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파울루비엔날레와 한국미술의 국제적 위상 

김영호 | 중앙대 명예교수, 미술사가


1. 서언

  이 글의 논점을 미리 말하자면 비엔날레는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라는 것이다. 비엔날레란 특정 집단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장치이자, 그 장치에 자국의 특수한 문화적 유산을 연동시켜 다채로운 이익을 구현하는 미술 기관이라는 말이다. 비엔날레의 원조인 베니스비엔날레는 탄생에서부터 정치적 이슈를 품고 있었다. 1894년 4월 6일, 당시 베니스 시장이자 베니스비엔날레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리카르도 셀바티코(Riccardo Selvatico)는 이 미술 기관에 부여된 임무가 다음의 두 영역, 즉 “지적 능력의 편견 없는 개발(unbiased development of the intellect)”과 “만인의 형제애적 유대(fraternal association of all peoples)”에 있다고 선언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던 프랑스대혁명의 이념과 다르지 않은 대목이다. 세월이 흐르며 세계 각국으로 확산된 비엔날레는 점차 경제, 사회, 외교, 교육, 관광의 전 분야에 걸쳐 전략적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행사로 진화해 왔다. 비엔날레를 둘러싼 정치적 기능은 130여 년을 지속해 온 비엔날레의 역사를 이해케 하는 요인이자 비엔날레의 존립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참고 : 김영호, ‘비엔날레;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실험실’, 『현대미술학논문집』, 제21권 1호, 현대미술학회, 2017, pp.113-149)

문화적 헤게모니 경쟁은 비엔날레와 비엔날레 사이에도 나타나지만, 특정 비엔날레의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국가관 전시’와 ‘수상 제도’는 이러한 경쟁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문화적 헤게모니 경쟁은 부정적인 결과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국가론은 비엔날레의 정치적 해석에 도움을 준다. 그는 국가를 운영하는 장치를 ‘억압적 국가 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 구분하고 이 두 기구가 국가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억압적 국가 기구는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과 같이 명시적인 폭력이나 강제력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며,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학교, 종교기관, 언론, 문화기관 등과 같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개인 의식을 형성하고 사회질서를 내면화하는 기관이다.(참고 :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Etat)’, 1970)  

문화적 기관으로서 비엔날레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의 하나로 작동해 왔다. 비엔날레가 어떻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국민들에게 내면화하고 이를 통해 국가 질서를 공고히 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다양한 인종과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적 현대미술제로서 비엔날레는 문화정치의 실험실(Lab of Cultural Politics)이다. ‘비엔날레가 문화정치의 생동감이 넘치는 하나의 쇼설미디어가 되지 못하면 단순히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어느 비엔날레 전문가의 말은 유의미하다. 이러한 탐구의 논점은 1995년 태어난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분석에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창설한 브라질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 비서구권 최대의 비엔날레에 참가한 한국과 한국 작가들의 대응 방식을 일견하는 것으로 범위를 제한하려고 한다. 시기적 범주도 ‘세계화 시대의 비엔날레’가 탄생하기 이전인 1970년대 까지의 상황을 중심으로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라는 범주 아래, 우리나라 작가들이 참여했던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파리비엔날레 그리고 도쿄비엔날레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상파울루비엔날레의 탄생

