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현대미술의 형성과 변화-70년 약사 1)
변종필 | 미술평론가
제주 현대미술은 작가들의 이주와 교류를 통해 미술 문화가 발전해온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제주 현대미술의 형성은 크게 해방 후 한국전쟁기를 지나며 제주미술계를 조직적 활동으로 이끈 미술협회가 설립된 1950년대를 시작으로 전문교육기관 설립과 동인활동이 제주미술 변화의 주요 동력이되었던 1970년~1990년대, 행정과 민간주도의 문화공간들이 큰 역할을 하며 발전한 2000년대, 그리고 환경미술의 확장성과 지속성장 가능성을 선보인 2000년 이후 현재까지를 주요 변곡점으로 삼을 수 있다. 2)
1. 제주미술계의 조직적 활동을 이끈 미술협회
제주 미술계가 실질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해방 후 1950년 한국전쟁 때이다. 1951년 말, 15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제주로 건너왔을 때 각계의 문화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이중섭, 장리석, 김창렬, 최영림, 홍종명, 구대일, 옥파일, 최덕휴, 이대원 등 한국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화가들도 제주로 왔다. 이들은 일찍이 서구미술을 경험한 화가들로 제주에서 머물면서 이식해 놓고 간 예술정신과 활동이 제주 미술계에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3)
당시 생존을 위한 선택이든, 창작 활동을 위한 선택이든, 제주에 정착하거나 일정 기간 머물며 창작활동을 한 작가들이 제주 미술계의 새로운 변화를 촉발시킨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 전쟁 당시 제주로 피난 온 홍종명과 장리석은 제주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화가로 평가된다. 이들은 '제주 지역사회의 예술 발전과 미술인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고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된 제주도미술협회 설립에 키여한 바가 크다. 1955년 2월 24일, 김인지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며 창립된 제주도미술협회는 한국전쟁 이후 열악했던 제주 미술계를 조직적으로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소규모 미술 단체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한국화, 서양화, 조각, 판화, 공예, 디자인, 서예, 문인화. 평론 분과 등 9개 장르 분과 288명 회원(2020년 기준)을 보유한 사단법인으로 성장했다.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제주도미술협회를 돌아보면 제주도미술협회의 창립이 제주지역 화단의 큰 윤곽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자체별로 운영되고 있는 한국미술협회지부가 그렇듯 제주도미술협회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반영하거나 신세대 작가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등 현대 미술 담론 형성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한국미술협회보다 독자적으로 출발했던 제주도미술협회가 1982년 한국미술협회 등록 후 1996년 한국미술협회제주특별자치도지회로 명칭이 변경 되면서 오히려 자체적 독립성을 잃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결과 협회의 위상과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미술협회는 제주특별자치도미술대전, 제주미술제, 국제교류전, 제주갤러리(인사동) 4) 운영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여전히 제주 미술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제주미술제는 제주 출신이나 혹은 제주에 거주하는 미술가들의 창작의 전모를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제주지역 최대 미술제이다. 이 미술제는 한국미협제주도지회가 주력으로 벌이는 사업이었으나 시대적으로 대중적인 요구에 힘입어 1997년 한국미협제주도지회(지회장 임춘배)와 탐라미술인협의회(회장 고길천)의 적극적인 화합을 결의하면서 미학을 초월하는 독립적인 미술제로 전환했고, 이후 한라미술인협의회, 미협서귀포지부 등이 참여하여 운영위원회를 구성·운영하는 체제로 변환했다. 1997년부터는 탐라미술인협의회, 한라미술인협의회, 미협서귀포지부 등이 참여하여 운영위원회를 구성·운영하는 독립적인 미술제로 전환되었다. 5) 2018년부터 시작된 격년제 개최에서 2023년부터 다시 매년 개최하는 행사로 바뀌면서 평균 80~140명의 참여 미술인에서 도·내외 300여명의 미술인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로 확대되었다. 앞으로 보다 혁신적인 장르의 참여와 대중화 프로그램의 개발, 그리고 내실 있는 국내외 전시로 지속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2. 전문교육기관 설립과 다양한 미술 동인들의 창립과 활동
①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 설립
