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이 창출하는 마인드스케이프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홍정우의 이번 개인전은 ‘몸이 기억하는 풍경: 동락(同樂)’이라는 주제를 내세운다. 여기서 ‘몸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경험의 소산으로서의 기억 혹은 체험적 기억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배웠던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지 않다가도 성인이 된 지금 특별한 어려움 없이 탈 수 있는 것처럼, 몸의 기억은 체험적 사건을 마치 어떤 몸의 행위를 관성화된 것처럼 몸의 언어로 나아가 이미지로 재생한다. 여기서 몸이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 상태의 것이기보다 양자가 통합된 ‘몸으로서의 주체’를 의미한다. 그의 〈몸이 기억하는 풍경〉 연작은 종국에 마음의 풍경에 이른다. 나아가 홍정우의 작업에서 부제 ‘동락’이 의미하듯이, 그의 몸의 기억은 작가 개인의 기억이자, 가족 구성원이 공유하는 기억으로 확장한다. 주체의 감각과 지각을 공유하고 감성을 함께 나누는 차원에서 불특정 타자의 기억을 공유하는 지평으로 나선다. 그것이 무엇이고 그의 작품에 담긴 미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홍정우, 몸이 기억하는 풍경 2017-8




II. 그때의 몸이 보았던 세상  
어린 시절에 보았던 세상은 신비한 놀이터 그 자체였다. 초등학생이 날마다 조회에서 맞이하는 학교 운동장은 너무나 크나큰 세상이었고 그 안에서 만나는 또래의 아이는 그러한 신비로운 미지의 세상을 모험해 나가는 동료들이었다. 혹자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드넓은 운동장 바닥에 주전자로 물 드로잉을 하거나 화장실 벽에 크레용으로 낙서하다가 주임 선생에게 들켜 혼쭐이 난 적이 있음을 기억한다. 신비로운 놀이터 세상에서 그들은 ‘자유의 욕망’과 ‘금기의 제도’ 사이에 자리한 세상의 질서가 있음을 깨달으면서 청소년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어간다. 
홍정우는 어린 시절, 그때의 몸이 보았던 세상을 자신의 작업 속에 소환한다. 마치 아이가 책상 위에 있는 4절지 도화지를 커다란 세상처럼 맞이하면서 그리는 동심의 그림처럼 말이다. 아이는 어눌하고 서투르지만 정성껏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린다. 이때 아이는 자기 손이 팔과 함께 움직이는 온몸의 그림임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장면을 지켜보는 어른이 자기가 어렸을 적에 그 아이처럼 온몸으로 그림을 그렸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홍정우는 자기의 어린 자녀가 온몸으로 꼼지락거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으로부터 자신의 과거를 소환한다. 어렸던 그가 보았던 그때의 세상을 더듬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작은 운동장에 불과했던 학교 운동장을 우주처럼 크게 바라보았던 기억 속 세상을 그린다. 그때의 몸이 보았던 세상을 말이다. 때로는 들킬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선생님 몰래 화장실 벽에 낙서하면서 키득대던 어린 시절 장난기 가득하지만 동시에 순수했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크레용을 바투 잡고 온몸으로 아빠의 얼굴을, 비행기와 우주선을 그리고 상상의 바다 세계를 그리던 제스처로 그림을 그린다. 그때의 몸이 기억하는 세상을 소환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홍정우의 화면 위에 주절거리는 방백 혹은 독백처럼 써 내려간 낙서 같은 드로잉은 그때의 마음이 읽은 세상이자 그때의 몸이 기억하는 풍경인 셈이다. 그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같은 오감각을 통해 지각하고 온몸으로 체험했던 당시의 세상 풍경을 온몸으로 표현했던 어린 시절의 그림 그리기 방식으로 가시화한다. 
그때의 몸이 보았던 세상을 가시화하는 홍정우의 〈몸이 기억하는 풍경〉 연작은 베르그송(Henri Bergson) 철학에서의 이미지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몸이 기억하는 풍경은 자전거 타기나 글쓰기 또는 피아노 연주처럼 반복적 노력이나 실험 등을 통해서 가능한 기억인 ‘습관-기억(mémoire-habitude)’과 연동한다. 많은 훈련으로 반복적 행위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게 만드는 몸의 기억인 셈이다. 그러나 홍정우의 작업에서 이러한 ‘습관-기억’은 ‘이미지-기억 혹은 이미지-추억(souvenir-image)’이 추동하는 강력한 힘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시된다. ‘이미지-기억’은 어떠한 작위적인 노력 없이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저절로 인간 주체에게 보존되었다가, 현재의 자극이나 요청에 따라 이미지 형태로 자유롭고도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만드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이미지-기억’은 인간 주체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현현하게 만든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습관-기억’이나 ‘이미지-기억’ 모두 우리 몸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순수 기억’(mémoire purifiée)이다. 순수 기억은 현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분절되는 특정 시공간이기보다 생명과 물질의 지속적 흐름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되는, ‘머리로는 어렴풋하지만, 가슴으로 선명한’ 기억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홍정우의 작업에서 이러한 순수 기억은 단지 과거의 특정한 경험에 국한되기보다 ‘몸이 기억하는 모든 과거 속 풍경’을 상징하고 그것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로 대별되는 타자의 몸 언어를 관조하면서 홍정우가 어린 시절 ‘그때의 몸으로 보았던 세상’을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몸으로 기억하는 과거의 모든 풍경’인 셈이다. 