  1951년에 창립된 상파울루비엔날레는 비서구권에서 열리는 최대의 미술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서구권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창립 당시 조직과 운영방식은 참가 국가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베니스비엔날레의 ‘국가관 전시’와 ‘수상 제도’를 모델로 삼았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탄생을 주도했던 시실로 마타라초(Cicillo Matarazzo)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사업가로 브라질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1948년 베니스비엔날레를 방문한 그는 이 국제적인 행사에 감명을 받고 브라질에도 유사한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브라질 미술계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근대미술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는 비엔날레가 이러한 미술계의 변화를 촉진하고 상파울루를 국제적인 문화도시로 이끄는 견인차가 될 것을 확신하고 이 국가적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이름을 딴 이비라푸에라 공원 내의 시실로 마타라초 파빌리온은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주요 전시공간이자 창립자의 업적에 대한 비엔날레 재단 측의 화답으로 남아 있다.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위상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0년을 단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발견된다. 창립 시기인 1950년대의 상파울루비엔날레는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을 남아메리카 지역에 전파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실행했다. 1960년대가 지나면서 국가관 전시에 대한 논쟁과 군부 독재의 정치적 편견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동시대 작가들을 소개하며 모더니즘 미술을 넘어 팝아트가 주류 미술계에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 이르면 제14회 행사부터 제도 개혁으로 국가관 전시 운영방식이 폐지되고 주제나 경향에 따라 작품들을 전시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변화의 배경은 미술이 군부 독재의 정치적 도구화에 대한 비판과 예술의 자율성 확보였다. 이후 국가관 전시 시스템이 부분적으로 부활하기도 했지만 1977년의 개혁은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는 남미지역의 민주화를 둘러싼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현대미술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시도하며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와서는 세계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며 서구중심의 문화구조를 극복하고 자국 문화의 화합을 추구하려는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획득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 시기의 국가별 참여 방식은 각국이 자율적으로 선정한 커미셔너들에게 당해 비엔날레가 정한 주제에 부응하는 작가를 선정하고 그들의 작품을 오픈 부스로 전시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참고 : 김영호,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카니발리즘으로 배양된 브라질문화의 정체성', 『가나아트』 가을호, 1998 / 김영호,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문화식인주의로 조명한 현대미술', 『월간미술』 11월호, 1998 / 김영호,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역사와 문화의 공존, 복합문화주의에 대한 실천의지', 『미술세계』 11월호, 1998) 

상파울루비엔날레가 서구 중심의 베니스비엔날레에 대응하는 제3문화권의 대항적 행사로 부각된 것은 지구촌의 정치적 환경을 바꾼 1980년대 후반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를 분기점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후 진행되는 비서구권 지역의 부상과 그에 따른 신생 비엔날레의 증가 현상이 전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1990년대가 진행되는 동안 아시아지역 비엔날레의 증가는 전래적 비엔날레의 역할을 변화시키는 한편 비엔날레를 둘러싸고 ‘중심주의와 패권주의’, ‘탈중심주의와 복합문화주의’,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 따위의 이데올로기 담론과 더불어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 다툼은 점차 대륙과 국가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 내부의 지방과 기관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상파울루비엔날레는 환경 문제,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갈등 등 동시대의 주요 이슈들을 다루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미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국제적인 담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전시 운영 방식도 국가관 시스템을 접고 국가별 커미셔너의 도움 없이 주최측에서 당해 년도의 주제에 부응하는 작가를 직접 초청하는 일반적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 김영호, ‘비엔날레 이데올로기’,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1호, 현대미술학회, 2007, pp.7-45). 

3. 모더니즘 시대의 비엔날레들

  1950년대에 시작된 비엔날레의 확산은 상파울루비엔날레(1951년 창립)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도쿄비엔날레(1952년 창립)와 카셀 도큐멘타(1955년 창립) 그리고 파리비엔날레(1959년 창립)등이 이 시기에 태동된 국제적 현대미술제였다. 

파리비엔날레는 예술의 패권을 위협하는 뉴욕에 맞서 문화예술 중심지의 위상을 고수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자, 유럽과 미국에서 전후의 냉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며 재편되는 정치적 질서에 대한 대응적 시도였다. 드골 정부의 파리비엔날레에 나타난 ‘정치적 연대와 문화적 헤게모니의 각축전’은 파리비엔날레가 동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이르는 국가들을 포괄적으로 초청한 사실과 미국에 대한 경계와 견제가 노골화되었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파리비엔날레는 참가자들의 연령을 20세-35세로 제한하는 청년 비엔날레라는 특성을 살렸다. 한국 작가들의 참여는 제2회 파리비엔날레의 김창열, 장성순, 정창섭, 조용익, 1963년 제3회의 김봉태, 박서보, 윤명로, 최기원 등을 비롯해 1982년 제12회 행사에 이르기까지 총 11회의 행사에 참여했다. 파리비엔날레는 점차 관람객 수가 줄어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1985년 14회 행사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파리비엔날레 역대 참가 작가 명단을 보면 정상화, 하종현, 김종학, 최만린, 김구림, 이승택, 이우환, 이건용, 이강소, 박현기 등이 있다.  

