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열정으로 사회적 역경을 넘어 자유로 귀환한 작가
하계훈 Ha Kyehoon | 미술평론가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 황해도 연안에서 1945년에 태어난 차우희는 흔히 해방둥이라고 불리는, 우리 국민 100만 명 가운데 한 명으로서 올해로 산수(傘壽 80세)의 나이에 이르렀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특별히 해방둥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이제 그들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의 숫자는 1/5에 불과하다고 전해진다.
해방둥이 세대는 재롱둥이나 귀염둥이와 같은 단어에서 느껴지는 친근하고 귀여운 ‘둥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즐겁고 낭만적인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실상은 해방과 그에 이어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을 겪고 그 후유증 때문에 고생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어서 청소년 시절에는 4. 19와 5.16 등 정치사회적 불안정의 시기를 거쳤으며 일상생활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궁핍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보릿고개의 굶주림을 체험한 세대다. 따라서 생계가 우선이다 보니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소수였으며 여기에 여성이라는 변수를 더하면 그 숫자는 더더욱 줄어든다. 특히 여성의 경우 기껏해야 상업학교나 기술학교 교육을 받는 것이 그나마 높은 교육 수준이었고, 대학 교육은 극히 소수의 인원에게만 주어진 기회였다. 통계 자료상으로 차우희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인 1965년 우리나라 고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29%인데 남녀 비중을 분리하면 여성의 진학률은 크게 떨어져 한 자리 숫자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에게나 한평생의 삶이 있겠지만 차우희 세대의 국민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살아온 경력은 시대에 따라 가난과 풍요, 독재와 민주주의, 지역성과 국제성, 아날로그와 디지털 등 상호 대립적인 개념을 다양하게 경험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차우희는 청년 시절에 미술대학 교육을 거치고 외국 국가장학금을 받아 독일 체류 생활을 하였다.
미술대학들 가운데 홍익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이 1946년, 서라벌예대(1972년 현 중앙대학교와 합병) 가 1953년에 개교하였으니, 중앙대를 졸업한 차우희는 초창기 국내 미술대학의 교육을 받은 1세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나혜석과 임용련과 같은 여성 작가가 차우희의 앞 세대로서 일본, 중국, 유럽 등 외국 유학을 하였다. 1961년에는 방혜자가 파리로, 1963년에는 최욱경, 1966년 현혜명이 미국으로 유학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서 그다음 세대 유학 여성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차우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차우희가 다니던 서라벌예대, 즉 지금의 중앙대는 미술 분야에서도 걸출한 작가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문학 분야에서도 유명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몇몇만 들어도 소설가 김주영, 이문구, 조세희,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서정주, 박목월 등의 스승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그 당시 학생이었던 몇몇 원로 예술가들의 회고에 의하면 미술대학 학생들도 문학 분야의 수업을 들었으며 이러한 수업이 졸업 후 작품활동에서 주제뿐 아니라 작품에 관한 아이디어의 구성에도 적지 않은 문학적 영향을 주었다고 기억했다.
