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 - 분열증적 주체가 직시하는 현대의 초상
김성호(Sung-Ho K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이 글은 작가 이은경의 회화 중 인물화에 집중하여 작품을 분석하고 해설한다. 자화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초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그녀의 인물화는 어떠한 조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그것이 지닌 미학적 함의는 과연 어떠한 것인지 살펴본다.
밝혀둘 것이 있다. 이 글에 제시된 소제목은 이은경 회화의 의미를 푸는 작은 키워드의 조합이며 글 속의 논지는 한 평론가의 주관적인 해설과 객관적인 진단이 함께 어우러진 평론일 뿐, 여타의 다른 평자의 또 다른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전제해 둔다.

은경_27.5x22cm_acrylic on canvas_2022(3호)
II. 거울 속의 나 – 자기 동일화의 타자
작가 이은경의 회화는 거울 속에서 발견하는 자기 모습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실제의 거울을 앞에 두고 그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자화상을 그리거나, 마치 거울 속 자기를 보듯이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작가의 상반신 혹은 전신상의 인물을 자주 선보인다.
‘거울 속 나’란 실제의 내가 투영된 허구의 나일 따름이지만, 자기의 주체적 정체성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주는 첫 타인이기도 하다. 라캉(J. Lacan)식으로 말해 거울이란 유아가 비로소 주체와 타자를 대면하면서 ‘자기 동일화’를 시작하도록 돕는 첫 세상인 셈이다. 그 세상이란 숙련된 언어적 구조로 가득한 상징계(le Symbolique)에 도달하기 이전에 유아적 주체에게 다가온 이미지와 소리 덩어리가 뒤섞인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상상계(le Imaginaire)와 같다.
상상계 속에서 마주한 ‘거울 속의 나’란 실제의 나와 동일시를 시도하지만,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 환상적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이은경의 회화에 나타난 ‘거울 속의 나’는 실재인 나와 나의 투사인 허구를 구분하기 버거워하는 주체인 ‘나/남’으로 드러난다. 즉 그것은 나이면서 남이기도 한데, 라캉식으로 말해 자기 동일화를 확인하는 ‘소(小)타자’인 셈이다. 라캉이 타자(autre)의 불어 첫 머리글자로 설명하는 소타자(a)란 거울 속에서 대면한 나의 모습이거나, 내가 젖꼭지를 물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에서처럼, 이은경이 상상계 속에서 마주한 ‘거울 속의 나’란 나와 절대 합치되지 않는 환상의 이미지이지만, 지속해서 ‘거울을 보는 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 동일한 실내 풍경을 배경으로 둥그런 거울 앞에 선 자기 모습을 매일 그림일기처럼 남긴 자화상 연작은 대표적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기 동일화’의 노력을 기록하려는 듯, 매번 같은 무표정 혹은 중성성(neutralité)의 표정을 한 채 자기 자신을 날마다 들여다본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를 왜 우리는 어머니라는 메타포로 간주하는가? 생각해 보라.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경험한 ‘나이면서 나 아닌’ 어머니!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주체 대 타자로 맞닥뜨린 나의 어머니! 나의 근원적 모태이자, 혈족! 세상 속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분신인 어머니는 ‘거울 속의 나’로 비유되는 세상 속 최초의 타자이다. 그러니까 ‘거울 속 나’ 혹은 ‘나를 품고 있는 어머니’는 구조화된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유아적 주체가 자기 동일화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만난 첫 타자인 셈이다.
우리는 그녀의 작품에서, 벌거벗은 상반신으로 거울을 마주한 자화상 〈노란 사람〉(2022)이나, 벌거벗은 채 팔다리가 잘린 토르소가 공중에 부유하는 자화상에서 혹은 성인의 모습을 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작품 〈먹다, 먹히다〉(2002)에서 이러한 첫 타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노란사람_60.8x45.8cm_acrylic on canvas_2022(12호)

먹다,먹히다_25x18cm_acrylic on canvas_2022
III. 어른/아이 – 결핍과 고통의 세계로부터의 탈주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이은경은 라캉식으로 상상계 안에서 경험하는 세계를 회화로 추적한다. 그런데 그것은 상징계로 접어들기 전의 상상계 속 유아적 주체이기보다 상징계의 질서를 견디다 못해 다시 상상계로 다시 돌아와 자기 동일성을 병적으로 확인하려는 ‘아이 같은 어른’ 혹은 ‘어른/아이’의 퇴행적 주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작업은 기성세대가 구축한 질서의 체계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버리길 강요받는 대타자(A)의 담론에 진저리 치면서 도망쳐 상상계로 되돌아온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상징계가 무엇이고 대타자의 담론이 무엇이길래, 도망칠 정도인가? 상징계는 언어적 구조로 짜여있어, 문화적 규범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율과 질서를 강요하는 법체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상징계는 공공의 질서를 위해 주체의 자유로운 표현 의지를 가두는 공간이다. 상상계를 막 벗어난 유아적 주체는 이 상징계의 구조 안에서 사회적 요구와 기대에 맞춰 언어적 질서와 규범을 배우고 따라 행동하면서 자기의 사회적 주체로서의 위상을 찾아 나가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그런데 상징계 속 모든 주체는 어른이 되기까지 너무 힘들다. 왜? 상징계에는 애초부터 나라는 주체는 없었고 그곳은 원래 기성세대의 사회 구성원이 만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타자들, 라캉식으로 말해 대타자(A)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대타자가 만든 세상에 살면서 훗날 그들이 되기 위해 그들을 따라하고 그들처럼 살아야만 하는 까닭이다. 주체는 상징계의 구조 안에서 타자와의 관계와 의사소통 그리고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해야만 한다. 라캉은 상징계에서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한 개인 주체는 본능적 욕구를 억누르고 사회가 가리키는 욕망 체계를 배우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대타자로서의 사회적 주체’가 비로소 될 수 있는 셈이다.
