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그라운드 – 자립적 첫걸음의 마당
하계훈 | 미술평론가
화가 최연은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주변 인물이나 풍경을 통해 조형적 표현 욕구와 작가 내면에 피어나는 시적 영감의 접점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끌어내 왔다. 초기에 작가가 주로 다루어 왔던 재료는 파스텔로서 사실적 표현과 시각적 은유가 적절하게 어울리는 표현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최연이 처음 관심을 둔 모티브는 인물의 표정과 그 너머의 마음이었다. 뱃사람들의 작업 모습이나 시장 한 귀퉁이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푸성귀를 다듬는 아낙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작가 주변의 가족, 지인들의 얼굴 등 모티브의 서정성과 작은 서사를 함께 담아낼 수 있던 초기의 작품들은 그리기와 함께 시를 써온 작가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화면 속의 주제에 대한 밀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초기 작품들에 대하여 “작가와 모델 사이의 상호 교감과 소통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실 이러한 작업의 다음 단계는 인물의 초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으며, 과연 최연 작가 역시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초상화 작품들이 여러 점 제작하였다.
그 후 작가는 주제의 확장과 다변화뿐 아니라 표현 방법에 있어서 유화와 목탄, 흙 등으로 표현 재료에 대한 실험을 폭넓게 수행하기도 하고, 단순한 재현적 묘사의 화면을 넘어 목판에 판화적 기법을 도입해 보기도 하면서 주제 표현의 최적성을 찾아보는 시기를 거쳐왔다.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주제의 표현에 있어서 그에 어울리는 표현 기법과 재료의 발견을 위해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입체파 화가들은 화면에 물감이 아닌 종이나 오브제 등을 부착하는 방식을 채택해 보기도 하고, 색채에 몰입한 작가들 가운데에는 자신만의 색을 창조해 내기 위해 노력한 이브 클랭의 'IKB'(International Klein Blue), 20세기 초 야수파 화가들의 과감한 원색의 강렬함 등을 들 수 있으며,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기’보다는 흘리고 뿌리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한 잭슨 폴록과 같은 작가들을 소환할 수 있다.
이러한 작가들과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최연 역시 시각적 표현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는 색채 표현을 위해 다양한 매체 실험을 수행하였다. 흙과 먹물, 유화 물감과 파스텔 등 성질이 다른 매체를 결합한 표현 방식은 작가의 실험을 다채롭게 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작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최연 작가가 관심을 끈 모티브는 어린아이들의 놀이터(playground)를 둘러싼 장면들이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유아기와 아동기를 보내는 어린이의 신체 발달뿐 아니라 사회성, 창의성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인 놀이터는 우리 삶의 축소판이자 소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주택의 한 부분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놀이터는 디지털 오락과 인구 감소의 시대에 점차 활기를 잃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장소보다도 생동감이 솟아나는 곳이다. 성인들의 눈에 가볍게 보이는 놀이 기구들이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 기구들이 세계와 우주의 축소판이자 자아 성취를 위한 도전의 대상, 그리고 때로는 상호 작용에 의한 상승효과를 체험하거나 제법 복잡한 관계성이나 전략을 구성하고 실험하는 현장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신체적 역량에 따라 가벼운 공포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린이들의 역동은 작가에게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채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제작 태도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지만 모티브의 선택이나 그것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자신의 감성과 사유를 모티브에 투사하는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을 넘어 좀 더 사변적으로 진화해 나아가고 있다. 작품 표현 양식이나 재료에 있어서도 최연은 점차 유화나 목판에 새긴 채색화 등으로 표현 형식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으며, 가끔은 흙을 빚어 인물상을 표현한다거나 화면에 단순한 물감이 아닌 종이와 흙 등 다양한 재료를 적용하는 콜라쥬 형식의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좀 더 개인적인 작가의 서사가 화면에 추가되어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떠나가신 어머니는 작가의 관념 속에 존재하지만 쉽게 느껴지지 않고 마음 속에 명확하게 그려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작가로부터 분리된 모성은 늘 작가의 마음 한 구석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성장과정을 동반하여왔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제 작가는 작품 속에서 그렇게 동반해 온 모성을 호출하고 마주하여 색채로, 빛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나를 있게 한 고통과 사랑의 연대”를 느끼기 위해 작가는 붓을 들고 흙을 빚었다.
모성에 대한 최연 작가의 사유가 확대됨으로써 그것은 생명의 연속이라는 주제로 확대되어 흙으로부터 생성하는 자연의 식물들에서도 생명과 모성을 읽어내기도 하고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도 문득 모성의 격려를 느끼게 한다. 많은 문학작품에서 대지는 곧 모성의 상징으로 비유되기도 하는 것처럼 황토흙으로 일구어 놓은 텃밭에서 자라나는 녹색 식물들은 모체로부터 생명을 얻고 성장의 자양분을 받아 자기를 완성해가는 하나의 주체로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 밖에도 작가의 눈에 포착되는 들판과 논에 고인 물, 그리고 그곳에 비춰져서 작가의 망막으로 전해지는 풍경들 모두가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모성과 사랑의 단초를 붙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최연 작가의 작품들을 오래 동안 보아왔다면 이번 개인전은 그런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관점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시선은 이제 보이는 것 너머의 그 무언가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스스로를 조여 놓기도 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느껴지는 모성을 새롭게 감지하도록 자신을 독려하기도 한다. 이러한 감성의 흐름이 작품으로 어떻게 풀어내어지는가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정작 조형적으로 그것이 그리 크게 드러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화면에 담긴 이미지와 색채들에 접근하는 관람객들은 이전보다 더욱 민감하고 사색적이어야 작품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작가와의 공감대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