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희의 제주- 자연과 동화되는 삶, 그 상상 낙원의 세계 1)



변종필 | 제주현대미술관장

1.
화가 김보희에게 제주 그리기는 삶이 된 지 오래다. 2003년,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마을의 조용한 곳,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터에 작업실을 짓고, 주변에 온갖 식물을 심어 지금의 정원이 완성되기까지 일상은 늘 자연과 함께였다. 귤나무, 워싱턴야자, 카나리아야자, 월계수, 고무나무, 로즈마리, 셀륨, 소철, 용설란, 보검선인장, 그리고 다양한 씨앗과 수많은 꽃까지 매일같이 마주하는 모든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 
김보희의 작업세계에서 제주 시기는 풍경을 대하는 시각적 태도와 새로운 조형 언어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한마디로 김보희식 풍경화를 구축한 시기이다.
김보희의 제주 풍경은 크게 정원풍경, 바다풍경, 중문풍경으로 나눌 수 있다. 내륙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식물로 가득한 정원풍경, 하늘과 바다로 화면을 이등분한 수평선이 시선을 빨아들이는 바다풍경, 외국 도시의 어떤 시간을 잘라낸 듯한 중문풍경으로 대변된다. 세 가지 풍경모두 우리 내륙지방의 일상에서는 쉽게 마주하기 힘든 풍경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 앞에서 서면, 이국적이고 감성적인 풍경이 때때로는 어디선가 경험한 듯한 감정을 소환하면서 쉽게 마음을 열고 그림을 감상하게 만든다. 2)