문제는, 주체가 충족할 수 없는 ‘타자의 욕망’으로 인해 늘 결핍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이러한 단계에서 경험할 수 있지만 결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실재계(Le Réel)’의 세계가 열린다. 상징계 속 타자의 담론이 낳은 실재계란 무한한 욕망을 충족할 수 없는 결핍과 고통 그리고 그것에 대한 트라우마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의 세계로 점철된다. 주체가 경험하는 고통이나 결핍의 본질적 세계인 셈이다. 이 실재계는 현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타자의 세계가 아니라 내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는 세계이자, 쉽게 보이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미지의 세계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사는 삶이란 힘들지 않겠나?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은경의 작업 안에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상징계’를 거부하거나 ‘고통과 불안이 점철된 실재계’로부터 도망쳐 나와 오래전의 상상계로 되돌아가려고 애쓰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 같은 어른’ 혹은 ‘어른/아이’, 즉 ‘주체가 변형한 유아적 주체’와 같은 퇴행적 주체의 모습이 그것이다. 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다시 한 몸이 된 주체, 혹은 방금 자궁을 벗어나 어머니 품으로 뚝 떨어져 어머니의 일부이기만 한 주체, 아니, 그야말로 아무런 언어적 구조를 사용할 수 없이 울기만 해대는 갓난아이와 같은 ‘주체 아닌 주체’로서 말이다.
커다란 두상에 비해 작은 몸과 짧은 팔다리를 한 그녀가 두건을 쓰고 있거나, 벌거벗은 채 기저귀 같은 속옷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자화상들은 흡사 이러한 ‘퇴행적 유아 주체’ 혹은 ‘어른/아이로서의 주체’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벌거벗은 채 주저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자화상도 그러한 퇴행적 유아 주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제
쉼터_30x30cm_acrylic on canvas_2019
IV. 하나, 둘, 혹은 셋의 나 – ‘또 다른 나’로서의 주체
사회적 인간으로 사는 현대인으로서 ‘타자의 욕망을 끊임없이 욕망하는 상징계의 질서와 그것으로부터 늘 결핍과 갈등 그리고 불안에 시달린다는 실재계에서 벗어날 수 있나? 벗어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설 일이다. 작가 이은경 역시 이러한 고민에 맞닥뜨린 적이 있는 듯하다: “나는 인체에 관한 관심만큼이나 사회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와 갈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 유년 시절부터 인간관계나 사회 속 개인의 단절과 같은 것에 고민이 많았던 탓이다. 필요에 의해서만 맺어지는 피상적 관계는 가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같은 관계 맺기를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피상적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냉소와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러시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은경에게 있어 인종 및 여타의 이유로 타자와의 관계가 쉽지 않았음을 유추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관계는 필연이자, 갈등과 불만을 야기하는 필요악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 주체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고통을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인간 주체란 언제나 내 안에서 ‘또 다른 나’와 늘 싸우는 존재가 아니던가? ‘또 다른 나’? 프로이트(S. Freud)가 분석했듯이, 나의 이성적 자아인 에고(ego)는 동물적 본능인 이드(id)와 초자아인 슈퍼에고(superego)와 무수히 쟁투를 벌이면서 매일 살아간다. 이드가 지향하는 악(惡)과 슈퍼에고가 지향하는 선(善) 사이의 무수한 갈등을 중재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은경의 작업은 프로이트가 주체로 언급했던 이드와 슈퍼에고 사이에서 둘의 타협을 위해 스스로 싸우고 있는 에고의 울부짖음처럼 보인다. 또는 라캉이 인간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메타포로 제시했던 ‘숨 막히는 구조와 질서로 이루어진 상징계’와 ‘고통과 불안을 야기하는 실재계’로부터 탈주하여 ‘거울 단계의 자기 동일화를 시도하는 상상계’로 되돌아간 ‘퇴행적 유아 주체’ 혹은 ‘어른/아이로서의 주체’가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건은 ‘이드-에고-슈퍼에고를 아우르는 주체’ 혹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아루는 주체의 세계’를 통해 ‘또 다른 나’에 대한 관심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은경의 작품에는 한 명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두 명, 세 명 혹은 그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개 그 인물은 이은경이다. ‘또 다른 나’인 셈이다. 