도쿄비엔날레는 아시아 최초의 비엔날레이자 동북아시아 국가 중 근대화의 수용에 가장 빠른 행보를 취한 일본이 창설한 비엔날레였다. 일간지 신문사 메이니치(Mainich News Paper Co.)에 의해 설립되었고 창설연도를 기준 하면 세계랭킹 3위에 속한다. 이차대전의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패전국 일본이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으로 기능하며 1990년 18회를 마지막으로 개최한 후 문을 닫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도쿄비엔날레가 국제적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제10회 행사로 알려진다.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유수케 나카하라(Yusuke Nakahara)는 하랄트 제만이 1969년 베른미술관에서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 Form)’의 참여작가 대부분을 소개하면서 동시대 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도쿄비엔날레가 국내외 미술계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관 전시와 수상제도를 모델로 삼고 있던 베니스와 상파울루비엔날레의 방식에서 벗어나, 당시에 전개되기 시작한 일본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서 모노하, 구타이와 국제적 예술운동으로서 아르테 포베라, 개념미술, 프로세스 아트 등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작가가 도쿄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6년부터였다. 참여작가의 명단을 보면 김기창, 김영주, 김환기, 서세옥, 유강열, 유영국, 한용진, 김창열, 박서보, 이응노, 남관, 정상화, 곽인식, 윤형근, 이우환, 최만린, 이승택, 김구림, 김종학, 김용익, 김홍석, 이건용, 박현기, 최병소, 최욱경, 신학철, 김태호, 이두식, 서도호, 육근병 등이 있다.  