홍정우, 몸이 기억하는 풍경 2024-39




홍정우, 몸이 기억하는 풍경 2023-10




III. 잠재태에서 견인하는 뿌연 풍경   
그렇다면 ‘이미지-기억’이란 원래 어디에 있는 것인가? 베르그송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망각이라는 잠재태(潛在態, le virtuel)의 형태로 우리 몸 어디엔가 있다가 특이성(singularité)의 사건을 만나는 현실화(actualisation)의 과정을 만나 우리 몸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즉 이미지-기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재태로 존재하다가 현실화 과정을 통해 이미지로 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베르그송과 그의 철학을 잇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안내에 따라, 이미지로 현실화되기까지 잠재태로서의 ‘이미지-기억’은 그저 망각 속에 잠자는 상태로 있는 정지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변곡점을 향해 달리는 운동체의 존재다. 단지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마치 커튼의 주름 뒤에 있는 존재처럼 쉬이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홍정우의 〈몸이 기억하는 풍경〉 연작은 강렬하고 선명한 체험에 근거한 무엇이지만, 그 이미지란 잠재태에서 견인하는 까닭에 모호하다. 그 이미지는 잠재태와 현실 사이의 넓은 경계 속에서 유영하는 무엇으로서의 존재이다. 그의 또 다른 연작 〈뿌연 풍경〉은 ‘현실화의 사건’에 이르는 잠재태의 ‘보이지 않은 운동’과 ‘현실화 이후’의 ‘보이는 운동’의 경계 지점에서 유영하는 운동이 겹친 무엇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은 운동 사이의 언뜻언뜻 보이는 운동이거나 ‘보임과 보이지 않음’ 사이를 겹쳐 놓은 레이어들로 뿌연 이미지를 창출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실제로 홍정우는 화면 위에 불명료한 숫자, 문자, 기호와 같은 조형 요소를 낙서하듯이 무의식적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뿌연 풍경 만들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조형 방식을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의 심층 속에서 펼쳐지는 ‘잠재된 기호’의 운동으로 부를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에게 의식의 세계란 곧 언어의 세계인 반면에, 무의식의 세계는 기호(sign)의 세계인 까닭이다. 기호의 세계는 지표(index)처럼 무엇을 가리키거나, 도상(icon)처럼 상사성(相似性)의 닮은꼴을 열거나, 상징(symbol)처럼 본질에 육박하는 광폭의 대응 관계를 열면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분리되지 않는 모호한 의미의 이미지 파편들이 산포(散布)한다. 기표와 기의의 파편적 결합체 혹은 기의 자체가 탈각된 기표로 표상되는 이것은 감탄사와 같은 의성어이거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소음과 같은 소리 이미지, 혹은 분절되지 않는(못하는) 비언어로 드러난다.
홍정우의 작업에서 ‘모호한 의미의 이미지 파편들’은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열된 숫자, 분별하기 어려운 문자와 특수 기호는 무엇이라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한 의미의 이미지 파편들로 기표와 기의로 분절되지 않는(할 수 없는) 무의식 세계의 심층에 자리한 비언어적 생산물로 표상되는 까닭이다. 
홍정우의 작업에서, 분절되지 못한 비언어, 혹은 무의식적 비언어는 대개 낙서라는 무의식적 운동 행위의 흔적(trace)을 남기는 지표의 기호학을 전한다. 지표의 기호학?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게 만드는 지표의 기호학은 그의 작업에서 그저 무의식적 행위의 무한 반복을 거쳐 몸의 기억을 소환하는 운동 행위 자체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기표와 기의의 파편이 펼치는 변화의 운동이라고 풀이된다. 아울러 바탕색을 다른 색으로 여러 번 겹쳐 올려 물감층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거나 알 수 없는 텍스트나 기호를 써가는 낙서 방식은 주절거리는 독백처럼 분절되지 않은 내적 언어의 발화 행위에 관한 흔적을 남긴다. 
기억을 잠재태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홍정우의 회화는 뿌연 풍경을 직조한다. 운동의 궤적을 남긴 흔적이 또 다른 흔적을 뒤덮고 또 다른 심층의 무의식을 긁어 흔적을 남기는 작업은 가히 잠재태에서 견인하는 뿌연 풍경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안다. 베르그송의 안내에 따라, ‘사건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현실화의 경계가 언제나 명확하지 않지만, 사건 이후가 실재(réalité)이듯이, 사건 이전의 잠재태도 분명 실재, 즉 ‘잠재적 실재(réalité virtuelle)’인 것을 말이다. 달리 말해, 망각이라는 잠재태에서 기억을 견인하는 그의 뿌연 풍경은 실체가 사라진 듯한 이미지이지만, 분명히 그것은 몸이 기억하는 실재로서의 존재다. 
  