제주 미술의 본격적인 변화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에 활동한 제2세대 화가들(문기선, 양창보, 강태석, 강광, 김원민, 김택화, 강영호, 고영우, 좌련선, 조석춘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겪은 후 서울에서 전문적으로 수학한 작가들로 제주로 귀향하거나 이주해 제주미술계에 새로운 변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지역에서 중·고교 미술교사로 활동하며 많은 학생을 가르쳤고, 열악한 전시 환경에서도 다방 공간을 활용해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에게 배운 후학들 중 상당수가 현재 제주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개인 미술연구소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제주 미술교육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큰 변화를 맞이했다. 서구 모더니즘(모노크롬 추상, 미니멀아트, 개념미술 등)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구상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제주 미술계에도 이어졌고, 그 변화의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의 신설이다. 1972년 12월 9일 문교부 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1973년 3월,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에 미술교육과가 설치되면서 20명의 입학생 6) 을 선발하여 체계적인 미술교육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는 11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1987년 문교부 설치령에 의해 인문대학 미술학과로 전과하여 오늘에 이른다.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 설립은 1970년대에 불어온 근대적 구상화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와 함께 제주미술계의 화단성립이나 장르 분화의 단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변시지(서양화), 문기선(조각), 양창보(동양화), 부현일(동양화), 강길원(서양화), 허민자(공예) 등 제주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각 장르의 대표 작가들이 당시 재직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했다. 특히, 일본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변시지 교수의 부임은 현대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제주에 불어넣었다. 변시지는 독자적인 화풍을 통해 제주의 풍토를 담은 ‘제주화’를 확립하며, 그의 작품 세계는 한국 미술사에서도 재조명될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의 사례는 진정한 예술은 지역성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가 배출한 졸업생들은 제주 미술계의 질적·양적 발전을 이끌었다. 재학생들은 대학미전과 제주도 미술대전에 출품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졸업 후에는 미술교사로서 교육 현장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백록담전과 같은 교수작품전, 재학생 그룹전, 그리고 전국대학미전 공모전 등에서의 성과는 모두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 설립 이후의 성과이다. 특히, 제주특별자치도미술대전은 재학생들에게 주요 등용문으로 인식되며 대학에서 큰 관심을 두는 공모전으로 관심이 높았다. 7) 올해 50회를 맞이한 제주특별자치도미술대전은 처음 조형예술 장르에서 활동하는 제주도 거주 조형예술가에 한해서 대학생부터 일반인까지 응모할 수 있었던 공모방식에서 벗어나 2019년부터 전국공모제로 바뀌었다.
② 다양한 미술 동인들의 창립
미술사적으로 1970년대에 출범한 다양한 미술 단체들의 활동은 제주미술 변화의 주요 동력이었다. 미술 단체 중에는 1977년 출범한 <관점동인>, <시상작가회>(1978) 8) , <에뜨왈>(1982) 9) 등이 핵심이었다. 특히 관점동인의 창립은 현대미술의 이해와 확대, 우리시대의 아이덴티티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20,30대 젊은 미술인이었던 강광, 강요배, 고영석, 김용환, 백광익, 오석훈, 정광섭 등이 중심이었다. 1990년대에는 <탐라미술인협회>(1993) 10) , <한라미술인협회>(1996)가 설립되어 제주미술계의 지형이 다양화되었고, 이외에도 <제주조각가협회>(1998), <제주도옹기연구회>(1998), <제주판화가협회>(1999) 등의 단체들이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화로운 상호관계보다는 분열과 갈등이 초래했다.
1990년대의 탈중심과 다원주의 대두와 맞물려 제주미술계도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고, 미술계는 다원화되었다. 특히 제주미협이 추구하는 방향과 달리 '미술의 진정성 회복'과 '리얼리즘의 추구'를 명분으로 내세운 <탐라미술인협회>는 ‘맑은 바람’이라는 첫 전시 타이틀처럼 투명한 운영체계를 지향하며 공동체 활동을 중시했고, 4·3 항쟁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진행하며, 제주 미술사의 중요한 한 축을 미술활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4.3은 정치 권력이 빚은 비극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60년 동안 지속적인 항거와 투쟁으로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노력들은 제주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강요배, 김수범, 박경훈, 이명복, 고길천 등이 주축인 <탐라미술인협회>가 주도한 4·3미술이 그 역할을 이어왔다. 해를 거듭할수록 4·3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늘어나는 흐름에서 미술로 시공간을 초월해 제주의 역사를 재해석하며 역사적 진실을 소환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023년 제주현대미술관과 4·3미술제 조직위원회가 공동 주관하여 4·3미술 30년을 돌아본 <기억의 파수>전은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하며, 4·3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평화와 미래를 향한 예술적 연대를 확장하는 자리였다. 또한, 평화예술 활동의 국제적 활성화를 도모하며, 30년간 이어온 제주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전시로 평가받았다.