4. 상파울루비엔날레 참여 한국작가      

  한국 작가들이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제7회 행사인 1963년으로 알려진다. 국가관 전시가 운영방식의 근간이다 보니 문화교류를 위한 양국의 외교적 채널이 요구되던 시절이었다. 한국은 브라질과 1959년 외교를 맺고 1962년 브라질에 한국대사관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963년에는 한국에 브라질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상파울루비엔날레의 한국 작가 진출은 양국의 외교적 관계가 가동되며 이루어진 문화교류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플렛폼 역할을 했다. 1963년 제7회 비엔날레에 김환기가 커미셔너 역할을 담당했고 김기창, 김영주, 김환기, 서세옥, 유강열, 유영국, 한용진 등 7명이 작품을 출품했다. 이 첫 참가 비엔날레에 김환기는 명예상을 수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는 김병기가 커미셔너를 맡았으며 권옥연, 김종영, 김창열, 박서보, 이세득, 이응로, 정창섭 등 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진출의 특이 사항은 커미셔너 김병기가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이응로가 명예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일은 직전 행사에 커미셔너와 출품 작가로 참여해 명예상을 수상한 김환기가 1965년 8회 행사의 ‘비경쟁 부문’에 선발되어 특별전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이 특별전에 김환기는 대작 14점을 출품했는데, 이 전시는 한국 추상미술의 예술적 성취를 기리는 한편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미술계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상파울루비엔날레의 김환기에 대한 관심은 1975년 제13회에도 이어져 특별회고전을 개최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당시 그는 유화 대작 50점을 선보였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이후 한국 출품작가의 수는 점차 늘어나 1967년 15명, 1969년 18명, 1971년 11명, 1973년 16명, 1975년 18명을 유지했다. 1977년 제14회에 이르면 제도 개혁으로 국가 전시관이 폐지되고 주제전이 시작되면서 미술평론가 이경성과 오광수가 커미셔너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참여작가의 수도 4명으로 현격히 줄었고 1979년에도 7명으로 제한했다. 1981년 16회에는 미술평론가 유준상이 커미셔너로 활약했다. 1963년 제7회에서 2002년 제25회까지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던 한국측 커미셔너와 작가 명단은 아래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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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환기 
       참여작가: 김환기(명예상), 김기창, 김영주, 서세옥, 유강열, 유영국, 한용진 등 7명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병기 
       참여작가: 이응로(명예상), 권옥연, 김종영, 김창열, 박서보, 이세득, 정창섭 등 7명, 
       김환기(비경쟁 부문 특별전시관) 
1967년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인승 
       참여작가: 류경채, 윤명로, 조용익, 정상화, 하종현, 정영렬, 이준, 문학진, 남관, 
       박래현, 박석호, 김영학, 김정숙, 박종배, 송영수 등 15명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세중
       참여작가: 곽인식, 김찬식, 민경갑, 박석원, 손동진, 안동숙, 윤형근, 이규선, 이수재,
          이우환, 이종혁, 임상진, 천경자, 최기원, 최만린, 최명영, 최의순, 하인두 등 18명
1971년 제11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이일 
       참여작가: 곽덕준, 김상유, 김차섭, 서승원, 오종욱, 이승조, 이승택, 이종각, 정관모,
          정탁영, 표승현 등 11명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이세득
       참여작가: 김창열(명예상), 강태성, 권영우, 김구림, 김봉구, 김영중, 김윤신, 김종학,
          송번수, 송수남, 전성우, 정건모, 정상화, 엄태정, 이우환, 이운식 등 16명
1975년 제13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정숙
       참여작가: 전 해에 작고한 김환기 특별회고전 개최(유화 대작 50점), 김광우, 김용익,
         김종근, 김종학, 김한, 김홍석, 박서보, 박종배, 송정기, 심문섭, 엄태정, 윤형근, 
       이성자, 이옥련, 정찬승, 한영섭, 한묵 등 18명, 백남준(미국 국가관)  
1977년 제14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이경성 
       참여작가: 김창열, 이강소, 이승조, 하종현 등 4명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오광수
       참여작가: 김기린, 김용민, 박현기, 이건용, 이상남, 진옥선, 최병소 등 7명
1981년 제16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유준상
       참여작가: 강국진, 김상구, 김정수, 김청정, 박기옥, 백금남, 신학철, 이남규, 전준, 
       조성묵, 최붕현, 최상철, 최욱경, 한만영, 한운성 등 15명 
1983년 제17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이봉열 
       참여작가: 강대철, 강하진, 김경인, 노재승, 박철, 오수환, 유인수, 윤범, 이상갑, 
       이정지, 이종선, 이종학, 이주영, 홍정희, 황교영, 황효창 등 16명 
1985년 제1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복영
       참여작가: 박광진, 신성희, 이정수, 이태현, 장화진, 장식, 전준, 함섭 등 8명
1987년 제19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이석구
       참여작가: 김재관, 김종호, 김태호, 김형주, 박충흠, 박항률, 신일근, 이경수, 
       이두식, 이부웅, 이상조, 장민섭, 최병기 등 13명
1989년 제20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유준상
       참여작가: 서도호, 육근병, 윤영석
1991년 제21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정보 미상 
       참여작가: 장영숙
1994년 제22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복영
       참여작가: 김영원, 신현중, 조덕현  
1996년 제23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서성록 
       참여작가: 김춘수
1998년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김영호 
       참여작가: 김수자, 최정화(특별전)
2002년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윤진섭 
       참여작가: 김아타, 유현미(특별전)

