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무엇 - 공간과 장소에 관한 조형적 성찰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화분 식물’이 사는 곳 - 여기, 거기, 저기  
사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가방에 담겨, 어떤 탈 것에 실려서 그렇게 움직일 뿐이다. 지느러미나 날개가 없어서 또는 발이 없어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의 운명이다. 날개나 발이 있는 누군가의 의지에 이끌린 채, 혹은 발보다 빠른 바퀴를 달고 있는 탈 것에 실린 채, 사물은 수시로 자기 거주지를 바꾼다. 사물의 거주지는 임시 거주지일 뿐이다. 한곳에 오래 머물고 그 안에 살고 있어도 언제 어디로 이주가 다시 시작될지 알 길이 없다. 
여기 예민한 사물이 있다. 꽃과 식물과 같은 생명체와 배양토와 같은 유기물을 잔뜩 안고 사는 화분이다. 그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이 또한 일반 사물과 별반 차이가 없으나, 누군가 정해 준 거주지에 비교적 오래 사는 까닭에 그리고 꽃과 식물과 같은 생명체와 이웃하고 사는 까닭에 자신을 간혹 식물의 한 부분인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분은 자신을 생명체로 스스로 오인한 사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화분에 담긴 식물’, 즉 ‘화분 식물’은 어떠한가? 그 또한 예민하다. 누군가 정해 준 거주지에 비교적 오래 사는 까닭에 자신을 그저 자연으로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한 까닭이다. 땅에 뿌리를 내렸으니 그곳이 대지인 줄 알았던가? 뿌리를 내리다가 누군가 비좁아진 화분을 분갈이하면서 이웃인 옛 화분을 본의 아니게 잃어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식물은 화분을 대지로 생각했으리라. 그러니까 ‘화분 식물’은 화분을 자연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운명적으로 거주한 이 대지로부터 떠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서라! 화분 식물은 화분과 함께 거실 그늘에서 햇볕 좋은 베란다로 옮겨지기도 하고 혹은 누군가의 축하 화분으로 오토바이의 바퀴 위에 올라타고 어딘가로 먼 길을 떠나기도 한다. 혹은 말라비틀어져 주검이 된 채 누군가로부터 영원히 버림을 받기도 한다. 생명체가 마치 사물처럼 간주된 셈이다. 
그렇다. 상황은 다르지만, ‘예민한 사물인 화분’이나 ‘예민한 화분 속 식물’, 즉 ‘화분 식물’은 누군가에게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간주된 채 움직인다. 화분 식물은 여기에서 거기 그리고 저기로 이동한다. 주지하듯이, ‘여기’는 “말하는 이에게 가까운 곳을 가리키거나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고 ‘거기’는 “듣는 이에게 가까운 곳을 가리키거나,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곳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다. 또한 ‘저기’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로부터 멀리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다.
그렇다면, 이윤빈의 작품 속에서 ‘화분 식물’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도처에 자리한다. 여기에, 거기에, 그리고 저기에 자리한다. 그녀의 화분 식물은 이미 거기, 혹은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한 것이거나 또는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거기로 이동할 것이다. 그림 속 진실을 알 길이 없으나, 틸란드시아 같은 뿌리 없는 ‘화분 식물’을 온실에서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천장 아래로 이동한 것이거나, 몬스테라 델리오사와 같은 뿌리 가진 ‘화분 식물’을 친구의 축하 선물로 꽃집에서 방금 이주한 작가의 작업실 입구로 이동한 것일 수 있다. 또는 떡갈잎고무나무 화분을 신축한 사무실로 곧 이동하기 위해 거실에 모아 둔 것일 수도 있고, 말라버린 청페페 화분을 버리기 위해서 이동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윤빈의 작품 속 ‘화분 식물’이 있는 공간을 카페, 가게, 사무실, 작업실 등으로 막연하게 유추할 수 있지만, 외견상으로만 보아 그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이 ‘화분 식물’을 그린 작품의 제목을 각각 ‘신풍하동로 19번길’, ‘구좌읍 해맞이해안로 1026’, ‘동홍서로 96번길 6’, ‘남중로 107’, ‘돋질로 302번길 27’처럼 제주도와 울산시의 구체적 주소지로 표기한다.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텍스트의 표기 방식을 통해서 그녀는 각 작품을 제작할 당시 해당하는 화분 식물이 그녀가 체류했었던 제주나 울산의 ‘그곳’에 현존했던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즉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진이 가리키는 흔적의 미학을 어떠한 주체나 사물이 “거기에 있었다(Çà a été)”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그 화분 식물이 “거기에 있었다”라고 확증해서 알려주는 셈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여전히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윤빈은 작품 속에 드러낸 ‘화분 식물’이 사는 곳을 구체적 주소지로 ‘여기’라고 가리키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거기’, 또는 ‘저기’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윤빈, 구좌읍 해맞이해안로 1026, 2022, 순지에 수묵담채, 46.0x45.5cm