차우희 역시 고전 문학과 음악을 폭넓게 자기 작품 안에 담아내는 작업을 많이 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도 학창 시절의 경험과 개인적 성향이 결합하여 창작의 상승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부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작가에게는 보통 사람보다 더 나은 문화적 환경이 주어졌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독서와 음악감상, 미술 작품 창작은 어려서부터 차우희의 정체성을 형성해 주었던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차우희가 문학과 미술이 예술 장르에서 가장 유사한 분야라고 말한 것은, 직접적인 접촉 여부는 알 수 없더라도 선배 여성 화가인 최욱경의 창작 태도나 방법과도 유사하기도 하다. 차우희보다 5년 선배인 최욱경 역시 어린 시절에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작가 모두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예외적으로 외국 유학과 체류를 거치면서 폭넓게 문화적 체험을 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작품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들의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학에서 터득하는 상상력이 작가 내면의 감정을 활성화해서 회화 작업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 유명 작가들의 경우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차우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1969년 평론가 오광수와 결혼하여 국내에서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동시에 작가로 활동하였다. 작가로서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77년 차우희는 현대화랑(9.23-28)과 부산의 수로화랑(12.10-14), 관훈미술관(1978, 1979, 1981. 1990년대 초반 미술관법에 의거 관훈갤러리로 이름을 바꿈) 등의 공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기록 자료를 살펴보면 현대화랑에서 열렸던 전시는 ‘아이들을 테마로 한 <차우희 작품전>’이라는 전시명으로 사간동 전시장 2층에서 열렸는데 출품된 작품들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후기의 차우희 작품들과는 다르게 표현(주의)적인 형상성이 드러나는 인물 중심의 회화가 출품되어 작가의 초기작 면모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그러한 활동을 펼쳐가는 가운데 작가는 1985년에는 독일 정부가 수여하는 독일 연방정부 학술교류기금(DAAD)을 받아 베를린에서 체류하며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당시 한국 사회의 기혼 여성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에 비추어 볼 때 차우희의 이러한 행보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독일 체류 중에도 차우희는 매년 몇 차례 귀국하여 가족과 짧은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베를린과 한국을 오가는 떠돌아다니는(nomadic) 생활이 그녀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독일은 유럽 냉전 시대의 최전선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세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 대표적인 도시가 섬처럼 고립되어 동서로 나누어진 베를린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 유학생들의 목적지로서 베를린이 우선 선택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 파독 간호사로 출국한 노은님과 송현숙 등은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작가 활동을 하였으며 구본창도 함부르크에서 유학하였다.
외국에서 예술 활동을 할 목적지를 독일, 그중에도 베를린으로 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차우희는 앞서 언급한 1977년 현대화랑에서 전시를 만족스럽게 마치고 나서 당시 독일에 있었던 언니네 집에 잠시 다녀오려는, 아주 일상적인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작가로서의 외국 유학과 현지 활동이 이어져서 30년이 넘는 장기적인 외국 생활이 전개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77년경부터 유럽의 중요 문화 거점도시들을 여행하며 당시의 세계적 미술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살펴본 차우희는 비슷한 시기에 파리와 베를린을 경험한 후 이 두 미술 중심지의 특징을 ‘달콤하기 짝이 없는 감성의 분비물’과 ‘거칠고, 강렬하고, 때로 폭발하는 에너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차우희는 최종적으로 체류의 목적지로 후자를 선택하였다.
파리와 베를린 두 도시는 모두 1980년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기존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전환의 시기를 거쳐 가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구분하자면 파리는 기존의 서양 현대미술의 거점 역할을 확대하여 패션과 디자인, 사진 등 시각문화가 대중문화와 접점을 모색하는 경향을 보였고, 베를린은 신표현주의(Neue Wilde) 작품 속에 독일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성찰 등이 강렬하게 표현된 구상 회화의 부흥이 감지되고 있었다.
차우희는 독일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며 자기의 판화 작품들이 소장된 중요한 미술관 가운데 하나인 쿠퍼슈티히카비넷(Kupferstichkabinett) 미술관도 나치 시절 퇴폐적이라고 규정되어 압수당했던 표현주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었기에 차우희가 이러한 작품들에 접근할 기회를 주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차우희는 그 당시 자신이 막스 베크만(Max Beckmann)과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두 작가의 영향이 차우희의 작품 안에 개념적 공감대를 이루기는 하였으나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차우희의 저서 <베를린에서 띄우는 편지>에서 “막스 베크만의 발견과 재스퍼 존스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나의 첫 번째 유럽 여행은 무의미했다”고 말하였다. 다만 막스 베크만의 인간 심리 표현이나 사회적 불안 등의 주제가 반영된 작품이 작가의 개인적 상황과 접점을 이루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만난 재스퍼 존스의 작품에서도 차우희는 작가로서 존스의 투쟁과 고뇌, 그리고 사랑하는 생(生)을 확인하였다고 말했다. 