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리


큐레이터와 전시기획자는 다르다. 이 문장이 미술계에 제 자리를 잡기까지 짧지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어쩌면 홍윤리의 미술관 생활 25년과 비슷한 시간일 것이다. 홍윤리는 미술관의 학예연구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해오면서 연구자 정체성을 정립해온 큐레이터다. 그의 업력은 전시와 학술, 교육, 소장품 수집 및 관리, 홍보, 아카이브, 출판, 정책 등 거의 모든 것에 걸쳐있다. 전시에 비해 부대행사 취급받는 미술관 포럼과 아카데미, 학술세미나, 교육프로그램 등을 기획하는 정성과 솜씨 또한 베테랑다운 성숙함이 배어있다. 이렇듯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면서 얻을 수 있는 광폭 시야는 그를 더욱 단단한 시니어 큐레이터로 자리잡게 했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해온 25년 시간동안 그는 50여회의 전시 기획을 담당했다. 그는 하정웅청년미술상 수상작가 전시들을 기획하면서 청년에서 중견으로 함께 성장했다. 〈오월_1980년대 광주민중미술〉(2013) 전시는 5·18 광주항쟁과 연관한 민중미술 연구의 밑돌 역할을 했다. 〈김환기전〉(2013), 〈김창열전〉(2014), 〈아산 조방원전〉(2017), 〈신학철전〉(2024) 등 한국 근현대 미술가 초대전들을 통하여 대가들의 세계를 만나고 그것을 전시로 풀어내어 대중과 만나게 하는 일들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렇듯 큐레이터 홍윤리의 안정감은 전시기획력에서 나온다. 

전시 만드는 일의 뿌리에 자료 만드는 일을 두고 있다는 점은 홍윤리의 큰 장점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아카이브 프로젝트’(2015–2017)를 통하여 그는 미술관의 아카이브 수집과 관리 체계를 정립하면서, 미술박물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접근했다. 그는 광주전남미술사의 주요작가와 단체들을 기록하기 위한 구술채록연구 기획을 시작했다. 조사와 발굴을 지향하는 연구자로서 태도가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근년에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근무한 그는 미술 관점에서 보았던 광주항쟁을 실물기록으로 다시 만났다. 그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오월미술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었다.

‘점화 연작을 베짜기 작업과 같다’고 한 김환기의 말처럼, 그는 미술사 연구자로서 한땀 한땀 자료를 찾고 다듬어서 웅장한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쳐 미술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새로운 인지를 생성하는 작업을 한다. 그것은 연구 논문이나 전시와 같은 결과로 나타난다. 결국 연구와 전시의 상호연결고리는 작품 수집과 아카이브를 통하여 한층 단단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오랜 시간 실무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순환의 고리에 익숙해진 홍윤리는 이렇게 미술박물관인으로 자리잡고 자라왔다.

조사와 연구 기반의 큐레이터 활동에 천착해온 홍윤리는 학술논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해왔다. 그는 「오지호의 〈남향집〉 연구」(2014),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대한 연구」(2021), 「천경자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작품에 관한 연구」(2019), “1980년대 광주 민중미술에 대한 연구”(2019), “재외 미술인들을 통해 본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표상”(2020) 등 탄탄한 학술논문 20여편을 발표했다. 공공미술관 종사자 가운데 이 정도로 열정적인 학술활동 이력을 가진 큐레이터를 발견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의 연구논문들은 오지호 작 〈남향집〉의 제작년도에 대한 재검토와 같이 파격적인 것을 비롯해서, 공공미술관의 조직구성, 공공미술, 민중미술운동 단체, 해방기 조선미술동맹 등 미술 제도 단체 연구를 비롯해서 김환기, 천경자, 오지오 등의 근대미술가들, 오윤, 신학철, 이응노 등의 민중미술가들, 전화황, 조양규 등 디아스포라 미술가들 등에 걸쳐있다. 연구자 정체성을 몸에 지니고 사는 홍윤리는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아사아문화중심도시조성지원포럼,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유럽문화예술학회, 무등역사연구회 등의 학술단체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립미술관에 재직 중인 학예연구사는 ‘직종은 연구사지만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홍윤리가 힘겹게 일궈온 학술활동의 무게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대한민국에 큐레이터는 많지만 학술논문 쓰는 큐레이터는 흔치않다. 

홍윤리는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찾아 발굴하고 기록하고 연구하고 전시하는 일을 반복해왔다. 예술작품을 통하여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더듬으며 배우고 밝히는 일을 통하여 그는 근현대미술사 영역의 연구자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연구는 예술가들이 ‘어떤 시대와 삶을 살아내는지’에 대한 삶의 탐구이자, 그 삶의 경험을 ‘어떻게 예술로 표현했는지’에 대한 작품의 탐구이다. 이렇듯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찾아나선 홍윤리의 탐구생활을 어느덧 자신의 삶과 일에 깊이 스며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큐레이터 홍윤리정신의 핵심은 연구와 전시를 통하여 자신과 광주, 전남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탐구정신에 있다.

그는 자신의 주의/주장을 세우고 펼칠 겨를도 없이 미술관 직원으로 내달아왔다. 전시와 연구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글을 묶은 책도 한 권 없이 살아왔다. 학인으로의 완결성을 향해 그는 단행본 출판의 과제를 안고 있다. 더 큰 숙제도 있다. 광주전남미술사 연구다. 예향의 도시라는 탄탄한 역사성에 광주항쟁이라는 K-민주주의의 도시 광주의 민주인권평화 정신성을 지난 광주전남에서 자라나서 꽃피운 미술을 연구하는 일은 그에게 필생의 과제다. 공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윤리의 새로운 25년이 더욱 알찬 지식인의 삶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이다. 


- 홍윤리(1973-) 전남대 미술교육과 학사, 동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2001년부터 현재까지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재직, 뉴욕주립대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방문학자(2016),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연구이사. 오지호, 김환기, 천경자 오월미술, 디아스포라미술 등에 관한 20여편의 학술논문 발표. 김환기, 김창열, 오월미술, 신학철 등 50여회 전시 기획. 미국 알재단 학술상(2021), 박물관미술관 유공 국무총리상(2023)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