홍정우, 뿌연 풍경 2018-1



IV. 몸의 풍경에서 추동하는 마음의 풍경    
홍정우가 낙서로 화면 위에 올리고 긁어내서 만든 ‘이미지 파편’, ‘형상 아닌 형상’ 혹은 ‘해체된 형상’은 가히 ‘무의식의 세계에서 온 내적 추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 이미저리(imagery)’로 불러본다. 이미저리란 “육체적인 감각으로 발생하여 언어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통합체”가 아니던가? 우리는 이미지(image)를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상을 재현한 무엇이나 대상 실재에 대한 허구적 시뮬라크르로 통칭하는 반면, 이미저리를 ‘심안으로 그리는 이미지’로 해설한다. 즉 이미저리는 심상(心像)으로 번역되는 ‘내적 형상’이라는 점에서 가히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가 된다.  
우리는 홍정우의 〈뿌연 풍경〉 연작이 단지 낙서가 가득한 추상화에 머물지 않고 가로로 양분된 색면으로 인해 연상되는 심상 속 자연 풍경과 같은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노을이 가득한 하늘을 이고 있는 들판의 풍경이나 잔잔한 바다가 하늘과 마주한 수평선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이러한 풍경 양상은 무의식과 의식,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마인드스케이프와 같은 것이자,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는 ‘기억 이미저리’로 해설할 수 있다. 
이처럼 홍정우는 몸의 기억이 만드는 추상적 풍경 속에서 마음의 풍경을 추동한다. 그것은 마치 매일 변모하는 삶의 일상과 같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가 매일 20x18cm 크기의 작은 종이에 즉흥적으로 순간의 느낌을 그려내듯 작업해 온 〈일상 그림일기(Daily Drawing)〉 연작은 주목할 만하다. 이 연작은 감정의 기억을 즉흥적으로 화면에 던지는 형식을 통해서, <아름다운 날들>, <너와 상관없는 일>과 같은 또 다른 연작들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변화하는 마음의 풍경을 마치 그림일기를 쓰듯이 담아낸다. 
한편, 큰 캔버스에 스퀴징과 얇은 선을 쌓아 올린 〈감정의 무게〉 연작은 작가의 내면 감정에 충실하게 화답하는 일련의 마인드스케이프라고 하겠다. 이 연작은 어두운 화면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물감층을 긁어내거나 스퀴즈로 표면의 물감층 일부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들어내고’ 심층의 화면을 표면 밖으로 ‘드러내는’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 스퀴지의 두께와 누르는 강도를 통해 물감의 쌓여있는 레이어를 표출하고 거침없는 선들을 가시화함으로써 순간의 감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하는 얇은 선들의 표정을 통해 여러 순간적인 감정에 담긴 복잡하고도 미묘한 요소들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채우기, 들어내기 그리고 드러내기를 교차하는 이러한 조형 태도와 조형 언어는 마치 내면에 숨겨두었던 감정의 진폭을 일시에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과 같은 마인드스케이프의 효과를 유감없이 발현한다. 
따라서 이 연작에는, 때로는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거나 때로는 현실에 대한 좌절의 감정이 뒤섞인 것이기도 하지만, 복잡다기한 ‘감정의 무게를 스스로 가늠해 보면서 매일 자기 치유를 도모하는 명상 일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향해 그가 내휘두른 ‘소심한 폭력’이지만 스스로 치유를 위해 아픔을 되새긴 시도가 되기도 한다.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몸이 기억하는 풍경: 동락(同樂)’이라는 주제에서 부제로 사용된 ‘동락’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라는 의미의 동고동락(同苦同樂)에서 동락만 취한 이 부제는 작가 홍정우의 개인의 몸이 가족 구성원으로 확장되는 것을 은연중 암시한다. 자신의 동반자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이어진 자신의 분신으로서의 자녀들을 포함하는 몸의 확장! 그것은 우리에게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 야기하는 ‘원형(archetype)’이라는 개념을 일깨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무의식에서 기인하는 내적 추상’이 결국 작가 개인의 무의식이 내밀하게 연결된 가족 구성원과의 공유 지대를 표상하는 차원으로 넓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차원이란 굳이 언어화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상태인 집단 무의식이 성취하는 공유적 인식과 같은 것이다. 
집단 무의식이 야기하는 원형이란 융의 논의에 따르면, 옛 선조들의 생활에서 반복되던 경험 형태들의 심리적 잔존물로서, 문학 작품을 비롯하여 신화, 종교, 꿈 등에 등장하는 공통의 원초적 심상(primordial images)이다. 이러한 원형은 무수한 문학, 예술 작품 속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서술 구조나 인물 유형 혹은 심상으로 드러난다. 즉 다양한 문화 현상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동질성 혹은 유사성의 구조이자 심상이라는 원형(또는 원형상)은 일련의 보편적이고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구조들을 반영한다. 융의 집단 무의식이 야기한 원형이란 남성이 지닌 여성성이라는 ‘아니마(anima)’와 여성이 지닌 남성성이라는 ‘아니무스(animus)'와 같은 대립적 속성의 원형 외에도 이성적인 본성을 가진 개별적인 인격 존재자로서의 ‘페르소나(persona)’, 자아를 보완하는 작용을 지닌 원형으로서의 ‘그림자’와 같은 다양한 원형이 의식 속 유일한 원형인 ‘자아’와 만난다. 
그렇다면 작업과 연관하여, 홍정우가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추출하는 원형이란 어떠한 이미지일까? 융이 이미 땅, 불, 하늘, 물, 원, 길과 같은 일정한 패턴 구조의 원형을 언급한 바 있듯이, 홍정우의 작업 속에서 발견되는 원형 혹은 원형상이란 가장 기본적인 곡선과 직선 사이에서 발견된다. 홍정우는 자신의 작업에서 직선을 ‘죽은 선’, 곡선을 ‘살아 있는 선’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즐겨 사용했던 곡선 외에도 점차 직선이 마치 집단 무의식이 야기한 원형처럼 함께 자리하기도 한다. 마치 직선이 비루한 제도권 현실을 은유하고 곡선이 그 속으로부터 탈주하는 이상을 은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홍정우의 최근작에서는 직선과 곡선이 만나 이루는 도형과 같은 세계관이 융이 언급하는 ‘집단 무의식 속 원형’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그의 작업을 작가 개인의 몸이 만드는 풍경으로부터 가족 공동체의 몸이 이루는 원형(적) 추상으로 자리 이동하게 만든다. 



