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해학으로 분출하는 조각-드로잉
하계훈 | 미술평론가
찰스 다윈은 인간이 동물과 유사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다만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에게는 동물보다 고차원적이고 복합적인 감정표현 방법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개발되어 왔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러한 인간 감정표현의 역사는 문명을 꽃피우고, 문화를 번성시키면서 인간의 사회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예술의 경지로 감정의 표현을 끌어올렸다.
인간에게 있어서 표정과 몸짓 등에 의해 외면화되는 자기 내부의 감정은 때로는 소리로, 또 때로는 몸짓이나 도구를 이용한 시각적 표현 등으로 나타난다. 소리는 음악으로, 몸짓은 무용으로, 시각적 표현은 미술로 체계화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장르의 메타적 융합으로 보다 차원 높은 종합예술이 탄생하게 되기도 하였다. 시각 예술은 이러한 감정표현의 한 방법으로서 회화나 조각 등으로 만들어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고 문명과 문화를 축적하는데 이바지해왔다.
윤정민은 ‘조각-드로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독특한 작업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동작과 감정을 표현한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는 남들과 다른 청년기의 경험을 갖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로 건너가 보다 넓은 작품 세계를 체험하면서 학업을 지속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발병으로 인해 계획된 학업과 창작 활동을 펼쳐보지 못하고 귀국하여 치료 과정을 거쳤으며 불가피하게 청년 작가로서의 창작의 길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자아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삶의 근본적 의미나 인간 사이의 관계, 작가로서의 창작 활동을 수행한다는 행위가 갖는 미학적, 사회적 의미 등을 음미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치료와 회복의 과정은 전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으로 자아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는 일은 작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도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과정에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고 투병 중인 자신의 물리적 능력 범위 안에서 창작 의지를 펼쳐 나갔다. “일상을 제작하는 그것은 곧 삶을 기록하고,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작가는 드로잉과 조각이 결합한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착안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들이 작가 특유의 인물 조각 작품들이다.
유정민은 간략한 드로잉 형태의 인물을 그리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드로잉은 흔히 완성된 채색 작품이나 조각적 오브제를 위한 초벌 그림(esquisse)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작품의 전체 구도와 색채, 명암 구조 등을 가늠하고 실험해 보는 준비 단계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작가의 생각을 시각화해 보는 용도로 동원되어 온 이 방법은 그 어원에 있어서 좀 더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다. 초벌 그림을 의미하는 영어 ‘drawing’이나 불어 ‘esquisse’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schizzo’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초안, 스케치’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액체의) 분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즉 초벌 그림 혹은 드로잉은 작가의 내면에서 창작 의지가 분출되는 순간의 창작 욕구와 폭발적 영감을 쏟아붓는 행위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분출되는 영감이 작가의 손에 의해 처음 시각화되는 과정이 곧 드로잉이라면 그것은 다른 어떤 시각예술적 표현 방시에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투병 과정에서 회복기에 선택한 인물 드로잉이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감정이나 창조적 영감에 불을 댕기는 모멘텀을 담는 최적의 수단이 드로잉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입체이면서 평면이고 평면이면서 입체인 ‘드로잉-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드로잉이 평면 조각의 형태로 변환되고 정면성을 위주로 한 개별 오브제들이 다양한 표현성을 띠거나 군집 된 형태로 공간을 점유하면서 상황을 이끌어내는 작품들은 작가가 염두에 둔 재료의 실험과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움직임 등을 흥미롭게 표현하여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전적 인물 조각에서 드러나는 인체의 비례와는 거리가 멀게 얼굴과 팔다리 등이 비사실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동작과 표정에서 만화적 해학성이 읽혀지는 유정민의 인물들은 유연하게 인간의 일상적인 동작의 거의 대부분을 표현해내고 있다. 때로는 공간에 가해지는 드로잉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드로잉 애니메이션에서 껴안고 웅크리고 갖가지 동작으로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표현같기도 한 작품이 거의 무제한의 자유로 표현된 윤정민의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관찰하고 그 과정에서 포착되는 모티브에 대한 확대된 상상력과 해학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최근에 작가는 작품의 주제나 표현과 별도로 재료의 보존성에 착안하면서 철판을 오려내고 단망으로 두들겨서 지금까지 작가가 표현해 온 인물들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 한지와 석고, 철사를 주재료로 표현해 온 인물들의 동작과 표현이 갖는 자유로움과 해학적 효과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철판을 달구고 두드려 보다 견고하면서도 자유롭게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더하여 전통적인 단조법에 의한 금속 조직의 강화와 치밀한 내구성을 획득함으로써 윤정민의 작품들은 이제 공간과의 관계나 시간적 제약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작가의 조형 의지의 세부묘사까지 더해주는 안정된 작품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재료의 전환을 별도로 하더라도 작가의 작업에 일관되게 흐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해학의 시선은 변함없는 윤정민의 창작의 원천으로 계속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