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민속악기박물관과 MOU(람 프라사드 카델 관장, 이영진 관장), 2015 ⓒ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제공


이영진은 선천적인 수집가적 기질과 박물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녔다. 어린 시절부터 1세대 박물관인이었던 가족의 영향 아래 자연스럽게 유물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학부에서 외국어를 전공한 그는 외교부를 시작으로 해외주재원 및 외국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이때 많은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지식과 문화의 보고(寶庫)로서 박물관이 가진 힘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박물관이 단지 유물을 모아 놓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살아있는 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특히 회의 상대를 만나기 전에 현지 박물관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한 상태에서 대화에 임하게 되면 심리적 신뢰감이 생긴다는 그의 직관은, 박물관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대단히 유용한 매개임을 인식하게 했다. 실제로 그는 구소련의 일본 주재 대사로 파견된 인물이 일본 문학 박사였다는 사실을 접한 후, 문화와 외교, 정보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깊이 통찰하게 되었고, 이러한 감수성은 훗날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설립 철학으로 이어졌다.

그의 수집 여정은 1980년대 말, 영국을 거쳐 수교 전의 소련으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폐쇄적인 감시 체제에 있었던 당시 소련은 외국인이 수도를 벗어나려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한 제약 속에서 중앙아시아 출장 중에 접한 현지의 민속악기로부터 그는 강한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된다. 한 번도 접한 적 없던, 그러나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정체성 강한 악기들을 통해 중앙아시아가 다채로운 민족이 공존하며 각기 다른 악기 문화를 꽃피워온 지역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각국의 악기 사전과 대표 악기를 수집하며 민족음악과 언어의 뿌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특히 유라시아의 많은 민족이 같은 악기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거나 명칭과 분류법이 뒤섞이는 혼란을 겪는 것을 보며, 음악인류학과 어원학이라는 분야에 눈을 뜬다. 외국어를 전공한 이력이 그에게 다양한 방언과 명칭에 관심을 두게 했고, 이 과정에서 수집이 단순한 소유의 차원을 넘어 인류학적 이해의 과정임을 깨닫게 했다.

2003년, 마침내 그는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설립하게 된다. 단순한 개인 수집가로 머무르지 않고, 전문 분야를 다루는 박물관인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50대 중반에 대학원에 진학해, 박물관미술관학을 전공하면서 악기와 음악인류학 분야의 외국 원서를 직접 번역·분석해가며 연구에 매진한다. 이런 노정에서 발현한 철학은 창의적 인성교육, 문화 감수성 향상, 세계시민의식 함양이라는 박물관 운영 목표로 이어져, 박물관이 단순히 전시 관람에 그치지 않고 어린이, 청소년, 일반 대중,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되었다. 악기를 단지 음악 연주의 도구가 아닌 인류의 삶과 상징, 신념과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로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이영진의 박물관론은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 또, 부산 용두산 공원에 부산관(2007-2013), 강원도 영월에 영월관(2009-2019)을 각각 개관하여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실질적인 박물관학 이론을 현장에서 구현해보고자 박물관학 전문서적에 수록된 다양한 운영 이론들을 직접 적용하였고, 국내외 박물관과의 교류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러시아 부랴티야공화국, 일본, 조지아, 네팔 등지와의 국제 교류뿐 아니라, 국내 다양한 교육기관과 협업을 통해 박물관교육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러시아연방국립부랴티야민족학박물관과 MOU(송의섭 부관장, 쇼볼로바 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 관장), 2014
ⓒ 영월군청 제공


전시 기획에서도 매해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여 깊이 있는 주제 전시를 시도했다. 2017년에는 악기 연주 인형들을 중심으로 《세계 인형들의 오케스트라》전을, 2018년에는 악기의 종교적 기원을 다룬 《종교와 악기》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종교음악 전문가와의 학술포럼, 대중강연을 통해 학문성과 대중성을 모두 확보한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2019년에는 악기의 세속화 과정을 《노래하는 장난감 악기》전으로 풀어냈고, 죠하프(Jew’s Harp)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악기의 상징과 분포를 조망하였다. 이후에도 《박에서 나온 악기》(2020), 《치터의 계보를 찾아서》(2022), 《세계 하프와 리라》(2023), 《기타의 탄생》(2024), 《쇠를 울려 세상을 깨우다》(2025) 등의 기획 전시는 박물관의 학술적 깊이와 기획력을 입증해주는 실천적 작업이었다. 특히 《악기 동물원》(2021)에서는 자체 제작한 스토리텔링 애니메이션을 온라인 공개하여,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도 2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해 디지털 전환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외부 기관과의 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1년 전곡선사박물관 개관 기획전 《음악의 기원》과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개관기념 특별전은 네덜란드 라이덴박물관과 협업한 것이었고, 부산과학체험관의 《소리로 체험하는 세계민속악기》, 2021년 국립광주과학관의 《소리, 세상을 담다》, 2024년 세종문화예술회관의 《세계민속악기》 특별전 등은 박물관이 외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확장해낸 대표적인 예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전시실

한편, 이영진 관장은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인간과 악기』, 『서남아시아의 음악문화』 등의 저서는 세종도서로 선정되며 학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고, 박물관의 연구 역량을 집약한 논문과 보고서들은 관련 학계에 마중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한, 그는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 아시아문화원 등의 과제를 수행하며 악기라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분류체계를 정립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2019년 말 영월관과 헤이리관 통합 후 현재는 본관만 운영 중이지만, 그는 여전히 박물관을 통해 긴 호흡으로 내실을 다지고, 지역사회와 인류에 이바지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앞으로도 ‘악기를 통해 세계를 보고, 사람을 이해하며, 문화를 잇는’ 박물관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겠다는 포부다. 이영진이 걸어온 길은 단순한 수집가를 넘어, 악기를 매개로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성을 조망해온 학문적, 실천적 탐험이며, 동시에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사람과 세계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다리라는 점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 이영진(李泳鎭, 1959– ) 부산 출생, 한국외대 노어학 학사, 중앙대 대학원 박물관미술관학 석사. 파주박물관미술관협의회 회장(2023- ),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2019- ), (사)경기도박물관협회 이사(2020- ), 외무부 구주국 동구과(課) 소련 담당(1987-1988), 독일 라이프찌히 IAB GmbH S.Manager(1999-2001).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설립(2003.9.27). 대통령소속 인문정신문화특별위원회 위원(2016-2017),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 정책위원장(2018-2020) 역임. 국무총리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경기도지사상, 파주시장상 수상. 『악기박물관으로의 여행』(2009, 현암사), 『인간과악기』(2016, 모노폴리) 등 저술, 기획출판물·연구논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