술형상은 개념과 철학의 반영입니다. 특히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공공미술은 더욱 그래야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개인과 공공의 영역을 이분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인 개념과 철학의 축적이 공적인 개념과 철학을 구축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저는 공공미술의 작가, 지원주체 등으로 구성된 제작영역에 있는 분들이 대중의 이익을 어떻게 공공미술에 반영할 것인지, 대중의 미적 쾌감을 위해서 어떤 미술품이 해당 장소에 들어가야 할지와 같은 부분에 더 깊은 연구와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나라 공공미술 제작 과정에 관한 법령과 같은 제도의 문제가 있지만, 그 이전에 대중의 이익이라는 부분에 관한 연구와 성찰이 우선입니다. 예를 들어, 타도시에 비해 공공미술의 수준이 비교적 높다고 여겨지는 서울의 경우, 2016년 이래 꾸준히 진행해온 <서울은 미술관> 컨퍼런스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컨퍼런스의 수준과 효과에 대한 평가를 떠나 거기에서 나눠진 공공미술 담론들은 적어도 서울에 세워지는 공공미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였고, 그런 고민들이 공공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각 지자체들은 이 모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건물 사이에 공공미술을 세우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공공미술의 담론과 실천을 이끌어가는 미국이 <기울어진 호>라는 공공미술품을 놓고 사회 각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가 8여년의 세월을 첨예하게 논쟁하였다는 사실, 그 결과로 <기울어진 호>를 철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과로써 철거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의 시간과 깊이의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담론의 활성화가 국가의 후원(엄격히 따지면 이것은 대중의 세금의 후원을 받는 것입니다), 일거리 창출, 도시 미관 개선, 지역 활성화와 결코 상충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공공미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작품을 제작하느냐는 철학의 정립에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공동체와 공공미술, 장소와 공공미술, 상호소통과 공공미술 등의 쟁점들을 다루는 가운데 형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 위에서 공동체와 장소를 이롭게 하는 공공미술의 구체적인 형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러한 철학을 세워야 할 때이지, 건물 사이에 조각물하나를 세워야 할 때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공공미술 제작은 일시 정지하고 터를 비워두는 것이 아름다운 미래의 공공미술을 위해 더 현명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4. 앞으로 공공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랄까. 지속 가능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공공미술의 방향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먼저 물질적 공공미술에 대한 지나친 편향성을 시정해야 합니다. 공공미술이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꼭 기념비적인 미술품으로 남을 필요는 없습니다. 수잔 레이시가 정의한 ‘새 장르 공공미술’이 강조하듯 공동체의 이슈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과정도, 그 결과물로써 대중의 이익이 성취되는 것 자체도 공공미술입니다. 이슈를 해결하는 과정을 공공미술로 인식하고 물질적인 미술품에 대한 집착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물질적인, 기념비적인 공공미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물질적인 부분에 지나치게 편향된 공공미술이 비-물질적인 공공미술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미술의 방향성에 대한 저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미적인 방법을 통해 고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평등과 자유에 기여하는 가시적, 비가시적 공공미술로 나아가는 것, 거기에 공공미술의 본질이 있고 방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5. 마포역 수직마을은 과학적 이미지 분석을 통해 원형에 가깝게 보수한 점과 체계적인 관리 방식을 적용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공공미술의 유지 및 관리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수직마을은 기본적으로 도시의 밀집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도시의 밀집이 과연 대중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를. 저는 지금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도시의 밀집이 대중에게 이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과연 수직마을을 마포역으로 옮겨놓았을 때, 이런 고민이 있었는가하는 점입니다. 공공미술에 대한 감상이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의 기능 정도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면 특히, 마포역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공간에 특정한 조형물을 설치할 때, 단순히 원형을 복원하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 ‘이 장소에서 왜 이 작품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마포역 한 복판에 서양의 사고방식의 압축이랄 수 있는 수직문명의 상징적 조형물 대신 서양 문명의 수직을 비판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을 설치한다면 대중의 호응의 방향이나 양적인 측면에서 더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공미술이 장소의 맥락을 반영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공미술의 유지 및 관리는 세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소성과 맥락의 지속성입니다. 공공미술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와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작품을 유지·관리할 때 단순히 물리적인 보존뿐만 아니라, 해당 장소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석을 갱신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마포역 수직마을의 경우, 도시 밀집과 주거 공간의 문제를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점이 현재와 미래의 도시 변화 속에서 꾸준히 재고되어야 합니다. 둘째, 물리적 유지보수와 접근성입니다. 공공미술은 실내 미술관 작품과 달리 기후와 환경 변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므로, 재료와 구조적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대중이 접근하고 체험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작품이 도시 공간 속에서 방치되거나 훼손된다면, 그 기능과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기적인 보수뿐만 아니라, 대중이 작품과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시민 참여와 소통의 개방성입니다. 공공미술은 한 번 완성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해석이 쌓이고 변화할 수 있는 개방성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유지·관리 과정에서 지역사회와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개방적 소통 구조가 필요합니다. 작품에 대한 논의와 해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공공미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도시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결국, 공공미술의 유지·관리는 단순한 보존을 넘어, 공공적 가치와 장소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6. 송도 달빛공원에는 폐철을 재활용한 공공미술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반면 환경을 파괴하는 사례가 있다면 어떤 문제를 동반하는지요.
송도 달빛 공원의 공공미술에 대한 정보가 지금 저에게 없습니다. 폐철을 재활용한 공공미술의 진면목은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들이 환경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갖고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실천하는 ‘정신적 등가물’로 나아가는데서 확인될 것입니다. 송도의 재활용 공공미술이 그러하길 바랍니다. 반면 환경을 파괴하는 공공미술은 이미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는 대전제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당연히 거부해야 하는 미술입니다. 공공미술의 역할이 있다면 이러한 미술을 고발하고, 이를 대중에게 알려 철거하는 것이겠지요.
폐철의 재활용에서 고려할 점이 있다면, 단순히 폐철을 사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철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즉 도시와 산업의 변천사나 건축의 흔적을 담고 있는 철의 특성을 드러내는 미술의 실천입니다. 가령 뉴욕 하이라인의 벤치나 구조물은 기존 철도 시설의 철강을 재활용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철’이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역사를 담은 재료’로 활용될 때 공공미술로서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의견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공미술은 단순한 장식이나 기능적인 조형물이 아닌 '정치적 형상물'입니다. 정치는 공동체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합니다. 공공미술을 단순히 하나의 형상물, 도시재생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에서 공공미술이 공동체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감각적인 형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여기에서부터 공공미술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아래 앞서 말한 대로 공공미술의 형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표현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