3. 청년 작가들의 발굴과 활동
1990년대는 지방자치제가 도입되고 제주도가 국제 자유 도시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자율성과 국제화가 강조된 시기이다.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미술 사조가 제주에 유입되었고,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아트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형태가 시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제주도에 영향을 미쳐, 특히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개성과 실험 정신이 강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을 감지한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원이 제주미술의 미래인 젊은 작가들의 창작 의욕 고취와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해 1994년 <제주청년작가전>을 기획운영해왔고, 올해로 30회를 맞이했다. 제주청년작가전은 제주 출신으로 도내외 거주하는 39세 이하 작가 및 제주에 거주하며 6개월 이상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도외 작가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다. 2018년 25회까지는 매년 26-48명에 이르는 다수의 작가들을 선정하여 전시하는 방식에서 2020년부터는 3명을 선정하여 창작지원금(1인당 1,000만 원)과 함께 전시 도록 제작, 1:1 전문미술평론가 매칭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새로운 지원방식으로 변화를 주어 한층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제주청년작가전>과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2014년에 창립된 ‘제주청년미술작가회’이다. 이 단체는 제주 지역 청년 미술인의 창작 활동을 고취하고 협력하며, 권익을 옹호하고 창작 영역을 확장하여 올바른 미술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제주 지역 미술 발전을 위한 전시 기획 및 연구 활동’, ‘미술인의 권익 옹호와 상호 교류 실현’, 그리고 ‘미술의 대중화를 꾀하는 소통 구조의 다각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공립미술관의 역할과 기능 중 제주청년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제주현대미술관이 미술의 본질적 가치를 탐구하며,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신진작가들을 발굴, 육성하기 위한 <뉴라이징 아티스트>전을 2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2020-24년 뉴라이징 아티스트전’에 참여한 제주 출신 작가로 강주현, 김강훈, 김선일, 좌혜선, 박주애, 김승민, 함현영 등이 있다.
4. 관·민주도의 기반시설과 새로운 문화공간 등장
① 관주도의 기반시설 마련과 전시 형식의 다변화
2000년대 이후 제주의 미술은 행정 주도로 조성된 문화공간들이 큰 역할을 하며 발전해왔다. 2001년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조성을 시작으로 문화 인프라 구축이 본격화되었고, 이어 제주현대미술관(2007년 개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2016년 개관), 문화예술공공수장고(2019년 개관) 등 공공기관들이 차례로 들어서며 제주의 문화예술 인프라는 한층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제주도는 지속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다.
서귀포 지역에서는 이중섭미술관(2002년 개관)과 이중섭창작스튜디오(2008년 개관), 소암기념관(2008년 개관)이 들어서면서 전국의 예술가들이 입주를 신청하고, 다양한 연계 전시들이 기획되며 서귀포는 대표적인 예술 거리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이중섭미술관이 위치한 거리는 문화 관광과 쇼핑이 결합된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2021년, 고(故) 이건희 회장이 소장했던 이중섭 작가의 작품 12점이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되면서, 2027년 이중섭미술관 증축 개관을 목표로 한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제주도 공립미술관 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은 2009년에 설립된 제주도립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공공수장고 등 제주시의 미술관 및 시설들을 총괄 관리하며, 주요 행사를 주최하는 상위기관으로서 그 상징성과 역할이 매우 크다. 특히 제주도립미술관 주관으로 개최되어온 제주비엔날레가 올해 4회를 맞이하여, 지역 특성을 잘 살린 국제행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추친 중이다.11)
도시재생 목적으로 공적 투자로 탄생한 공간들도 제주미술의 확장과 변화에 적지 않은 몫을 했다. 제주도는 시골의 빈집을 활용한 빈집 프로젝트사업(2011-2014)을 전개했다. 이후 리모델링 사업의 효용성이 반영된 2012년 ‘문화예술의 거리’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구도심의 빈 가게와 상가를 활성화하자는 사업이 추진되었지만 지향하는 지점까지 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구도심은 1980년대 신제주가 들어서며 쇠퇴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2000년대 들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를 재생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공간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구도심을 아끼는 586세대의 역할이 컸다. 