II. 유목하는 검은 식물 – 부유하는 환영의 공간 
이윤빈의 작품 속 ‘화분 식물’은 여기, 저기, 거기에 잠시 머무르거나 여기, 저기, 거기 사이를 오간다. 가히 유목하는 ‘화분 식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작가는 중간 색조의 수묵 담채로 그림을 그리면서 왜 유독 ‘화분 식물’을 검게 그리는가? 구륵법(鉤勒法)으로 포착한 사생 기반의 풍경에서 작가는 사물 형상에 맞게 갈색, 혹은 녹색, 푸른색의 담채로 사물의 살을 입혀내지만, 유독 화분 식물의 경우에는, 식물의 실루엣 사이를 농묵을 채워 올려냄으로써 ‘검은 식물’을 만든다. 왜? 이윤빈은 모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검은색을 사용하는 까닭이 “대상의 생명성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마치 나무의 주검이 된 숯처럼 까맣게 칠해진 화분 식물은 생명성이 탈각된 존재처럼 드러난다. 
이해할 법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분 식물은 삶의 인공적 환경 속에 인간의 원고향인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한 인간의 소소한 욕망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에, 그 생태적 위상이 ‘인공적 자연’ 혹은 ‘의사(疑似) 자연’에 가까이 들어앉은 까닭이다. 화분 식물은 마치 녹지를 인공의 환경 속에 꾸민 정원(庭園)과 같은 인공적 자연이되, 작은 규모의 것이라는 점에서, 정원과 화분 식물은 의사 자연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닮아있다. 실내의 공간 안으로 들어온 자연, 즉 화분 식물은 ‘이식된 자연’이자 ‘인공 자연’으로서의 존재적 위상을 지닌다. 대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잃은 존재라서 검은색 주검처럼 표현한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의사 자연인 화분 식물을 자연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화분 식물은 순연한 자연 그 자체는 아니지만, 자연의 정수를 함유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져 도시민에게 반려 식물로서 심리적 안정을 제공한다. 미세 먼지로부터의 불안을 잠재우는데 효과적인 산세비에리아나 틸란드시아와 같은 공기 정화 식물도 그렇지만, 전자파 차단에 효과가 있다는 선인장이나, 번식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금전운을 몰고 온다는 금전수는 이러한 반려 식물로서의 위상을 견지한다. 
그렇다. 화분 식물은 인간이 떠나온 자연이라는 원시향을 일정 부분 다시 대면하는 ‘반려 식물’로서 힐링의 효과를 제공한다. 그래서일까? 도시민은 희귀한 열대 식물들로 작은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홈가드닝(home gardening)의 욕망이나 방울 토마토와 같은 작물을 취하고자 하는 홈파밍(home farming)의 욕망을 ‘화분 식물’을 통해서 소소하게 실현한다. ‘반려 식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자연을 다시 정복하고 구속하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분 식물’은 어쩌면 문명이 발아하면서 시작되었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과 구속의 욕망이 현대에 이르러 팬시(fancy)의 방식으로 ‘재배치된 자연’이자 ‘재구성된 자연’이라고 칭할 만하다. 
이윤빈은 검은색을 통해서 ‘관조의 거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근원적 의미의 대자연이나 자연의 실재성과 대치하는 상태 혹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여 유목하는 상태의 화분 식물을 검은색으로 표현하여 관조의 거리를 두고자 한다. 무엇으로부터의 관조인가? 실재성, 근원적 본성에서 이격된 상태인 허상과의 간극을 지켜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대 지역이 원고향인 열대성 화분 식물들을 제주나 울산에서 키워가는 풍광은 관광객을 위해 장치된 허상일 뿐 제주도나 울산시의 원주민이 삶 속에서 맞이했던 풍광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해 제주도 혹은 울산시 안에서의 열대성 식물의 생명력은 실상 ‘사람들이 원하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유목의 풍경이자 환영’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유목하는 검은색의 화분 식물은 실재성과 대치되는 환영의 공간에서,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를 오가며 부유한다.
 