2004년 제26회 이후 국가별 커미셔너 제도가 중단되면서 상파울루비엔날레의 한국측 참여작가 명단은 국내 언론에 알려진 바 없다. 지난 2023년 제35회 상파울루비엔날레가 개최되었으나 아쉽게도 이와 관련한 국내 언론의 공식적인 보도를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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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윤서형, 「1963-1979년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한국 현대미술」,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4 / 「한국 현대미술 해외진출 60년 1950-2010」,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1.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진출한 한국 작가들의 명단을 일견해 보면 1960년을 전후해 시작된 한국 현대미술사의 주역들과 그 작품 경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앞서서 살펴본 파리비엔날레와 도쿄비엔날레의 참가 명단과도 거의 동일한 작가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의 참여는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 현대미술제의 경험과 자각은 비엔날레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언론 보도는 해외 미술 교류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열악함을 지적하고 있으나, 한국미술협회를 통해 보여준 현대미술가들의 활약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을 전해준다. 국제전의 참여는 국내 미술계의 변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위미술을 자부하며 참가한 한국 작가들의 미술 경향은 추상미술과 앵포르멜 경향에 속해 있었으나 현지 비엔날레의 상황은 이미 모더니즘 미술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국제미술에 뒤늦게 편승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은 비엔날레의 특수성인 ‘정치적 연대와 문화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라는 맥락 속에서 미래를 준비했다. 그리고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설치되고 국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함으로써 정부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상대적으로 상파울루비엔날레에 대한 지원은 이후에도 열악한 상황으로 남아 한국 미술사의 맥락에서 점차 멀어져 갔으니 아쉬운 일이다. 

5. 한국미술의 국제적 위상 

‘김병기와 상파울루비엔날레’라는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의 기획전과 연계한 생사로 오늘 학술행사가 마련되었다. 김병기 선생은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과 국제적 위상 정립에 기여한 바가 크다. 작가로서, 예술 행정가로서, 국제전 커미셔너와 심사위원으로서 활동했던 그의 업적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이에 직접 관련된 내용들은 오늘 세미나의 다른 발표자들의 몫으로 남기겠다. 다만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국내 작가들의 해외 진출과 관련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 것이다) 김병기는 1961년 한국 정부에 의해 제2회 파리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선정되었으나 별다른 정부의 지원과 실무적 문제를 이유로 파리 현지에 있는 박서보와 이일에게 자신의 역할을 넘기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국내 우리 정부가 추진했던 문화정책의 현실을 전해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이 처음 초대를 받았을 때도 정부가 한국미술가협회에 위임하여 당시 이사장이었던 김환기가 당연직으로 커미셔너가 되었다. 이듬해인 1964년 김병기가 한국미협 이사장에 선임됨으로써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측 커미셔너가 되었다. 그리고 현지에서 심사위원으로 선임되는 기회를 얻게 되어 이응로가 명예상을 수상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담당했다. 김병기는 회고록에서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했던 70여 명의 커미셔너 가운데 심사위원 15명을 뽑았는데 자신이 국제전 최초의 한국인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비엔날레 커미셔너에게 주어진 주요 권한은 참여작가 선정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김병기가 주도했던 역할은 문화정치의 주역으로서의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그에 관한 기록들은 한국 미술계의 헤게모니 다툼에 대한 내용들을 생경하게 전해준다. 1960년 당시 한국화단은 ‘아카데미즘과 전위미술의 대결’ 구도로 전개되고 있었으며 국전에 대응하여 새로운 기류를 일으켰고 그 경향은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로 초점이 모여지고 있었다. 이들 전위미술계 작가들에 있어 국제전은 모더니스트로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출구였다. 1957년에 창립한 모던아트협회와 현대미술가협회의 회원들이 국제 미술제에 참여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의 초의 개혁 기류 속에서 추상계열의 작가들이 주목되는 가운데 이루어진 1961년의 미협 통합(한국미술가협회와 대한미술협회가 한국미술협회로)과 예총의 발족은 아카데미즘과 전위미술 논쟁을 기관 차원으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상파울루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 현대미술제 참여는 전위미술가들의 플렛폼으로 인식되었다.