민예총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구도심 활성화를 강조했던 박경훈은 삼도2동 인근을 문화예술지구로 구상하고, 2016년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구)제주대학교 병원을 제주종합문화예술센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주도해 현재의 예술공간 이아를 탄생시켰다. 비슷한 시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가 설립되었고, 서귀포 등지에서 도시 재생에 주력하던 이승택 센터장이 취임하면서 문예재단과 도시재생센터의 주도로 원도심의 탐라문화광장 등 여러 장소에서 오래된 건물들을 보존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로 재생된 산지천 갤러리는 현재 제주 미술인들의 주요 전시가 열리는 핵심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산지천 갤리 옆에 위치한 고씨주택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가옥으로, 제주 전통가옥과 일본식 가옥 양식이 혼합된 이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제주책방’과 사랑방으로 운영되며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이렇듯 제주시 원도심의 문화공간들은 개인전과 그룹전 등 다양한 전시를 통해 미술관보다 유연하게 지역 예술가들에게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2)
② 민간 주도의 뮤지엄과 다양한 전시 공간
2000년대 이후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현상은 민간이 주도한 문화공간이 다수 등장했다는 점이다. 제주에 정착한 화가 이왈종이 설립한 이왈종 미술관(2012년 설립), 피난 화가 홍종명에게 미술을 사사받고 제주 풍경을 독창적인 화풍으로 표현한 제주 작가 김택화의 유작을 모은 김택화미술관(2019년 설립), 그리고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의 김창일 회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아라리오 미술관(2014년 설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아라리오 미술관은 탑동 시네마, 탑동 바이크샵, 동문 모텔1, 동문 모텔2 등 4개의 공간에서 뉴욕이나 런던의 미술관에 견줄만한 컬렉션을 전시하며 제주를 세계 문화 지도에 올렸다. 최근에는 김지환 부회장이 젊은 경영 감각을 발휘하여 원도심에 새로운 문화를 조성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또한,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본태박물관(2012년 설립)과 섭지코지 근처 리조트 단지 내에 위치한 유민미술관(성산포, 2017년 설립)은 여전히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오토피아 내 아름다운 뮤지엄 수.풍.석과 방주교회(2006년 설립)를 설계한 제주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과 예술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이화 관장이 설립한 유동룡미술관은 저지문화지구에 새롭게 들어서며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포도뮤지엄의 개관은 제주섬에 젊은 관람객층을 끌어들이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2000년대 제주의 미술 변화에는 다양한 문화공간의 등장과 더불어 이주한 기획자들이 지역성과 현대미술을 접목한 다양한 프로젝트의 몫도 크다. 김범준 관장과 김연주 큐레이터가 운영하는 문화공간 양(2013년-)은 거로마을의 역사와 지역 주민의 이슈에 호흡하는 작업뿐만 아니라, 국내외 작가와 큐레이터들을 초빙해 레지던시를 운영하며 ‘로컬 큐레이팅’의 모델을 제시했다. 최근에도 다양한 지역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초대전과 기획전으로 이어가고 있다. 박진희 작가가 해안동에 설립한 상상창고 숨(2014년-)은 해안동 지역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전시 등을 진행하며 ‘로컬리티’의 확장을 꾸준히 모색 중이다. 13)
덴마크를 기반삼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로 지난해 11월 덴마크 코펜하겐 현대미술관과 베게트 재단이 매년 선정하는 ‘2023년 올해의 작가’(베켓상)에 선정되고,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 최종후보에 오른 제주출신의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등 국내외 작가들의 주목할만한 전시를 꾸준히 기획하고 있는 안혜경이 만든 아트스페이스 씨(2006-), 그리고 전시기획자며, 비평활동을 겸하고 있는 이나연과 제주의 청년 예술인들이 원도심에 만든 새탕라움(2017년-)은 청년 문화인들이 모여 만든 공간으로, 글로컬 ‘컨템포러리 아트’의 젊은 감각을 선도하며 제주 미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5. 자연 환경 미술의 확장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전시와 디지털 아트가 부상하며, 지속 가능한 예술 실천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제주의 자연과 환경을 주제로 한 에코 아트(Eco Art)가 주목받고 있으며, 환경을 주제로 한 뉴미디어 아트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2021년 제주도립미술관이 기획한 프로젝트 제주 ‘우리 시대에-At the Same Time’은 그 예시이다. 이 전시는 제2회 제주비엔날레가 취소됨에 따라 침체된 지역 문화예술을 활성화하고 도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마련된 대체 행사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제주 미술의 미래 방향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짙은 전시였다.