앞의 저서에서 차우희는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존스의 작품 전시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차우희는 자신의 내부에는 언제나 다소 거칠고 힘찬 표현의 잠재성이 있었음을 느끼고 있었다고 언술하였는데 이러한 성격은 프랑스보다 독일 미술계의 성향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롤란드 비겐슈타인(Roland Wigenstein)은 그녀의 그림에 두 가지 성격 - 감상적으로 보일 정도의 섬세한 감성과 고집에 가까운 자기주장 - 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고, 이 두 가지의 상극적 요소를 조화시키는 힘이 그녀의 문학적 관심에서 온다고 간파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재스퍼 존스나 로버트 라우센버그 역시 리히터(Gerhard Richter)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등을 통해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과 예술을 결합하는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독일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친 점을 고려하면, 차우희가 베를린에서 제작한 <1985 Berlin>과 같은 작품은 라우센버그와 그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 설립되었던 블랙마운틴 컬리지(Black Mountain College)에서 재학 시절에 어울렸던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무용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등의 실험적 융합 정신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차우희가 한 세대쯤 먼저 태어나서 이 작가들과 함께 블랙마운틴 컬리지에서 공부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학교생활을 하였다면 그녀의 창작 에너지가 더욱 강렬하게 분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80년대 베를린의 미술계는 1960-70년대의 실험성과 사회 비판, 그기고 급진적 현대화와 국제 교류의 분위기를 가동시키고 있었으나 미술시장은 정치와 군사 문제에 가려져 침체의 분위기에 돌입하는 시기였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이 시기는 동서 냉전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1968년에 파리에서 촉발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사회운동(68운동) 등으로 사회적 이슈에 가려져서 미술계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폐쇄된 동베를린을 별도로 하고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매력 있는(poor but sexy)” 도시로서 19세기 말 파리의 몽마르트르나 몽파르나스처럼 가난한 작가들을 끌어들이는 자석 같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차우희의 독일행을 격려하고 나중에 전시회에 친필 원고를 보내주기도 했었던 백남준도 독일 부퍼탈에서 1963년 첫 개인전을 열고 쾰른, 뒤셀도르프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72년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갔었다.
차우희가 이러한 베를린에 도착한 시기부터 4년 뒤 동서독의 통일을 맞으면서 분위기는 빠르게 활성화되었다. 1989년 갑작스럽게 일어난 동서 베를린의 통일은 문화예술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모멘텀을 형성하였다. 필자가 1990년대 초에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은 마치 백 년 전 파리로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은 예술적 에너지의 집중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현장에서 차우희는 베를린 장벽의 해체라는 20세기 인류사에 있어 최대 이벤트를 목격하고 그에 대한 충격과 다층적으로 떠오르는 단상과 비판적 시각을 작품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극성(Porality) 연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부서진 시멘트 조각을 긁어모아서 구리철사로 팽팽하게 엮어서 베를린의 당시 상황을 은유한 작품을 통해 차우희는 낸전시대의 최전선을 형성하였던 동독과 서독으로 대표되는 극과 극은 언젠가는 만난다는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자 하였다.
살아있는 생명의 분출이 곧 예술이라고 말한 차우희는 자신이 독일에 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작업을 이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가끔 되돌아보는데, 아마도 너무 달콤한 분위기에 빠져 무엇보다도 자신이 바라는 ‘힘의 조형’은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각국에서 유입된 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발산하고 서로서로의 교류를 통해 상승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해 내려는 의욕이 활발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독일 연방정부에서도 통일 이후 대두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문화예술을 통해 동서 독일의 통합과 동질화를 모색하고 문화유산의 보호와 복원에 힘썼다. 개방된 문화 수도로서의 베를린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상업 문화와 중앙정부와 주정부의 문화정책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 속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들은 예술적 자율성을 확대함으로써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아 주고 그들이 적지 않은 기대를 하게 만드는 분위기도 감지되었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6. 25전쟁 이후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분단의 공간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차우희에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에서 오는 충격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우희는 한편으로는 베를린에 유입한 이방인 작가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을 두고 온 한국의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동시에 작가인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지 않게 노력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차우희 1990년에 쓴 자전적 에세이에서 작가는 낯선 곳에 도착하는 순간의 김장감이나 날씨에서 느끼는 고독과 노스탤지어, 언어의 장벽, 그리고 마늘 냄새를 싫어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지내야 하는 이질감 등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이방인이 느끼는 정서를 글로 담아 그림을 