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미술 과목 담당 교사를 담임으로 만났다. 그림에 소질을 알아차린 담임교사에 의해 미술을 시작했다. 그래도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2학년이 되어서는 새로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미술을 그만두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명문고 합격률이 학교의 위상을 결정한다고 여긴 까닭에서다. 그림은 지금도 당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분야라고 그는 말한다. 미술에 특별한 열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한번 시작한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 탓도 있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했고,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 나아갔다. 이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평생을 천직처럼 후학을 양성해 왔다. 대담미술관 정희남 관장의 얘기다.

송광사 주지 영조스님, 정희남 관장, 도종환 시인(전 문체부 장관), 2008
대담미술관은 2010년 전남 담양에 문을 열었다. 정희남이 대도시 광주나 고향 화순이 아닌 담양에 미술관을 설립한 것은 복합적인 이유에서다. 미술관 건립지로 화순과 나주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담양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았고,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등 조선의 선비 정신과 유교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역사성도 그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또한, 이를 상징하는 대나무도 그를 끌리게 했다.
정희남은 미술관을 통해 이런 담양의 역사성과 환경적인 특성을 담아내고 싶었다. 미술관의 이름은 사람과 소통한다는 ‘대담(對談)’에서 비롯됐지만, ‘대(竹)’와 ‘담(潭)’ 즉, 담양의 뿌리와 숨결을 잇겠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고려했다. 정자와 대숲, 여름이면 붉게 타오르는 백일홍이 어우러지는 담양에서, 대담미술관은 지역과 예술,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싶었다.

정희남 관장, 2025
미술관 건축은 담양의 푸른 대숲과 창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을 예술과 교합하겠다는 의도를 담아 정희남이 직접 디자인했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감성으로 끌어낸 미술관 건축은 많은 건축가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었고, 김춘수, 승효상과 같은 저명한 건축가로부터는 예술과 자연이 잘 조화를 이룬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미술관 건축은 ‘함께 느껴요. Eco Life’를 슬로건으로 미술관이 표방하는 고유기능뿐 아니라, 예술과 자연이 일상에서 하나 되는 특별한 경험을 관람객들에게 제공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전시와 함께 주변 자연경관도 향유하며 사계절의 변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미술관 활동은 담양의 지역성을 기저로 기획해왔다. 《대나무, 생활예술이 되다》, 《담양을 말하다》 등의 기획전은 이를 잘 말해준다. 또한, 대만, 중국, 일본 작가가 참여한 국제 레지던시는 지역의 문화적 뿌리를 세계와 소통하고자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대담미술관은 개관 이후 전통에 기반을 둔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르의 전시도 기획해왔다. 특히, 아르헨티나 작가를 비롯해 아프리카 쇼나 조각작품 등 각국의 지역성을 보여줬던 개관전은 지역성이 곧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예술의 한 흐름을 명징하며,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예술적 감흥을 제공했다. 정희남은 우리 전통과 자연에도 관심을 두고자 했다. 2012년 돌쩌귀나 부젓가락, 부지깽이, 우리 옛 농기구 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온 작가 이영학의 《이영학》전과 담양의 죽공예와 참빗 명인 등을 초청한 전시, 2013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예술가의 눈으로 재조망한 생태예술가 김주연의 《Metamorphosis Vll》전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에 머물지 않고 그는 설치, 조각, 미디어아트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프로젝트도 시도했다. 또 신진 작가 발굴은 물론, 중견과 원로 작가들과의 협업 등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도 앞장섰다. 올해는 미술가와 플로리스트의 콜라보 전시를 기획했고, 작가 작업실을 미술관 안으로 옮겨오는 등의 실험적인 시도도 해오고 있다. 미술관 앞 관방천(官防川) 징검다리에서 지역의 특색을 녹여낸 미디어아트 쇼, 지역 주민의 난타 공연, 대중가수와 퓨전국악 연주자가 참여한 징검다리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미술관은 예술로 사회적 연대감을 강화하고, 지역민에게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까운 분들이 예술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희남은 이를 위해 미술관이 위치한 향교리(鄕校里) 지역 주민에게 미술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그림이 뭐다요?”, “나는 그림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서라.”, “그거 그려서 뭐던다요?” 고령자가 많은 지역 주민들은 그림의 ‘그’자도 모를뿐더러 연필을 쥐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처음에는 잡지에서 먹고 싶은 음식 사진을 오려 붙이게 하는 것으로 흥미를 유도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붓만 쥐면 ‘쓱싹쓱싹’ 작품을 그려내는 7명의 향교리 아티스트로 변모했다. 전시가 있을 때면 오프닝에 초청하는가 하면 장수를 기원하는 사진도 찍어주고, 다문화 체험도 주도하는 등 어떻게 하면 노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를 함께 모색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동네 곳곳에서 향교리 아티스트의 예술적 감성을 엿볼 수 있게 조성한 공간이 동네방네미술관이다.

향교리 아티스트와 정희남 관장, 2018
한편, ‘Who Am I’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창의적 미술 교육, 노년층을 위한 예술 치유 활동 등 다양한 연령대와 계층을 대상으로, 예술이 단순히 감상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삶과 소통하는 중요한 매개임을 보여준 맞춤형 프로젝트이다. 정희남이 직접 개발한 이 프로그램으로 참가자들은 예술을 통해 자아를 탐색하고 이해할 기회를 경험하고 있다. 1,000여 차례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교육 성과를 인정받아 2024년에는 지원기관으로부터 ‘올해의 우수 박물관 미술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역시 그가 기획한 ‘포레듀케이션(숲+교육, Forest&Education)’은 지역 문화예술과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대나무숲 죽녹원과 공예품, 건축, 디자인을 접목한 프로그램이다. 2025년에는 지역 초등학교와 MOU를 체결하는 등 지역민과 지역사회의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지역에서 미술관은 그 어떤 것도 마다 말고 담아내야 하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관장은 스펀지 같은 포용력을 갖춘 기획자이며 실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미술관은 물리적인 공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담’이라는 또 다른 의미, 대담(大潭) 같은 깊은 못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희남 관장의 대담한 대담미술관론이다.
담양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대담미술관의 ‘모두를 담는 예술의 그릇’을 향한 도전은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처럼 계속되고 있다.
- 정희남(丁熙男, 1958- ) 전남 화순 출생. 전남대 미술교육 전공, 이화여대대학원 서양화 전공 석사, 미국 로욜라매리마운트대 대학원 미술치료학 수학. 광주교대 미술교육과 교수 및 대학원장 역임, 현재 광주교대 명예교수. 유럽문화예술학회 홍보이사, 한국예술치료학회 학술이사. 광주MBC라디오칼럼 고정 출연. 월간미술세계 올해의 작가상(1996),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2020), 전남도지사 표창(2016), 전남박물관미술관 유공자 표창(2017) 수상. 『신나는 미술교실』(1994, 생활지혜사), 『재미있는 그림 자라는 창의력』(1999, 생활지혜사)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