인류가 미래의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는 마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듯 제주미술은 환경에 대한 각별한 진단과 처방에 예술의 힘을 보태는 창작행위들이 늘어났다. 제주도의 자연 환경을 보존하려는 의식은 제주미술 작품에 한층 강하게 반영되었다. 2022년 제주비엔날레(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가 그랬고, 제주의 환경 문제와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며, 생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들(예: 강술생, 김기대작가)이 꾸준하게 활동 중이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상반된 갈등 속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자연생태보존의 중요성을 철학적 사유로 접근한 이승수의 ‘어디로 가야 하는가’(2020.12.12.-2025.8.31.제주 현대미술관 옆 곶자왈 숲 설치)도 좋은 사례이다. 이처럼 제주 현대미술은 제주의 자연환경 보호와 지역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최근에는 지속 성장 가능한 예술과 지역 정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지역 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공공 예술 프로젝트와 지역 기반 예술 활동을 추진하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제주의 정체성과 문화를 재발견하고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 최근에는 디지털 미디어와 현대 기술을 활용한 작품을 상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인 제주 문화예술공공수장고 미디어영상관이 생겨났다. 미디어영상관운영으로 2021년부터 미술관 소장품을 활용하거나 전시와 연계한 몰입형 실감콘텐츠 제작으로 주목받았고, 올해는 전국공모를 통해 미디어아티스트 6명(팀)을 선정해 새로운 운영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미술관의 사회적 유용성을 키움과 동시에 미술관 브랜딩에도 큰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는데 2024년 선정작가들의 작품이 자연환경과 밀접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운영하는 폐교된 산양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레지던시가 문을 열어, 3기 입주작가의 활동 등 다양한 형식의 전시와 작가 창작 지원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전국의 많은 작가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도 최근의 변화이다.
6. 에필로그
제주 미술은 ‘처절한 고립 속에서 제주만의 독특한 자연환경, 화산섬의 깊은 곳에 켜켜이 스며 있는 제주인의 삶과 뼈아픈 역사의 아픔을 자신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가들의 활동으로 채워진 역사’라는 문장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는 김정희, 변시지, 강요배처럼 시공간을 넘어 제주도에 유배나 이주한 작가들의 작품에 내재된 세계가 제주 섬의 독특한 자연환경의 영향 속에서 변화하고, 그로부터 터득한 조형 세계에서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제주 미술하면 바다, 섬, 돌, 바람, 해녀, 오름, 신화, 유배, 표류, 이주, 항쟁, 평화, 환경 등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떠오른다. 이러한 주제들은 제주 미술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특징처럼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는 표현 소재나 요소에 불과하다. 진정한 제주 미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제주도의 지리적, 역사적 특별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안에 내재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제주의 풍토성을 어떠한 조형 세계로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제주 현대미술 70년 약사를 정리하면서 확인된 한 가지는 제주 미술계가 하나의 거대한 몸통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제주는 유난히 학연, 혈연, 지연으로 얽혀 있어 작가들이 독자적으로 거리 두기가 어려운 구조이다. 그래서인지 제주 미술인들은 절실함보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며, 투쟁적 경쟁보다는 공존과 공생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정서가 강하다.
문화는 사람이 만든다. 제주 미술은 출생지나 현주소에 의한 구분을 넘어 ‘제주의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거나 제주의 미술문화 형성에 기여한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역사이다. 제주로 이주한 예술인들과 제주 미술에 영향을 준 작가들이 늘어나는 제주. 지역 미술이 단순히 미술 작품을 넘어 지역 사회의 역사, 문화,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제주 미술은 제주의 자연, 역사, 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독창적이고 풍부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2024년, 지금. 제주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 제주만의 자연환경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 지역 미술의 문화 가치를 높이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 그 고민의 결과와 변화의 바람을 느껴볼 때이다. 제주의 땅, 제주만의 자연환경에서 피어나는 예술의 꽃은 그 자체로 새로운 가능성의 상징이 될 수 있다.
1차 게재 아트인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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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제주 현대미술의 형성과 변화를 기술한 약사로 제주 미술사와 관련한 연구를 지속해온 김유정, 양은희 두 이론가의 글을 기본으로 삼았다.
