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기억, 상상의 정서를 읽어주는 민감성
하계훈 | 미술평론가
예술가에게는 언제나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자신의 작업이 이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쓸모 있는 창작 행위가 되기 위해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면서 작가정신을 작품 속에 투사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사회적 사명인가, 아니면 시대의 흐름과 관계없이 시각적 언어의 조화를 통해 관람자와 교감하고 미학적 목표를 구현하는 창작 활동을 해나가야 하느냐는 두 선택의 기로가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예술가들을 고민하게 만들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선택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두 극점의 중간 어딘가쯤에 제3의 선택과 절충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김혜나의 경우 젊은 작가로서 10여 년간 이어온 창작 활동 과정을 살펴보면 작가의 작품들은 자신 내부의 미의식과 경험, 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직,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예민한 흡수력과 수용에 관련되어 있다. 김혜나는 종이와 파스텔, 유화 등 재료의 선택과 실험을 거쳐 수년 전에 비로소 지금과 같은 유화 추상 작품에 안착하였다. 미술대학의 수련 과정을 벗어난 젊은 화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김혜나도 묘사와 재현의 과정을 거쳤으며 초기 창작 활동 기간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구하기 위하여 몇몇 공모전과 레지던스 프로그램 참가 지원을 통해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왔다.
김혜나는 거대한 역사적, 철학적 담론보다는 개인의 상황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감성이나 사유에 작품의 출발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예술가의 창작을 참되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경험, 특히 일반인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적 경험에 대한 민감성을 깨어있게 하는 노력일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높은 감성지수와 고도의 자기 인식 민감성을 보여주는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필자마저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김혜나는 필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설명되기 어려운, 이러한 예술가의 민감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김혜나에게는 자기 작품 표현에 대한 완결성의 결핍이 구토나 모종의 통증과 같은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김혜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에 현재의 거주지와 작업 공간을 유지하고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산 칸트의 일화가 유명하지만, 공간 이동성이 높아진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에서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창작 생활에 긍정적인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기억과 흔적이 무자비하게 지워져 온 우리나라의 개발 지상주의적 도시의 현실에서 동일 지역의 기억과 향수가 수십 년간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김혜나는 어린 시절의 골목길과 동산, 그리고 그 동선에 남아있는 친구와 지인의 옛집과 같은 추억의 파편들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작가의 작품 속에 중요한 모티브로 녹아들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혜나의 근작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러한 공간에서 작가가 느끼고 추억하는 내용이 조형적으로 변환되어 화면 안에 색채와 붓의 움직임으로 담겨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와 감각 가운데 약 70% 정도는 시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시각예술의 상호 소통적 기능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김혜나는 여기에 더하여 후각과 기억 등의 민감성을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팔레트 위의 다양한 유화물감의 변주로 자신의 기억과 민감한 감성, 그리고 창작의 의지를 작품화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재현이 집중과 반복적 묘사력을 요구한다면 추상은 무한의 상상과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각예술의 대표적인 장르인 회화의 재현 기능을 공유할 사진이나 영상의 등장은 재현보다 추상에 비중을 더 크게 두도록 해주었다. 때마침 프로이트에 의해 도입된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시각화하는 시도가 긍정적 후원을 받고 미술사에 등장하면서 추상은 자유와 창조성의 선구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칸딘스키는 일찍이 작가 내면의 감정과 영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을 채택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며, 그 후로 적지 않은 작가들이 추상적 회화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추상은 재현에 비하여 자기 혁신성이나 변화의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또한 해석의 임의성을 높이며 재현적 작품에 비하여 사회적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전제를 설정함으로써 문화자본의 차별화를 수행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작가로서도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 앞에 모든 것을 내보이기보다는 추상화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시대정신이나 미학적 감각 등에 공감대를 이루는 한정된 관람객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의도를 내포할 수도 있다.
김혜나의 작품은 이러한 재현과 추상의 중간 어디쯤에서 수줍게 추상적 표현에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비하여 작가의 화면은 형태가 해체되면서 점차 파스텔 색조의 색채로 화면을 채우게 되고 작품 제목의 해설 기능이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며 작품의 완성도와 밀도를 높여가고 있다. 일부 작품에서는 형태를 감지할 수 있는 이미지나 작품 제목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작가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감각과 기억, 상상에서 창조되는 작품의 모티브를 가능하면 간소화하고 파스텔 색조의 밝은 색채를 이용하여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싶다고 한다.
김혜나의 작품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품에 고전적인 중심점(focal point)이 없이 화면 전체가 등가적인 비중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상하좌우의 구분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 형식을 띠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작가로서는 작품의 성격과 설치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만 작가는 이러한 설정에 대해서 절대적인 원칙을 고집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치 서양미술사에서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전면적 회화(allover painting)처럼 작품은 수용자의 시각과 감성에 따라 새로운 공간감과 시각적 경험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김혜나는 이러한 작품 제작 과정을 통해 자신의 미학적 감수성과 조형적 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해 오고 있으며, 때때로 정체의 질곡을 겪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김혜나의 이러한 작품에서는 작품 그 자체와 함께 제목의 역할이 중요시될 수 있으며, 작품을 매개로 한 작가와 관람객과의 소통의 성공을 위해서는 직관적 포착보다는 ‘오래 바라보기’를 통해서 작가가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생각과 기억과 상실의 흔적과 같은 다양한 정서를 화면에서 읽어내는 정성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