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아버지의 그림에는 피가 묻었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아들인 화가 박성남으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나는 크게 놀랐다. 서민의 평온한 일상을 담은 그림에 피가 묻어 있다니!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니었다. 선친 아래서 자란 아들이 보기에, 식민지와 해방기, 전쟁기 그리고 신산한 전후 시기를 살았던 박수근의 그림은 피맺힌 절규였다. 오롯이 한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으로서 박수근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의 고통과 절망, 갈등과 연민 그리고 사랑과 희망의 감정을 그림 속에 담아냈다. 이 대화를 나눈 이후 나는 평화와 예술에 대해 새롭게 각성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예술가의 삶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근본을 다시 생각한 것이다.
박수근 그림의 저 평온한 일상 뒤에 담긴 신산한 삶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 그것은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과 공감하며 그들과 정서적으로 연대한 예술가 박수근 예술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박수근미술관 큐레이터와 관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박수근미술연구센터 대표를 맡고 있는 엄선미는 박수근정신을 자신의 삶 속에 온전히 모시고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이자 큐레이터다. 박수근미술관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박수근 작품 연구와 보존, 전시, 교육 등 미술관 운영 전반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박수근 작품의 수집과 관리, 연구 활동을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주력했다. 전시와 교육 등 프로그램을 배치하기 이전에 뮤지엄 다운 근본을 갖추는 일을 중요시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다양한 미술관 프로그램으로 박수근을 넓혔다. 그는 과거의 박수근을 동시대와 연결하는 활동으로 포스트박수근의 길을 닦았다. ‘양구와 박수근’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는 박수근정신을 잇는 동시대 작가들과 협업하며, 양구의 시민과 학생을 만나는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창작스튜디오를 통하여 신진작가를 발굴 지원하는 등 박수근의 지평을 넓히는 활동을 했다. 그는 석사학위 논문인 「지역 작가미술관 활성화를 위한 학교 연계 교육프로그램 운영 방안 연구: 박수근미술관의 사례를 중심으로」(2007)에서 미술관 운영 전반과 특히 교육 사업의 경험을 학술적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현재 노근리국제평화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엄선미는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한 전시와 더불어 학술 행사와 세미나의 기획과 진행을 담당하고 있다. 2024년에는 노근리평화기념관 특별전 《서용선: NOGUNRI+너머》(2024.4.27-2025.7.31)를 기획했다. 이 전시와 연계한 ‘역사화의 의미와 가치: 서용선의 연작’(1999-2024) 세미나 좌장으로서, 그는 노근리사건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고 했다. 2025년에는 노근리사건 75주년을 맞아 《이순종·정정엽; 75년 동안의 해와 별》(2025.9.13-2026.7.31)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노근리사건을 다원적인 현대미술과 융합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의미론적으로 재해석하고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렇듯 박수근과 노근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엄선미정신의 핵심은 인권과 생명의 가치를 지향하는 평화예술에 있다. 양구라는 분단 현장에서, 노근리라는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그는 큐레이터와 디렉터의 길을 걸으며 평화를 짓는 예술, 인권의 뭇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 지역적 가치를 온전히 받아안으며 문화사회의 지평으로 확장하는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 박수근 예술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노근리의 인권과 평화 정신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그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성찰하고 그것을 현재와 미래의 가치로 확장하고자 하는 평화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 엄선미(1972- ) 경희대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석사,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수료. 박수근미술관 큐레이터 및 관장 역임(2010-23). 《박수근 탄생100주년 특별전》(2014), 《오마주밀레, 오마주박수근》(2021-22), 《박수근의 시간, 미석의 공간》(2022-23) 등 전시기획. 2022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현 박수근미술연구센터 대표, 노근리국제평화재단 학예연구부장(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