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필름에 담긴 감성과 기억의 재구성
하계훈 | 미술평론가
예술가의 창작 행위는 작가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영감과 열정이 어느 순간에 최적의 모티브와 만나게 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된다.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의 삶은 언젠가는 도약의 순간이 오게 되어 있으며, 그 순간도 예술가들의 창작 행위와 유사하게 자신 내부의 열망과 그것을 수용하는 외적 상황이 맞아떨어질 때 폭발적인 성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창작에 있어서 이러한 내부와 외부의 시기적절하고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순간은 작가가 계획을 세우고 반복적인 실험과 시도의 끝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순간에 우연히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이 한순간도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준비된 우연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 김범수의 작업 과정은 후자의 경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한국에서 미술 대학 생활을 하던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국제 하계 올림픽을 치르는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개방되는 속도를 높이는 시기였으며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정책적 지원이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술학도들로서는 외국 미술의 최신 정보가 이전보다 많이 유입되던 시기였으며 특히 백남준의 작업에 의해 더 넓은 세상이 소개되고 젊은 작가들에게 이전보다 과감한 창작활동이 격려되던 시기였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작가는 학창 시절을 벗어나는 시기에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신을 부르는 연락에 응하면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외국 유학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준비할 것이 많겠지만 이렇게 떠나게 된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 유학 생활에서 김범수는 수업 시간 과제를 위한 작업에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가 있었다. 김범수의 학창 시절은 작가들의 관심과 활동 면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괴리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작가에게는 쉽게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김범수는 벼룩시장을 방문하여 오래된 영화 필름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작품에 도입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지도교수가 지나치듯이 던진 한마디 조언에서 결정적으로 지금의 작품에 대한 영감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하나의 에피소드로 작가의 창작 동기와 과정을 압축하는 것은 작가의 예술 활동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적지 않은 위험성이 있으며 자칫하면 작가의 작품에 접근할 때 본질을 벗어난 흥미 위주의 왜곡된 해석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으므로 신중함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조각을 전공한 김범수는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당시 미국 미술계를 주도하는 경향의 조각에 관심을 두고 작품의 방향도 이 범위 안에서 구상하며 아이디어를 개발해 나가고 있었다. 작가가 유학 생활하던 시기인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미국 미술계는 1970-80년대의 트랜스 아방가르드와 신표현주의 미술을 이어받아 기존의 미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모색하는 분위기가 충만한 시기였다.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당시 미국 정부는 레이건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대소련 강경 입장, 그리고 미국 국내적인 제반 상황의 변화로 예술 분야의 지원이 축소됨으로써 창작에 임하는 작가들에게 상당한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했으며 방황과 실험을 거치게 만드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영화 필름은 장르와 시간을 초월한 새로운 작품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돌파구로 작가에게 다가왔을 수 있다.
용도 폐기된 낡은 영화 필름을 작품의 주된 재료로 도입한다는 창작 개념은 형식적으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와 유사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에서 선택한 재료의 물성 그대로를 작품에 도입하고 비산업적 재료를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했던 1960년대 말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예술사조인 아르테 포베라와 김범수의 작품에 담긴 개념 사이에는 일정 부분 거리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일상의 사물이나 용도 폐기된 물건이 아닌 영화라는 또 다른 예술 장르의 창작물이었던 필름이 김범수의 작품에서 중요한 재료로 채택되었다거나, 그렇게 재활용된 영화예술 결과물이 다시 시각예술 주된 재료로 다시 탄생한다는 점은 아이디어의 참신함이나 표현의 완성도에서 차별성을 가지며 작가의 주변과 현지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1998년 졸업 작품전에서 김범수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이 유명 음료를 광고하는 모습이 담긴 필름을 이용하여 첫 작품을 출품하였다고 한다.
시각예술에서 전통적 재현에는 오랫동안 물감과 붓 그리고 흙, 돌, 철물 등이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1980년대 줄리앙 슈나벨의 접시 회화(Plate paintings)나 안셀름 키퍼가 유리, 짚, 나무 등 비전통적인 재료들을 도입하여 부조 조각에 가까운 회화가 등장하고 마이크 켈리의 콜라주, 바바라 크루거의 슬로건 텍스트를 담은 미디어 폴, 키키 스미스의 신체연구 조각과 설치 등이 전개되던 시기에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한 김범수가 용도 폐기된 낡은 영화 필름을 작품에 도입한 것은 시대적 흐름에도 연결될 수 있으며 혁신적 시도라는 점에 서도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김범수의 낡은 필름을 이용한 작품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형식 면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밀도나 표현성을 높여갔는데 전체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필름의 색가(色價 coloc value)를 이용하여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병렬 배치함으로써 일정한 이미지를 완성하여 라이트박스를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형식의 작품과 필름을 배후의 아크릴 위에 원형으로 접착 배치하여 크고 작은 원형 형상들이 포도송이나 리좀(Rhizome)을 연상시키는 모종의 클러스터 형식으로 공간에 제시되고, 이 오브제에 비치는 조명이 작품을 반투명하게 투과하여 부분적인 스테인드글라스 효과를 주기도 하면서 전시장 조명에 의해 벽면에 지어내는 그림자들이 실물 입체작품과 결합하여 하나의 작품이 구성되는 형식의 설치형 작품이 있다.
이러한 작품을 구성하면서 주재료인 영화 필름에 담긴, 연속된 움직임의 연결로 표현한 줄거리나 희로애락의 감성, 그 안에 담긴 다양한 공간 등은 작가의 손에 의해 해체되고 그 본래의 역할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동원된다. 작가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필름 한 프레임 한 프레임에 담긴 미적 언어와 감성에 감응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는 등의 긴밀한 교감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다.
라이트박스를 이용한 작품의 경우는 자연스럽게 유럽 중세와 근대 건축물을 대표하는 성당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접점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 성당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장미창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구조를 가진 점에서 일부분 김범수의 작품과 외형적 유사성이 있다. 다만 김범수의 작품에는 종교적 함의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미지의 상징성이 스테인드글라스만큼 강하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작품에 투입된 필름들의 내용 안에 담긴 인간의 다양한 세속적 정서를 담은 가상의 공간을 제시한다. 다만 작가는 이 공간이 비록 종교적 차원은 아니지만,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추억을 떠올리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며 사유와 명상, 그리고 치유를 경험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인, 성인 키 높이의 원형 작품 <tears-감성적 눈물>은 기억과 슬픔, 사랑 등 작가와 함께 지내온 과정에서 선정된 영화 필름을 이용하여 작은 원형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큰 원형을 이루는 작품이다. 제작 과정에서 오랜 시간을 요구하고 기술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작가는 다른 작품들과 함께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의 눈을 형상화하면서 다양한 상상의 이야기와 추억을 담아내고자 하였으며, 지난 30년 가까이 몰입해 왔던 필름 조형 작품에 담긴 작가의 경험과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집약시킴으로써 관람자와의 공감과 소통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 안에 숨겨진 감성과 기억을 끌어올려 되새김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