김보희 그림에서 <The Days 3) >, <TOWARDS 4)>와 같은 대표성을 지닌 제목에는 그가 표현하고 싶은 세상, 그림에 담고 싶은 작가의 이상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림의 제목이 갖는 느낌과 그림으로 표현된 이미지 사이에는 바로 화가가 보냈던 숱한 날의 세상이 존재한다. 자연을 대할수록, 제주를 알아갈수록 겹겹이 쌓이던 감정과 사랑이 충만한 날들이다. 그 감정과 사랑의 날들이 그림으로 남고,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림 속 풍경 중 이제는 사라지거나 모양이 바뀌었어도 작가는 여전히 제주의 풍광에 감동했던 그 날들을 기억한다. 자연 앞에 감동했던 순간, 그 감정의 기억과 추억들이 자신만의 색과 조형의 그림으로 오롯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보희의 그림은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독자적이고 지적인 회화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볼수록 빠져드는 흥미로움이 가득하다. ‘상식을 깨는 독특한 화면구성’,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들의 밀회’, ‘프리즘을 통과한 듯한 오묘한 색감’, ‘세상을 감싸듯 표현된 커다란 잎들’, ‘우주 행성 같은 씨앗 5) ’ 등 제주 이전의 풍경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회화적 즐거움이 작품마다 스며있다. 조금만 집중하면 하나 둘씩 보이는 회화적 즐거움은 시점, 재료, 색, 작품의 규모(scale) 등 그만의 독특한 조형요소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2. 
김보희의 그림 속 자연을 보면 고갱과 루소,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 자연을 사랑하는 감정이 애초에 다른 김보희만의 풍경을 느끼는 순간 금세 그들의 자연과는 엄격히 다른 김보희만의 자연을 지각하게 된다. 동시에 현실의 자연을 다시 보게 만든다.
김보희의 제주 시기는 풍경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 제주 시기 이전에도 자연을 사실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진 않았지만, 전통 산수화풍의 시점과 시각의 접근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제주 시기에 자연풍경을 마주하는 태도를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시각(時角)과 시점(視點)의 변화로 이어졌다. 제주 시기 이전의 그림에서는 자연 풍경을 멀리서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시점이 주를 이뤘다. 반면, 제주 시기에는 자연을 최대한 가까이 대면(對面)하면서 표현방식에서의 시각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제주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The Days>(27pcs, 2011-2014)나 <THE TERRACE>(8pcs, 2019)와 같은 규모가 큰 작품에서 확연히 감지된다. 6)
  이 두 그림은 서양화의 원근법이나 동양화의 삼원법과 다른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한 지점에서 형성된 시각-소실점이 발생하는-에 근거한 그리기가 아닌 풍경을 일정한 단위로 끊어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한다. 전체화면을 하나의 연결된 풍경으로 구성하되 개별 그림(캔버스)마다 표현대상을 최대한 눈앞으로 끌어당겨 그리는 방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화가가 눈 앞에 펼쳐진 자연 안으로 들어가 그리는 방식이다. ‘정면적 다시점(多視點)’을 한 화면에 구현하고 대상을 끌어당김으로써 화면의 평면성이 두드러지게 했다. 제주 시기 작품의 가장 큰 시각적 변화이다. 
새로운 정면적 다시점의 제시와 함께 김보희식 화풍의 특징은 색채와 그 표현방식에서 한층 뚜렷해진다. 자신의 그림을 ‘채색화가 아니라 그저 색채가 있는 풍경화’라고 밝혔듯이 김보희 그림은 자연의 색을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의 자연성(본성, 원형)은 초록색과 파란색에서 시작된다. 식물의 초록색과 바다의 파란색으로 크게 양분되는데 두 색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세밀하다. 그의 그림 속 색에서는 시간, 계절, 온도, 무게가 느껴진다. 초록 7) 은 촉촉하고 적당한 온도에 안정감을, 파랑은 차갑고 신선하며 평온함을 준다. 계절에 따른 색의 변화는 자연에서 가장 쉽게 감지된다. 봄-여름-가을의 계절감이 개별 작품으로 표현되지만, 대작에서는 계절이 동시에 표현된다. 그림 속 시간은 어느 하루이거나 1년 365일 마주하는(혹은 마주하고 싶은) 날들일 수 있다. 제주 풍경에서 받은 자연의 생명과 감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적절한 색으로 조율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표현은 중문풍경과 바다풍경의 작품들에도 드러난다. 특히 중문풍경 시리즈는 색채의 변화로만 시간의 흐름을 낄 수 있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풍경은 비현실적 자연 색채로 이국적 느낌을 배가시킨다. 
김보희의 그림은 재료와 기법의 특성상 스며듦이 특징이다. 유화물감이 덧칠되어 표면에 물감층을 이루는 서양화의 마티에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감이다. 반복 중첩으로 색을 올려도 스며들 듯 깊이가 있다. 채색이 가볍지 않고, 진중하며, 과하지 않다. 동양적 재료(물감)의 특성을 잘 살린 선택과 기법의 효과이다. 매끄럽거나 윤기가 나는 질감보다 전체적으로 매트한 느낌의 질감이 캔버스나 천 속으로 배어들어 깊이와 무게를 더했다. 색의 농도, 중첩의 정도에 따라 깊이감이 다르다. 그의 그림은 채색과 더불어 먹선의 강약으로 사물의 명료성과 그림의 분위기를 조율한다. 외곽선의 적절한 사용으로 빛의 변화, 계절감, 시간성, 생명력, 깊이와 무게감 등을 전달한다. 먹선을 생략하거나 절제한 풍경은 상큼한 파스텔화와 같은 분위기로 시간의 흐름과 계절감을 느끼게 한다. 이때의 색감은 어딘지 몽환적이다. 프리즘에 분산된 색을 갈무리해 화가가 원하는 절대적인 색으로 다시 정제한 색감이랄까. 마치 눈에 보인 풍경을 마음속에 이미지로 담고 있던 색감 같다. 시선을 따라 몸마저 빠져들 듯한 색(특히 바다그림)의 평온함이 감상자를 명상의 공간으로 이끈다. <OVER THE TREES>(2019) 시리즈와 <TOWARDS> 시리즈의 식물풍경과 바다풍경에서는 색과 선의 사용에 따라 그림의 전체적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김보희의 섬세함과 일관된 창작활동에서 성취한 조형 언어가 제주의 풍경과 만나 독창적 화풍으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가능케 한다. 한지나 천(Fabric) 대신 캔버스를 선택한 것도 대작의 용이성, 표현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고민한 결정이다. 특별히 캔버스의 뒷면을 사용할 때 한지나 천과는 다른 효과를 탐구하고, 채색에서도 분채와 동양화물감을 고집하여 한국화 특유의 색감을 발산하는 데 역량을 모았다. 이처럼 김보희는 인물과 동물, 자연풍경을 충실하게 묘사해 재현하던 동양화법에서 벗어나, 장르의 준칙이나 범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었다.