이윤빈, 오송생명로 206, 2024, 순지에 수묵채색, 193.3x130.3cm



III. 몸이 기억하는 검은 사물 – 공간에서 장소로 
이윤빈의 작업에서 실재성과 대치되는 환영의 공간에서 부유한 채 유목하는 것은 검은 화분 식물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일상의 주변에서 맞닥뜨리고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한 ‘검은 사물’ 또한 그러하다. 그 사물들이란, 펼쳐 놓은 기다란 종이 박스, 구겨진 종이, 찌그러진 캔, 과일이나 물건을 담는 비닐 그물망, 페브릭 재질의 얇은 포장지가 싸고 있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물, 쓰레기통 프레임을 싸고 있는 비닐 포장, 반도체 칩, 플라스틱 판 등 그 구체적 쓰임새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그러한 것들로 보이는 사물들이다. 
이윤빈은 이러한 사물들을 순지로 덮어 프로타주(frottage) 기법으로 탁본을 뜨듯이 사물 형상을 포착한다. 먹을 통해 판화 기법으로 사물 형상을 떠낸 까닭에 이미지는 마치 몰골법(沒骨法)으로 된 수묵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외곽선이 흐릿한 거무튀튀한 유령과 같은 형상을 드러낸다. 작가는 사물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러한 연작에 〈이동하는 잔재〉라는 제목을 붙였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혹은 가방에 넣어진 채 또는 탈 것에 실려, 여기에서 저기로, 또 거기로 이동하는 사물들은 유목의 여행 중에 하나둘 본체로부터 떨어져 버려지기도 한다. 그것들을 채집해 하나씩 증명사진을 찍듯 사물의 표면을 기록한 이 연작은 어떤 면에서 각 사물의 존재적 위상을 부여한 ‘출생 사진’의 역할을 하거나 버려지거나 죽은 뒤 남은 잔재와 같은 의미의 ‘영정 사진’의 위상을 도맡기도 한다. 
누군가(혹은 작가 이윤빈) 소유했던 사물들, 누군가(혹은 이윤빈의 몸) 기억하는 사물들은 이제 누군가에서 떠나 이윤빈의 작업 안에서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 혹은 그것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사건’의 흔적으로서 유령처럼 부활한다. 누군가의 몸이 기억하는 검은 사물들인 셈이다. 역으로 말해, 이 검은 사물들은 누군가의 몸을 기억하는 또 다른 주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메를로 퐁티(M. Merlau-Ponty)의 언급처럼 사물의 살(chair)로 가득 찬 상호 작용의 사물 주체인 셈이다. 이윤빈이 여러 개의 ‘사물 흔적’을 커다란 순지 위에 떠 놓은 작품에 〈현상의 사물들〉이라 이름 붙이고 있듯이, 이 글이 그녀의 검은 사물을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해설하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흥미로운 것은 검은 사물을 기록한 〈이동하는 잔재〉 혹은 〈현상의 사물들〉 연작은 표구된 개별 작품으로 벽면에 전시되기도 하지만, 여러 겹의 긴 두루마리 형태로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매달리게 설치하기도 한다. 마치 서낭당의 제의적 풍경처럼 보이는 이러한 설치 방식은 죽은 사물들을 위한 진혼제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이윤빈의 작업에서 검은 사물은 비교적 작은 크기에만 머물지 않고 덩치를 키운 부표, 셸터(shelter), 집, 혹은 거대한 배까지로 확장한다. 검은 바다 위에 쓰러질 듯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표를 그린 동명의 작품 〈부표〉(2023)는 고유의 색을 지닌 사물로 표현되지만, 그것의 의미상 본질은 ‘검은 사물의 연장’인 셈이다. 
셸터 혹은 집으로서의 테쉬폰(Ctesiphon)은 어떠한가? 원어 발음대로 크테쉬폰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2,000여 년 전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가까운 ‘(크)테쉬폰’이라는 페르시아의 옛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건축양식을 지칭하기도 한다. 국내에는 제주도 성이시돌목장(St. Isidore Farm)에 1954년 제주에 온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고(故) 맥그린치(Patrick McGrath) 신부가 제주의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산간의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고 1961년 정식으로 낙농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과정에서 아치형의 테쉬폰이라는 건축양식을 도입했다고 전해진다. 이윤빈은 작품 〈테쉬폰〉(2022)을 통해 ‘검은 사물의 확장’을 개념적으로 선보인다. 장지에 수묵담채로 그려진 이 작품은 테쉬폰을 덮거나 테쉬폰을 뚫고 자란 듯한 ‘검은 나무’뿐만 아니라 검은 테쉬폰과 어우러진 전체적인 풍경을 마치 불에 그슬린 것처럼 검댕이 묻은 듯한 화면 효과를 드러낸다. 