곁들인 에세이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작가는 “집을 떠나 이국의 땅을 왕래하는 삶이 자신의 예술적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호메로스의 서사 <오디세이>에서 주인공이 겪는 모험과 역경에 견줄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소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승리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10년간 겪는 모험을 그린 이야기가 오디세이라면, 간간이 고국을 다녀가긴 했지만 1985년 독일로 건너가 20여 년간 전쟁 같은 일상을 지내온 작가의 삶은 상징적 의미에서 오디세이와 평행성을 띠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차우희에게 독일 유학과 체류기의 생활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것은 오디세이가 겪은 모험과 역경 같은 어려움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치 전등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작가 차우희는 베를린에서는 한국이라는 스위치를 끄고 한국에서는 다시 베를린이라는 스위치를 끄는 의식적 변환을 번갈아 수행하며 20년 넘게 창작의 열정을 유지해야만 했을 것이다. 베를린과 한국을 왕래하는 동안에도 차우희는 국내에서 1987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흑과 백전>과 현대화랑에서 이름을 바꾼 갤러리 현대의 개관기념전, 그리고 진화랑(1991, 1996, 2002, 2004, 2008)과 표화랑(2009, 2012), 가나화랑(2001), 이화익갤러리(2001, 2006), S 아트 스페이스(2023) 등에 참가하여 단체전과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2001년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여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제12회 석주미술상과 현재의 파라다이스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제9회 우경문화예술상 수상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국내에서 열린 전시 가운데 2012년 표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차우희는 겸재 정선에 대한 오마주를 담았는데, 한국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서촌의 건물 옥상에서 발견한 인왕산의 모습에서 작가는 자신의 활동 경험에서 떠오르는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중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의 웅장한 음악과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이 국악과 어우러지는 공감각적인(synesthetic) 화면을 구성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왕산의 모습에서는 엑상프로방스의 생 빅트와르 산을 집요하게 연구했던 후기 인상파 화가 세잔을 떠올리기도 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도입한 모티브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장르를 뛰어넘어 메타분석적으로(meta-analytically) 바라보는 작업 정신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차우희는 자신의 사유와 경험을 작품활동에 녹여내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재현이나 사적인 서사를 도입하기보다는 문학적 비유나 기호화와 상징 등의 함축적 표현을 통해 관람객들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의 주제에 있어서 독일 체류의 초기에는 동서 독일의 통일과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작품에 반영하거나 이방인으로서 작가 자신의 이국 생활에서 느끼는 사회적, 예술적 좌표에 대한 불확정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예술적 역정(歷程)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작가의 환경을 둘러싼 사회 문제와 작가 내부의 심리와 사유의 문제는 오랜 창작 생활 전반에 걸쳐 새의 양 날개처럼 차우희의 예술적 활공의 틀을 구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동서독 통일의 현장에 있었던 차우희가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을 떠올리며 감정이입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류 보편의 양극성(polarity)을 사유하면서, 물리학에서 서로 다른 원자들이 공유결합(covalent bond)을 통해 안정을 이루듯이 이러한 주제를 채택하여 감동적인 화합을 꿈꾸는 작품 시리즈를 제작한 것은 시기적으로나 작가의 정서적으로나 적절한 작품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통일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차우희의 작품에는 독일과 한국에서 공유되는 유사성이 담겨있다. 차우희의 작품 가운데에는 독일의 벼룩시장 언저리에서 자신의 손때 묻은 물건을 팔려고 노력하는 폴란드 피난민들과 6. 25전쟁 당시 부산 국제시장의 피난민 장사꾼의 모습이 겹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녹아있고, 베를린 화장품 가게 주인아주머니 얼굴에서 부산 시절의 여고 동창생을 발견하면서 두 지역에서 살아온 기억의 조각들이 암호화되어 있다. 차우희의 작품 속에서 흔히 만나는 숫자와 기호는 이렇게 고도로 함축된 조형의 방법으로서, 작가는 그것을 파편화된 기억의 잔해라고 부르기를 허락한다. 다만 작가는 그 기억을 끄집어냄에 있어서 서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차우희에게는 앞서 언급된 비겐슈타인의 분석처럼 작가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여성적 감수성과 그녀 특유의 가역적(可逆的)인 기질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차우희는 여성으로서, 유럽에서 정착(하려 노력)한 이방인으로서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시대의 선입견과 인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는 혼자만의 여행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그 작업을 모험과 역경으로 여기며 감내하며 맞서 싸워왔다. 1990년대 초의 <오디세이의 배(Ship of Odyssey)> 연작, 1990년대 후반의 <돛의 단상(Stray Thought on Sails)>, 그리고 2000년대의 <Sail as Wing>은 모두 고난과 역경의 여행과 유랑이라는 키워드에 맞닿아 있다. 이 경우 오디세이가 공간적 이동을 통한 다양한 모험과 경험을 서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차우희의 경우에는 베를린과 서울, 혹은 유럽과 한국이라는 공간을 오가는 물리적 이동에 초점이 맞아있기보다는 이러한 공간 이동에서 그려지는 자아의 사회적, 시대적 좌표, 그리고 그 좌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 즉 내면의 체험과 감정, 사유의 흔적을 담아내는 것으로 모험과 투쟁을 이끌어간 셈이다.