1960년대에 활발히 이루어진 국제전에도 불구하고 국내 미술계의 경험 미숙은 운영상의 난항으로 이어진다. 비엔날레 주최측은 문교부를 통해 한국 작가를 초대하고 문교부가 다시 미협에게 그리고 미협은 다시 작가 선정 권한을 미협 이사에게 넘기는 관례 속에서 이사진들이 자천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9년 비엔날레 출품작가들도 한국미술협회 이사진 내의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국제전 준비는 한국미술협회와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가 담당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은 108인 연서 사건으로 표면화 되었다.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파리비엔날레 참여작가들이 추상화 편중으로 선정되었다고 문제 제기한 구상화가들이 서명한 사건이다.
 
1967년 제9회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매회 15-18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국가 전시관이 폐지되고 주제전 시작되는 1977년 제14회 비엔날레부터 한국 비평가들이 커미셔너로 선임되며 한국측 참여작가 인원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1981년 이후 10여년 동안 13-18명이 참여하는 단체전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 국가전시관 제도의 폐지와 통합주제 제도로의 변경에 의한 상황. 주제별 전시로 변경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인식 변화는 1990년대에 이르러 다시 전문 비평가들이 커미셔너로 선임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는 광주비엔날레가 태동되는 때와 일치되고 있다. 1960-1970년대 출품작의 경향을 보면 1960년대 회화와 조각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 설치, 입체, 비디오 및 이벤트 작업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상에서 보듯 상파울루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또한,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을 제공하며,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기여 해왔다. 남미 미술의 중심지인 브라질에서 열리는 만큼, 지역 문화 발전과 국제적 교류에도 영향을 미쳐 왔다. 최근 비엔날레는 환경 문제,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갈등 등 동시대의 주요 이슈들을 다루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또한, 디지털 미디어, 설치 미술 등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며,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미술계의 담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따. 비엔날레의 전성기를 지나 새로운 전환점에 놓여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비엔날레가 단순한 미술 전시를 넘어, 동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이슈를 고민하고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향후 비엔날레에 대한 연구의 당위성을 높이기 위해 숙고해야 할 대목이다. 

6. 결언 

  필자는 1998년 10월4일부터 12월13일까지 브라질에서 열린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의 한국측 커미셔너로 참여했다. 한국미술협회 국제위원회가 국제전 참여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미술의 세계화 전략기지로 상파울루비엔날레가 일찍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데 인식을 함께하고 총 사업비 천만원이라는 열악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제24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주제는 ‘식인풍습과 역사의 핵으로서의 카니발리즘(Antropofagia and Histories of Cannibalism of the Nucleo Historico)’이었으며 브라질의 문화적 다양성과 인류학적 관점을 탐구하는데 초점을 맞춘 행사였다. 비서구권에서 개최되는 현대미술의 국제적 행사임은 물론 제3세계 국가들의 문화적 독자성을 검증하고 표출해 냈으며, 브라질 고유의 특수성을 잘 살린 비엔날레로 어느해 보다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상파울루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았던 파울로 헤르켄호프(Paulo Herkenhoff)는 카니발리즘을 단순히 식인 행위를 넘어 문화적 흡수와 변형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며 브라질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고 다양한 문화의 혼합과 충돌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가 브라질의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된 이민사의 충돌과 분열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을 살펴보고 국가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데 기여한 행사였다고 믿는다. 한국 대표작가로 선정한 김수자는 천과 보따리를 이용한 설치작업을 출품해 현지 언론과 주최측의 호평을 받았다. 보따리 트럭을 지구의 반대편 브라질로 이동시켜 이민로를 따라 시실리 마타라초 전시관으로 입장시키고 그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비디오룸을 만들어 그동안 보따리 트럭이 거쳐온 국내외의 노정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국가관 부스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최측이 제시한 주제에 맞게 작품들이 설치되면서 일종의 주제전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두 개의 특별기획 전시가 더 열렸는데 그 중 2층에서 개최된 ‘로테이로스, 로테이로스(Roteiros, Roteiros)’전에 최정화가 초대되었으니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한 한국 작가는 모두 2명이다. (출처; 김병기 3주기 기념전: 김병기와 상파울루비엔날레, 가나아트, 2025.3.5.~4.20)  


- 1차 발표: 《김병기와 상파울루 비엔날레》 연계 학술 세미나 2025.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