그것은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자기를 표현한 작품 〈들여다보는〉(2017)이나 유사한 ‘거울 연작’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은경과 거울 속 이은경이 맞물린 자화상인 경우도 그렇지만, 거울 속의 이은경과 자신이 그린 캔버스 속 이은경을 병치한 작품 〈밖과 안의 나〉(2022), 〈안과 밖의 나〉(2022)도 그러하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은경의 손과 모델 이은경 그리고 거울 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은경의 모습도 ‘또 다른 이은경’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거울 없는 화면 속에 자기의 분신처럼 각기 다른 복장과 표정 그리고 다른 자세로 등장한 여러 명의 이은경을 등장시킨 작품도 무수히 많다. 각자 다른 각도로 전면을 응시하는 두 명의 이은경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병치한 작품 〈두나〉(2023)나 동일한 유형의 다른 작품들, 그리고 상반신을 탈의한 채 주저앉아 있는 이은경의 얼굴을 받쳐 든 이은경은 ‘또 다른 이은경들’이다. 그것은 이드-에고-슈퍼 에고의 정체성을 오가는 ‘또 다른 나’이면서도 타자에게 자신을 투영한 ‘나와 너’ 혹은 ‘나 아닌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은경은 고립된 듯 불안한 표정의 ‘집단 자화상’을 통해서 ‘또 다른 나’라는 주체에 관한 불편한 내러티브를 무심한 듯 전한다.

들여다보는,_22.9x30.5cm_acrylic on paper_2017
안과밖의나_53x66cm_acrylic on canvas_2022(15호)
두나2_31.9x40.9cm_acrylic on canvas_2023
V. 수많은 알터에고를 위해 – 폭력에 대한 위로와 치유
이은경의 회화에 포진한 ‘또 다른 나’는 ‘알터 에고(alter ego)’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본래의 내 모습과 다른 또 다른 자아”인 알터 에고가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설명할 때 종종 사용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나’는 필연코 낯설고도 불편한 내러티브를 함유한다. 주로 심리적 외상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 기제로 발생하는 해리성 장애는 인간 주체가 직면한 심리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한 개인의 정체성을 여럿으로 나누는 ‘알터 에고’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이때 분열의 주체성인 ‘알터 에고’는 특정 상황에서 특수한 주체성만 도드라지게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병적 주체임을 명확히 한다.
이은경의 회화에서, ‘알터 에고적 주체’가 드러내는 불편한 내러티브는 관객을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처참하게 내몬다. 작가를 빼닮았으나 작가와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자화상! 그것은 관자에 따라서 보호받지 못한 채 사라지는 누군가를 연민하고 동질화하는 그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보이는 비뚤어지고 왜곡된 인물 형상이나, 작품 〈수(水)상하다〉(2021)에서처럼 인물이 취하는 과도한 제스처 그리고 많은 인물상에서 보이는 강렬한 보색 대비와 화면 위에 거칠게 올라선 스트로크는 소외와 불안 그리고 고통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러한 낯설고도 불안한 풍경이 전하는 내러티브는 이은경이 작가노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폭력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매일 다양한 채널의 뉴스를 귀로 들으며 세상을 만납니다. 그중에서도 제 마음에 가장 오래 남는 문제는 아이 혹은 구조적 약자들을 향한 폭력과 학대입니다, 아마도 어린 날 저 자신이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했던 두려움에 대한 기억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린 시절 체험했던 어떠한 두려움이 망각 속에 살고 있다가 어떤 특정한 사건을 직간접으로 만날 때, 알터 에고적 주체가 급격히 작동하는 까닭에 힘들어했던 적이 있다면, 생각해 볼 일이다. 폭력과 학대와 같은 과거의 사건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은경의 회화가 알터 에고적 주체를 분신적 주체에게만 머물게 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타자들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아쉬움, 슬픔, 분노를 넘어 당연한 권리에 대해 자신의 소리를 제때 적당한 크기로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내내 은경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왔다. 온당한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이 연습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은경'들을 위한 소리를 내는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따라서 이은경의 회화에서 ‘또 다른 은경’은 폭력과 학대 또는 위압적 가해 행위 속에서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호받지 못한 ‘소외된 이들’ 혹은 라캉식으로 ‘타자의 권력에 종속된 주체(Sujet aliéné)’를 대신하는 대변자이자, 그들 편에 서서 뜻을 같이하는 동행자이기도 하다. 