이윤빈, 테쉬폰, 장지에 수묵담채, 112.1x162.2cm, 2022


무엇보다, 이윤빈의 작품에서 ‘검은 사물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압권은 울산의 장생포항에 정박해 있는 배와 주변 풍경을 그린 〈장생포항〉(2023) 연작으로 보인다. 사생에 기반한 이 풍경은 1960~70년대 포경산업이 절정에 이르렀던 장소였으나, 이제는 어선, 바지선, 유조선과 관광객이 오가는 어수선한 관광지로 탈바꿈된 장소인 장생포항의 ‘지금, 여기’의 순간을 거무튀튀한 분위기로 선보인다. 이윤빈은 이러한 극적인 분위기의 표현을 위해 비단이나 장지의 뒷면에 채색하고 앞면을 반투명 상태로 비치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한다. 이때 장지 뒷면에 연필로 스크래치를 통해 상처를 내고 다시 먹을 입혀 치유하는 방식을 병행함으로써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감성적 두께의 ‘커다랗고도 검은 사물’을 생산한다. 
자본의 이동, 노동의 생산, 소비의 변화를 창출하는 장생포항은 이제 물리적 공간에서 특화된 장소성의 자리로 이동해 간다. 주체와 타자의 몸이 기억하는 검은 사물이 공간에서 장소로 자리 이동한 셈이다. 부감법과 커다란 화면을 이어 붙인 대작으로 선보이기도 했던 이 연작은 검은 배의 몸체와 검푸른 녹색 분위기를 통해 이 글이 주목하는 ‘검은 사물의 확장’에 있어서 효과적인 풍경을 선보인다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이윤빈, 이동하는 잔재3, 2024, 순지에 먹, 35.0 x 18.0cm




