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릴 물감과 에나멜 페인트로 표현하는 이중적 정서 


하계훈| 미술평론가

창작활동 초기부터 아크릴 물감과 함께 에나멜 페인트를 주된 재료로 채택하여 회화 작업을 해오면서 주목을 받아 온 강유진은 가족의 직장 문제에 따라 정기적으로 주거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주변 환경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소설가들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전적(自傳的) 소설’을 통해 서술하듯이 강유진의 작품들은 작가의 공간적 이동 생활 경험과 이력이 반영된 자전적 작품의 성격이 적지 않게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직업군인인 배우자의 정기적인 해외 파견 근무지 이동에 동반하게 되는 작가의 가족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지역의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주거지 이동과 가족 여행에서 작가가 주목한 것은 새로운 곳에서 발견되는 주민들보다는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 환경과 분위기였다. 따라서 작가와 주변 인물들은 작품 속 공간에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대부분은 암시적으로 등장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분위기 있는 풍경화로 잘 알려진 17세기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을 떠올리게 하는데 로랭은 풍경에 집중하면서 그 안에 표현된 인물들은 다른 작가의 손을 빌려서 그렸다고 한다. 그가 이처럼 인물 표현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고 풍경에 몰두한 것은 장엄한 공간과 빛의 오묘한 현상에 이끌려서 다른 데에 신경을 분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강유진 작가 역시 이와 비슷하게 인물보다는 풍경을 통해 자기 작품에 담는 개념과 사유가 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에 공간 표현에 집중하려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작가는 자신이 머무는 도시적 환경과 외곽의 자연환경을 한 화면 안에 혼합하는 방식으로 정반대의 개념인 인공과 자연, 구상과 추상, 우연과 의도 등의 대비되는 성격을 작품에 도입하고 있다. 대상의 표현에서도 일부 공간이나 사물은 사실적 재현에 가까운 묘사가 이루어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형태를 짐작하기 쉽지 않은, 일종의 추상화가 도입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 작품에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을 대립, 병치, 융합시킴으로써 강유진의 작품은 더욱 복합적인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강유진이 발견한 대상을 화면에 옮기는 방법은 단순한 사실적 재현이기보다는 모티브가 주는 시각적 충격을 담아내는 데 있어서 보이는 것을 넘어서 발견되는 요소들까지 결합하여 종합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기법적으로 에나멜 물감과 아크릴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2차원성과 3차원성의 특징을 한 화면에 도입하고 있으며 소재 면에서도 실경과 상상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화면을 보다 입체적이며 풍성하게 구성해 내고 있다. 

강유진의 작품 소재는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발견하는 이미지나 여행에서 포착한 장면들이 작품의 바탕을 이룬다. 작가의 눈에 인상 깊게 다가온 주변 공간의 이미지들은 작가에게 어느 한순간에 감성적으로 다가온 뒤 다시 사유를 유발하는 심리적, 정신적 차원으로 복합화된다. 따라서 화면의 구도는 사실적 재현과 초현실적인 구도로 이중적 표현이 공존하게 되고, 그 경계에서 색채와 형태의 변주를 적절하게 가미하는 형식이 강유진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필자는 이러한 강유진의 작품에 대하여 “생활 속에서 작가의 시선은 대상을 직선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유리창이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그 속을 관통하여 포착하는 이미지가 겹치기도 하고 자연 속의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불러온 이미지와 결합하기도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강유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은 수영장이다. 가로 세로로 그어진 공간으로 이루어진 수영장은 대표적 인위적인 공간이다. 실내 수영장과 온실의 초록 식물들이 한 화면에 결합하거나, 그 수영장의 푸른 물이 중경의 도로로 이어지다가 멀리 산으로 연장되는 풍경이 담긴 작품이 인상적이다. 수영장 뒤 먼 산으로부터 용암이 흘러드는 듯한 장면, 수영장 물결 위로 거친 바위 산악지형 같은 곳에서 불길이 붉은색으로 활활 타오르는 장면이 색채의 대비를 이루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형식의 작품은 표현성이 강하면서 초현실주의 작품을 떠올리게 해주는 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작품에서 에나멜 물감의 특성인 윤기 나는 광택과 흘러내리는 듯한 유동적 표현이 매체의 적절성을 확인하게 해주는데, 이러한 물감의 속성은 흔들리는 수영장 물이 만들어내는 윤슬의 표현에도 적절하게 적용되어 작품을 돋보이게 해준다. 

미국의 대표적 화가인 잭슨 폴록도 즐겨 사용했던 에나멜 물감은 용매를 얼마나 적용하는가에 따라 유화 물감처럼 붓으로 칠할 수도 있고 붓 대신 막대와 같은 도구에 묻혀서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화면에 적용할 수도 있다. 다만 물감이 쉽게 섞이지 않기 때문에 바람(gradation) 효과가 떨어지고 물감의 채도가 조절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다. 에나멜 물감은 화면에 발랐을 때 흘러내리는 속성이 보통의 화회 재료들보다 강해서 때에 따라서는 화판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그리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이와 같은 재료의 특성 때문에 강유진도 에나멜 물감 작업 과정에서 잭슨 폴록처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화면을 구성해 나간다.

강유진이 선택한 에나멜 물감의 특성은 물결이나 불길의 표현에 잘 어울린다. 작가의 근작 가운데 <Mountain with Crepe Cake 2019>이나  <Pool in the garden with fire 2024>과 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난다. 작가의 언술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근접 상태로 세부를 바라봄으로써 작품의 물성과 추상적 질감을 감상할 수 있고, 다시 뒤로 물러서서 작품과의 거리를 두면 재현적인 구도 속에 앞에서 본 것과는 다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작가가 바라보는 풍경과 유사한 이미지들이 유추되는 과정을 통해 강유진의 작품 화면이 구성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아주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초현실주의적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Sculpture in the garden 2024>와 같은 작품은 전형적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의 엉뚱한 결합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러한 배치를 통해 이질적 요소가 충돌이 아닌 중첩이나 교차로 인해 두 영역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의 작품은 허공에서 원형을 반복하며 코일처럼 감아진 철조 작품으로서 중력 법칙을 거스르는, 비현실적이지만 시각적으로 명확한 형태를 정의해주며 화면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브네는 이러한 철조 작품을 통해 공간 안에서 이어지는 연속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계와 경계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생각도 강유진의 풍경화에 담긴 공간에 관한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크릴 물감과 에나멜 페인트로 제작한 화면 안에 추상성과 재현성이 공존하는 강유진의 작품은 재료와 기법적인 면을 떠나서 의미해석을 할 때, 빌헬름 보링거(Wilhel Worringer)의 추상과 감정이입 이론을 대입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보링거에 의하면 작가는 인간의 불안과 무의식적 공포가 추상 충동을 일으키며 자연 친화적 관계에 대한 미적 체험이 재현적인 감정이입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친숙한 주거지에서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은 설렘과 불안한 경계심을 동시에 작동시키게 되며 이러한 양가적 감정이 화면에 담긴다면 추상과 구상, 인공적이 것과 자연적 요소 등과 같은 대비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작가의 주기적 이동 생활은 유목적(nomadic) 호기심과 경계심이 공존하는 장으로서, 이와 같은 보링거의 해석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