홍정우, 감정의 무게 2017-19



홍정우, 너와 상관없는 일 - 식상한 고민 2019-19



홍정우, 아름다운 날들 2022-2




V. 에필로그    
​홍정우의 ‘몸의 기억’이 만드는 마인드스케이프는 어린 시절의 체험적 과거로부터 소환된 무엇이다. 커다란 세상을 대면했던 어린 시절의 몸이 기억하는 강렬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서 길어 올리는 노력은 화면 위에 겹겹이 올린 읽기 어려운 텍스트와 모호한 기호의 더함의 방식과 더불어 그 위에 화면을 스크래치하는 들어내기(혹은 빼기)를 통한 드러냄의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또한 홍정우는 물감층이 겹을 이룬 화면 위에 몸의 언어를 강렬하게 투사하면서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소환한다, 그는 아이였었던 그때의 몸이 보았던 세상을 그리면서 어른이 늘상 하던 손목 관절의 제스처가 아닌 아이의 팔과 몸을 잇는 커다란 몸동작을 흉내 내기도 한다. 그것이 그가 규정하고 찾아 나서는 ‘몸의 기억’이다. 
잠재태로 존재하는 기억-이미지를 현실화하는 그의 작업은 기억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에서 뿌연 풍경을 만든다. 작품의 출발점인 ‘몸의 명료한 체험적 기억’과 달리, 화면 위에 올라선 기억-이미지는 겹겹이 쌓아올린 물감층과 이미지 흔적을 가시화하는 여러 지표와 더불어 흐릿하고 모호한 기억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몸의 풍경에서 추동하는 마음의 풍경이다. 이제 그의 작업은 작가로부터 비롯된 몸의 기억이 타자의 몸과 함께 만나 만드는 불완전하지만 지속되는 마인드스케이프로 확장해 나가는 중이다. (20241108)

출전 /
김성호, 「몸의 기억이 창출하는 마인드스케이프」, 홍정우전 리뷰, 『미술평단』, 겨울호, 2024. 
(홍정우-몸이 기억하는 풍경: 동락(同樂)展, 2024. 8. 29~10. 25, 갤러리박영 서울 청담동 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