차우희가 한국 체류의 비중을 높여가던 1990년대 한국 미술계의 상황은 1980년대의 소위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의 대립, 비디오와 설치미술 등 새로운 매체의 등장, 1988년부터 본격화된 유학 자유화 시대의 미술 유학을 떠났던 작가들의 귀환과 대안공간의 등장,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globaliation) 선언, 미술계의 탈 중심 현상에 의한 제3지대의 약진과 급증하는 각 지역의 비엔날레 행사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가 1995년에 최초로 국민소득 1만 불을 돌파함으로써 경제적 자신감과 기대감이 상승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1회 광주비엔날레도 개최되었다.
이러한 국내 미술계의 분위기 속에서 차우희는 동서양 양쪽을 번갈아 무대로 삼아 왕래하면서 생활과 창작의 균형을 유지해 가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자신의 물리적 위치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국내 민중미술이나 모더니즘 미술의 대립 구도에 편입되지 않으면서 국제적인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작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작가로서 일상적 삶에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유하는 추상개념을 구체적 사물의 모습으로 읽어내는 차우희의 예술적 재능은 특유의 기질적 자유연상 작용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작가는 자기 작품의 원천은 자신의 일상과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들이 축적되어 나온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상념의 돌출 현장이라 한다. 그리고 그 돌출 행위는 사소하고 비논리적일 수 있으며 무의식의 영역까지를 포함한다.
차우희가 작품을 풀어나가는 방법처럼 마음과 기억이 불러 내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성과 논리의 검열 없이 자유롭게 표출함으로써 표면화되는 작가의 작품은 긴장과 억압, 전투적 갈등 등 창작의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부정적 효과를 내는 요소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외부의 갈등적 요소나 위협까지도 수용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성장과 심리적 해방으로 나아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 차우희가 지난 80년간 살아온 파노라마 같은 인생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시대의 인습에서 벗어나서 누릴 수 있는 해방감과 그에 수반하는 반대급부로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 그리고 그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의 투쟁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작가 차우희가 긴 인생의 창작 과정을 지나와서 얻어내고자 한 것은 그 어떤 속박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마침내 산수(傘壽 80세)의 나이에 이르러 문학과 음악이 미술과 융합되는 예술의 경지를 지향하며 창작활동의 마지막 단계에서 차우희는 예술이 꿈과 현실을 하나의 양상으로 만드는 작업, 곧 현실에서 말한다면 꿈꾸는 일이라고 말한다.
창작활동의 상당 부분을 독일과 한국이라는, 여러모로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많은 공간에서 살아오면서 작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적,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인간의 본질적 감정과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더 깊은 내면의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가로서 자신을 정리하고 있다. 베를린 체류 초기에 자신의 에세이에서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소설 <달려라 토끼(Rabbit, Run)>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그어놓은 인위적 경계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한 차우희의 생각처럼 어찌보면 팔순의 예술가에게 이러한 사유의 귀결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불안과 고독을 넘어서 경계도 없고 구속도 없고 오로지 자유로운 작가정신. 그리고 이제 오디세이의 귀환처럼 이 땅으로 돌아온 차우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예술가들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정신으로 우리 시대의 예술적 현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를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