마치 고통을 함께하려는 듯 때론 휘둥그레 놀란 표정으로, 때론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모습으로, 때론 자포자기하듯 무너진 자세와 허망한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보기도 한다. 폭력적 상황 때문일까? 작품 〈새벽, 부산〉(2022)에서처럼 입술을 다문 채 단호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보거나, 작품 〈지옥실〉(2015)에서처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표정을 짓거나, 작품 〈흐르는 바람〉(2023)에서처럼 퀭한 눈을 들어 관객을 보면서 저항의 눈빛을 던지기도 한다. 그것이 아니면 작품 〈푸른 멍〉(2020)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내가 대신 폭력을 당하거나, 작품〈향유〉(2024)에서 그들을 위해 내가 대신 오물 뒤집어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은경은 소외되거나 억압된 상황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알터 에고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스스로 그들이 되고자 한다. 한 주체가 타자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식은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의 철학의 메타포인 ‘되기(devenir)’를 실천하는 것과 같다. 일테면, ‘이방인 되기, 피억압자 되기, 소수자 되기, 동물 되기’를 통해 모든 ‘타자 되기(devenir-autre)’를 실천함으로써 굳건한 수직적 위계의 질서를 흔들어 무너뜨리고 상호 이해가 가능한 새로운 수평의 영토를 구축할 수 있는 까닭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포용하는 ‘되기’의 철학적 메타포란 ‘~이다(être)’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의 존재를 고정되거나 확정적인 것이 될 수 없도록 자극한다. ‘되기’는 우리의 존재를 불확정의 운동, 전환의 변화와 생성의 운동 존재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되기’는 작가 이은경이 관심을 기울이는 ‘폭력에 대한 위로와 치유의 한 방식’이 되기에 족하다.
푸른 멍_25.5x20cm_acrylic on canvas_2020
흐르는바람_22x22cm_acrylic on canvas_2023
향유_65.1x45.5cm_acrylic on canvas_2024
VI. 에필로그
작가 이은경의 회화는 한마디로 자화상에 기반한 타자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나’로부터 비롯된 ‘거울 속의 나’를 탐구하는 ‘자기 동일화의 타자’로부터 출발한다. 피상적으로 그 타자의 초상은 라캉식의 ‘상징계’의 구조적 질서와 ‘실재계’의 결핍과 고통을 참을 길 없어 탈주하여 상상계로 되돌아온 ‘퇴행적 유아 주체’ 혹은 ‘어른/아이로서의 주체’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은경의 회화 속 주체는 ‘하나, 둘, 혹은 셋의 나’처럼 여럿의 알터 에고가 겹친 병적인 모습으로 화면 속에 소환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은경이 회화로 탐구하는 ‘알터 에고’는 라캉의 입장에서처럼 치유되어야 할 질환자의 모습이 아니라, 들뢰즈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타자 되기’를 통해 치유를 실현하는 실천자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로 된 구조적 질서와 상징계를 내세우고 결핍에 따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라캉주의(Lacanisme)에 반기하면서 그들의 철학적 메타포인 ‘되기’를 제시한다.
이은경의 회화를 최종적으로 해설하는 이 글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한 ‘되기’의 철학과 더불어 ‘분열증적 주체(sujet schizoïde)’는 주요한 키워드가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에서 라캉주의에 반대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능동적 주체로 ‘분열증적 주체’를 불러온다. 이 분열증적 주체는 단일 정체성에 갇힌 고립된 주체를 거부하고, 다양한 가능성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기존의 규범을 탈주하고 사회의 억압에 능동적으로 저항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은경의 회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알터 에고적 주체, 분열증적 주체는 현실을 직시하고 고발하는 이 시대의 초상이 되기에 족하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열증적 주체의 저항에는 사회적 연대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행동을 요청한다. 이은경이 작가 노트에서 “어울리기, 소통하기, 연대하기는 내가 삶에서 높게 지향하는 것들”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녀의 분열증적 주체 또한 현실 고발의 차원을 넘어 소통과 연대를 지향한다. 다만 그것이 그녀의 회화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가시화될 것인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20241023)
출전/
김성호, 「또 다른 나 - 분열증적 주체가 직시하는 현대의 초상」, 『이은경』, 2024년 전속작가제 지원 프로그램 비평,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