3.
김보희 작가하면 떠오르는 특징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작품의 규모이다. 그는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를 이어 그린 대형작품 연작을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김보희의 작품 중 자연 풍경을 확대한 그림들은 단순히 규모적으로 미적 가치의 확대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내용의 공간적 확장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짙다. 2년 반 만에 완성한 27개의 캔버스를 이어 그린 <The Days>는 제주 곳곳의 자연에서 받은 영감과 상상력이 결합된 ‘화가의 정원’으로 거대한 비밀의 정원을 가꾸듯 하나씩 공간을 확장해간 느낌이다. <The Days>는 하나씩 떼어놓으면 소재별 개별 작품처럼 어느 부분을 확대한 듯한 그림이다. 그렇게 하나씩 완성한 그림을 큰 벽면에 모으면 퍼즐이 맞춰지듯 거대한 정원그림이 된다. <THE TERRACE>, <TOWARDS>(4pcs, 2013), <TOWARDS>(3pcs, 2011)와 같은 대작들도 내용과 형식에서 같은 갈래에 속한다. 분할형식으로 자연을 확장하는 표현방식은 김보희의 자연 해석과 그림에 담고자 하는 내용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연출적 구성이다.8)
 실제 화가의 의도대로 대작은 그림 속 몰입감이 크다. 그의 대작들은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경으로 가득한 낙원 같은 그림이다. 그림 속 풍경은 성격상으로나 시간상으로 공존할 수 없는 동식물들이 함께 공생한다. 이는 김보희 화가가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로 인간(자신)과 동·식물이 커다란 화면에서 평화롭게 어울려 공생 공존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함이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온갖 생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그 순간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9) 
 에덴동산 같은 유토피아는 비현실의 존재지만, 아름다운 원초적 자연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이상향의 꿈을 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리고 화가는 이러한 꿈을 그릴 수 있는 존재이다. 김보희는 대작을 통해 그만의 정원, 자신만의 지상낙원을 그린다. 
바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김보희의 바다 그림은 조용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에 눈길을 붙들린다. 그러다 문득 무한한 자연 풍경에서 느껴지는 극단의 감정(고독, 외로움, 슬픔)이 물결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그의 바다는 심한 폭풍우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의 제주 바다와 다르다. 그저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의 잔물결이 한없이 평화롭다. 수많은 색 점들을 하나씩 찍어 표현한 김보희 바다 그림은 애초에 바다를 한 폭의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바다풍경 시리즈의 경우는 시각적으로 상하는 면-하늘과 바다-으로 확장하고, 좌우는 선-수평선-으로 확장한다. 액자프레임 없는 좌우 수평선은 무한대로 확장하며 끝없는 바다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 자체로 거대한 규모,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살펴본대로 김보희는 제주에서 보낸 세월 동안 새로운 시각적 태도와 독자적 조형 언어의 시도들로 제주 풍경을 그려냈다. 자연은 각각 자신의 싹을 틔우고, 각자의 속도로 자란다. 그렇게 자연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자연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도 그 본질과 속성을 잃지 않는 것처럼 김보희는 20여 년간 서두르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끊임없는 조형 탐구로 유례없는 화풍의 정원과 바다를 창조해 내고 있다. 
김보희의 제주 그리기의 조형적 특징은 ‘관조적 시각에서 관찰적 시각’, ‘정면적 다시점에 따른 평면적 화면구성’, ‘실재와 이상적 풍경의 조합’, ‘자연색을 품은 색감’, ‘규모와 공간 확장을 이용한 연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제주 시기 일군 독자적이고 지적인 김보희 화가의 그림은 자연 풍경이 어떻게 문학적 감성이 가득한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더하여 아련하거나 몽환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면서도 회화의 조형 탐구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있다. 화가 김보희의 작품이 지닌 힘이다. 
화가 김보희는 수십 년전 신혼여행으로 제주에 왔을 때 제주의 자연에 흠뻑 빠져 제주에서 그림 그리며 평생 살고 싶다던 그 꿈을 이뤘다. 상상의 낙원을 그려온 그의 삶은 그 자체로 꿈의 실현이다. 
‘그의 자연에 대한 탐구는 교육의 현장을 떠나면서 더욱 집중될 것이다.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기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계기가 될 것이며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예단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10) 라고 했던 오광수 평론가의 말처럼 김보희의 자연에 탐구는 제주의 자연을 품은 채 끝없는 자신만의 여행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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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퍼블릭아트(2022. 5월호) 김보희 「제주풍경-정원과 바다」 기고 글을 바탕으로 했다. 기고 당시 분량상 실지 못한 부분을 첨언하고, 이번 ‘the Days’전시와 연관된 부분은 가능한 주로 처리하여 원본 글의 흐름을 유지하고자 했다.   
  