2) 이 구분은 설립이나 활동의 시초만 다를 뿐,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제주미술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기술은 과거부터 현재를 포함한 형식을 취했다. 한편으로 제주미술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끈 제주미술인을 세대에 따라 거칠게 구분하면 제1세대는 해방전 일본에 유학한 화가들로 제2세대는 한국 전쟁을 겪은 후 서울에서 수학한 60년대 활동했던 세대들로 양분할 수 있다. 여기에 80년대를 주도한 화가들로부터 현재까지 제주미술계에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세대를 포함한 동시대 작가들을 제3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3) 예를 들어, 구대일에게 관심이 많았던 고영만은 1954년 제주시 은파다방에서 열린 구대일의 서양화 개인전과 1955년 9월 15일 남궁다방에서 열린 파스텔전을 보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독학으로 자신의 화풍을 추구하고 있다. 제주도립미술관 기획전시실 2(2층)에서 2024.8.6.-11.3.까지 ‘제주 작가 마씀’ 시리즈로 《고영만이 걸어온 길》전(展)이 개최된다. ‘제주 작가 마씀’은 ‘제주 작가입니다’라는 의미의 제주어로, 제주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공헌한 원로・중견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제주미술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전시 시리즈이다.
4) 제주갤러리는 2020년부터 서울 인사동(인사아트센터)에 제주미술가들의 수도권 진출을 목표로 공간을 임대하여 운영하는 전시장이다. 주로 공모형식으로 작가를 선정하여 작가와 작품세계를 알리고 홍보하는데 주력한다. 전시의 성과나 효과를 떠나 공모에 참여한 작가들은 제주미술을 수도권에 알리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5) 김유정, 「제주미협 60년사로 돌아본 제주 현대미술-1955년 제주미협 창립이후 현재까지 제주미술계의 현황과 방향」,다시,바로, 함께, 제주미술바로보기 세미나, 예술경영지원센터, 제주도립 제주현대미술관 개최 세미나 발표집,p.2-9.참조 재정리.
6)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 1회 졸업생: 고재만, 김병화(작고), 김병희, 박영진, 오석훈, 강동언, 최온자, 김인선, 김철민, 김효순, 양복순, 이세철, 고미순, 문희경, 이영진, 조인득, 이기정, 한영자, 현금자, 김명희 등 20명.
7) 김유정, 앞의 발표집. p.8.
8) 미술동호인 유대강화, 제주지역의 문화예술홍보, 실험의지표출로 현대미술의 현위치 가늠, 지방과의 유대를 통한 지역미술의 가치인식에 기여.(강부언,김성찬,김영중,박성배,양승우,양영근,이승현,임수병,현익찬. 이상 창립회원)
9) 여성미술그룹, 제주도 미술문화활성화일익담당 및 미술계의 발전적방향에 역량발휘. 제26회 신고 미술동문으로 작품발표와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후배 영입을 통해 회원확대. 지속적 활동.(강신영,고경희,김연숙,백희삼,이경효,이상열,양은주,현경희,홍진숙. 이상 창립회원)
10) 강동균, 강요배, 강문석, 고경화, 고길천, 고혁진, 김수범, 김영훈, 김영화, 박경훈, 박소연, 박진희, 서성봉, 송맥석, 양동규, 양미경, 양천우, 오석훈, 오은희, 오현림, 이경재, 이명복, 이종후, 이준규, 정용성, 조이영, 최소형, 한항선, 홍덕표 이상 2019탐라미술인협회 주제전 <할로영산> 2019.9.18.-29. 예술공간 이아갤러리 참여작가 기준.
11) 도립미술관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성이 결여된 운영 시스템이다. BTL 사업으로 설립된 시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점이 드러나며 발전을 저해하고, 특히 2017년에 시작된 제주비엔날레는 안정된 운영 시스템 없이 도립미술관이 주관하는 행사처럼 진행되면서, 그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이에 따라 도립미술관의 본연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안정된 운영체계 없이 의지에만 의존하는 행정적 판단은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제주비엔날레가 국내외적으로 제주 미술의 확장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끄는 국제적 행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운영 시스템의 구축이 절실하다.
12) 양은희,「2000년대 이후 제주 미술계의 흐름과 방향-제주 전시공간의 변천을 통해서 본 제주미술의 현주소」,다시,바로, 함께, 제주미술바로보기 세미나, 예술경영지원센터, 제주도립 제주현대미술관 개최 세미나 발표집,pp.17-20. 참조.
13) 양은희,앞의 세미나 발표집,pp.17-20. 참조 재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