이윤빈, 현상의 사물들, 2024, 순지에 먹, 112.2 x 112.2cm




IV. ‘사물의 살’로서의 검은 점 - 보이지 않은 곳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이윤빈의 연작들-‘검은 식물 화분’, ‘검은 사물’, 그리고 ‘검은 사물의 확장’ -은 자본의 이동, 노동의 생산, 변화되는 소비의 장을 따라 이동하고 변화하는 흔적을 만든다. 그것은 이전의 공간과 장소를 소멸하고 새로운 공간과 장소를 잉태하게 만든다. 공간과 장소를 부유하던 ‘검은 식물 화분’이나 ‘검은 사물’ 그리고 이전에 번성했던 산업 공간이 남긴 폐허와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관광지로의 변모와 같은 ‘검은 사물의 확장’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공간과 장소의 변이를 추적해 온 이윤빈은 또 다른 연작에서 더욱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공간과 장소의 존재를 질문한다. 이른바 ‘검은 점’이 화면에 자리한 연작이 그것이다. 
여기 풍경 속에 ‘검은 점’이 하나 있다. 이 ‘검은 점’은 벌판, 들판, 바다, 하늘과 같은 물리적인 장소를 X, Y 좌표로 특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풍경에 패턴화된 풍경을 만들면서 공간과 장소에 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윤빈이 작품 속에서 명명하고 호명한 ‘검은 점’의 실체는, 엄밀히 말하면 1차원 점이 아니라 ‘검은 원형’으로 크기를 키운 2차원 평면일 따름이지만, 재현된 풍경 앞에 ‘검은 점’으로 제시되는 유효한 상징이 된다. 이윤빈의 작가 노트에 따르면, “검은 점은 우리가 바라봐왔던 막연한 공간에 대한 목적성과 잊고 있던 장소에 대한 본질을 의미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 ‘검은 점’은 우리의 시선에서 주목도를 높이는데, 그녀는 이러한 시선의 태도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공간과 장소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상기하도록 만들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검은 점을 돋보이게 만드는 하얀 사각형은 그녀의 언술에 따르면, “어떤 공간임과 동시에 특정 위치가 다른 위치에 우선권을 갖지 않는 관점인 공간”이며, “존재하지만 어떠한 것으로 정의할 수 없는 공간”이자 “비개인적인 익명의 공간”이다. 즉 이것은 ‘비어있는 공간, 혹은 여백의 공간’으로 언급되면서 공간의 존재를 질문하는 이미지가 된다.
이처럼 재현된 풍경 앞에 제시된 ‘사각형의 비어있는 공간’과 ‘검은 점’은 공간, 장소와 관련해서 일련의 유효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무엇인가? 
애초에 〈점-바다〉(2022) 연작에서처럼, 바다의 수면 위에 검은 점이 그려진 종이 하나가 떠다니는 풍경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이 연작은 이제 재현된 풍경의 앞면에 등장해서 재현(representation)한 풍경이라는 ‘현실 공간’과 제시(presentation)한 검은 점으로 된 ‘상징 공간’을 겹쳐 놓는다. 작품, 〈검은 점_보리밭3〉(2022), 〈검은 점_황금보리밭2〉(2022), 〈검은 점_억새밭5〉(2023)은 이러한 재현된 현실 공간과 제시된 상징 공간이 맞물리는 패턴화된 풍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낯선 이미지를 제시하고 공간과 장소에 대한 본원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연작에서 ‘검은 점’은 ‘검은 사물’을 확장하는 이전의 연작들과 달리 검은 사물을 응축하고 존재론적으로 환원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이 ‘검은 점’은 작품 〈검은 점_주상절리〉(2023)에서처럼, 특정 공간을 재현한 풍경 앞에서 이러한 질문을 지속하는 상징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또한 작품 〈검은 점_몬스테라〉(2024)에서처럼 이른바, ‘검은 식물 화분’ 앞에서 자리할 뿐만 아니라, 화분과 분리된 식물 이미지 앞에 자리하기도 한다. 〈검은 점_소철〉(2024) 〈검은 점_필로덴드론〉(2024). 〈검은 점_박쥐란〉(2024)과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윤빈, 검은 점_무심천9, 2024, 장지에 수묵채색, 18.0 x 35.0cm




이윤빈, 검은 점_석양2, 2024, 장지에 목탄과 수묵채색, 70.0 x 70.0cm



한편, 이윤빈은 2022년 개인전인 《검은 점은 흔들려도 검은 점》에서 억새밭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회화 위에 낮은 높이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흰 박스를 설치하고 그 안에 검은 구(球)를 올려서 관객이 그것을 이리저리 굴려보게 만든 작품을 출품한 바 있다. 전시명과 같은 이 작품은 끊임없이 주체와 공간이 상호 반응하고 지속하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한다.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것은 일부인 뿐이며 중요한 것은 사각 프레임과 그 안의 본질인 ‘검은 공’이 위치를 변화하며 맺는 관계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렇다. ‘굴러가는 검은 공(점)’은 도처에 있다. 우리가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맞닥뜨리는 절대적인 하나의 공간은 보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나아가 메를로 퐁티식으로 말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안에는 ‘사물의 살(chair)’로 가득한 까닭에, 보는 주체와 보이는 공간은 관계 속에서 위치를 바꿔가며 상호 작용한다. ‘사물의 살’로서의 검은 점이란, 굴러가는 검은 공처럼 보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탈대상화된 보기의 주체’로 인식되면서 인간과 상호 작용하는 주체로 등극한다. 
이윤빈의 작업을 해설하는 이 글에서 관건은 이제 보이는 현상 너머에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하는 것이다. 공간 담론에서 이 비가시성은 가시성이 배제한 잔여물이기보다 본질적 존재다. 비가시성의 세계에도 사물의 살은 가득하기에, 공간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보는 주체가 된다. 남겨진 관건이 있다면, 메를로 퐁티가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을 ‘깊이(profondeur)’로 파악했듯이, 관객은 이제 ‘검은 무엇’을 통해 ‘공간과 장소에 관한 조형적 성찰’에 골몰하는 이윤빈의 작업이 함유한 비가시성 세계의 ‘깊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작품 안에서 ‘흔들리거나 굴러가는 검은 점’ 혹은 ‘보이지 않는 검은 점’을 찾아보면서 말이다. (2024. 11. 12)

출전 /
김성호, 「검은 무엇 - 공간과 장소에 관한 조형적 성찰」, 『이윤빈』, 2024전속작가제 지원사업 자료집,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