2) 김보희 화가의 제주풍경 그림은 곶자왈의 생태와 같은 제주의 속살을 표현한 그림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애초에 제주를 동경하게 된 화가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2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자신만의 제주 그리기에 몰입한 작가의 태도에 깊이 매료된다. 과거 제주는 역사적으로 아픈 섬이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받는 치유의 섬이 되었다. 오랜 시간 제주를 치유의 장소로 생각해온 화가 역시 제주의 자연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행복을 느끼고, 제주 섬을 국내 유일한 지상낙원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상 이상향을 향한 지속적인 표현은 이미 작품 제목에서부터 감지된다. 

3) 전시 제목 ‘the Days’는 ‘우리가 지내 온 그날들, 지금 만나는 나날들로서 어떤 존재들의 특별한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 각자에게 의미 있는 그날들’을 상징한다. 

4) ‘…에 대하여, …을 향하여, …을 위하여, …쪽으로, 무렵’ 등의 뜻을 지닌 단어에는 김보희 화가의 이샹향. 황혼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듯,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세계의 지향점이 담겨있다. 그가 꿈꾸는 이상향은 자연과 인간, 동물이 함께 공생 공존하는 사랑으로 가득한 지상낙원과 같은 세계이다. 

5) 2016년부터 씨앗, 싹과 열매 등을 클로즈업해서 그린 'The Seeds' 시리즈는 넉넉한 여백과 함께 생명의 시작이라는 상징성(희망)을 품고 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식물의 특징들을 커다란 확대기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표현했다. 확대한 거대 씨앗 그림들은 생김새부터 독특하다. 우주 행성 같은 씨앗, 무늬가 있는 갑옷을 두른 듯한 타원형 씨앗, 분홍색 망사스타킹을 씌운 듯한 씨앗, 꿈틀대는 촉수 같은 것을 지닌 씨앗 등 각양각색이다. 작은 씨앗을 크게 확대하여, 하나하나 독립성 강한 생명체 원형들을 상징한다. 'The Seeds' 시리즈는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씨앗들로 세상어딘가에는 비슷한 씨앗들이 존재할 것 같다. 식물의 특정 부분이나 꽃을 확대한 그림들과 비견할만하다. 이번 제주현대미술관 전시에서는 <TOWARDS>(2017)와 <The Seeds>(2020) 평면작품 이미지를 처음 입체작품으로 제작했다. 평면에 머물던 새싹 이미지를 세상 밖으로 꺼내 자연과 교감(조화)을 시도한 첫 행위로 10여 년 전부터 씨앗 이미지를 입체화하고 싶었던 작가 욕망의 실현이다. 평면회화와 달리 곡면 돌출부위 한 면, 한 면을 색으로 다듬는 과정은 그동안 익숙했던 회화표현 방식과 다르다. 3미터 높이(295(h)×188×186cm)의 타원형 입체와 84(h)×90×90cm 크기의 둥근 입체, 동양화물감이 아닌 채색재료, 특히 몸에 습관처럼 배어있는 익숙한 표현방식이 아니라 안 쓰던 근육까지 써가며 작업 해야 하는 육체적 노동까지 전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처럼 화가에게는 녹녹하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그 결과물을 대하는 타자(관람객)에게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자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커다란 타원형 씨앗은 그 자체로 풍파를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씨앗을 상징한다.

6) 이는 제주현대미술관 ‘the Days’ 전시에서 100호 크기 캔버스 12개를 이어 그린 대표작 <The Days>에서도 명증하게 드러난다.

7) 초록은 사랑이란 단어처럼, 의미가 넓고 깊다. 생명이 잉태되고, 싹틔우고, 자라서 죽기까지 생명력 있는 자연은 내내 초록(녹색)을 잃지 않는다. 초록은 생명이다. 김보희 그림의 자연성은 초록에서부터 시작된다.

8) 12개 캔버스를 한 화면으로 이어 그린 <The Days>는 화면구성과 크기, 소재와 내용 등 모든 것이 제주현대미술관만의 독특한 전시공간에 어울리도록 제작되었다. 제주현대미술관의 ‘the Days’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은 그림으로 각별하고, 의미 있는 대작이다.  

9) 전시를 준비과정에서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작가가 굳이 밝히지 않았을 뿐 상당수의 작품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삶에 대한 감사함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시간을 꿈꾸다’ 섹션에 전시한 작품들 중 하나님의 은총을 빛으로 표현하거나, 특별한 기념일을 포함한 365일, 하루하루 소중했던 시간을 감사와 사랑을 담아 일기처럼 표현한 그림들에서 충분히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10) 오광수, 「서문-김보희 교수의 정년기념 화집출간에」,『김보희』 월간미술, 2017,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