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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와 전혁림, 그리고 호크니
배병오 | 미술연구자, 부산대 예술․문화와영상매체협동과정 박사과정 수료
https://www.daljin.com/column/23386


| 발굴 자료 |

일러두기
1. 이 자료는 경상남도 기관지 『경남공론(慶南公論)』 제33호(경남공론사, 1956.2.10), 제34호(1956.5.1), 제36호(1956.8.1)에 게재된 전혁림의 「동양화 총론(東洋畵 總論)」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 것이다.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이순욱 교수 소장자료다. 
2. 현행 어문 규정에 따라 표기하였으며, 분명한 잘못을 제외하고는 원문의 표기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3. 잘 쓰이지 않는 낱말이나 어려운 구절은 주를 달아 이해를 돕고자 했다. 
4. 외래어는 원문 그대로 표기하여 당시의 언어생활을 이해하는 실증자료로서의 가치를 간직하고자 했다. 
5. 원문에서 과도하게 쓰인 쉬운 한자는 한글로 바꾸었으며, 어려운 용어나 낱말은 국한문을 병기하였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쉼표(,)를 부가하기도 했으며, 낫표 또한 작은따옴표(‘ ’)로 처리하였다. 


동양화 총론(東洋畵 總論)

전혁림(全爀林)

1. 산수화(山水畵)의 기원과 그 본질 


<그림 1> 『경남공론』 제33호 겉표지

인류가 수렵과 목축 농경에 종사한 때로부터 고대문화가 형성됨으로써 미술도 인류문화의 분야로서 발생한 것일 것이다. 
고대인은 하늘(天)을 우주의 최고 절대자요, 조화의 신으로 생각하였다.
천(天)은 외포(畏怖)로운 속성을 가졌다고 하였으며, 그것을 일월성신․폭풍우․사계의 한서냉난(寒暑冷暖)의 불순한 것, 홍수․일식․지진․혜성 이런 천변지이(天變地異)는 천문학과 기상학적 지식의 혼동이 있었겠지마는 그것은 하늘의 탓이라고 믿었다. 이 하늘의 신위(神威)를 두려워하고 재액(災厄)을 면하려는 욕구는 장차 민족적인 신앙이 되고 이색(異色) 있는 제사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제사는 의식(儀式)이고 국가적인 것이었다. 고산(高山)의 정상에−이것은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데서−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올리고 천자가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이 천자는 하늘의 명령에 의한 지상의 최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제사는 순수(巡狩)라는 의식으로서 순수는 수렵이 아니고,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歲二月 東巡狩 至于垈宗柴 望秩于山川覲東后 協時月正日 同律度量衡修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贄如五器 卒乃復 五月南巡狩至于南嶽 如垈禮 八月西巡狩 至于西嶽 如初 十有一月 朔巡狩 至于北嶽如西禮 貴格于藝祖用特 五載一巡狩 群后四朝 敷秦以言 明試以功 車服以庸 4)

이와 같은 절차로서 산정에 제단을 모시고 시(柴)와 생(牲)−제물은 소를 많이 사용−을 제물로서 불을 질러 그 향연(香煙)을 하늘 높이 올려서 천제(天祭)를 모셨다.
이 제천(祭天)의 의식은 풍우순조(風雨順調)하고 한발(旱魃)․대풍(大風)․홍수 이런 재해를 면하려는 기원이었다. 이것은 자연숭배이며 농경에 종사하는 한민족(漢民族)이 태양과 달과 산악과 하천 및 수목과 숲 혹은 풍운(風雲) 뇌우(雷雨)−모든 삼라만상에 신령의 존재를 믿었다. 그 노(怒)함을 면하고 그 혜택을 얻고자 하였으며, 하늘을 만령일체(萬靈一切)의 통괄자로 생각하였다.
하늘에 신령이 있고 그것을 민제(旻帝) ․상제(上帝)․천제(天帝)라 칭하였으며, 인간에도 영혼이 있으며, 사람은 사후에 그 영혼이 기화(氣化)하여 상천(上天)한다고 하며 그것을 지상으로 불러올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초사(楚辭)의 초혼은 승천한 영혼을 부르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대의 예술은 모두 자연숭배 종교를 모태로 한 것이다. 조형(미술) 예술도 그러하다.


<그림 2> 「동양화 총론」 (1) 중에서

산수화, 동물화도 그러하고 회화 일반의 조형 이념인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우주의 신령이 회화의 세계에 표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령적인 기운생동이 없는 회화는 단순한 형사적(形似的)인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령은 형상을 통하여 형상 배후에 신령의 내재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개지(顧愷之) 5) 는 이것을 신․신기(神氣)라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회화는 일개의 생명체로서 취급된 것이다. 
 고대회화에 흔히 그려져 있는 사신도(四神圖)의 사신은 동물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는다. 산수화도 이런 의미의 자연형상이고 화면(畫面)에서 신기를 느낄 수 있는 신령적인 것이다. 일견 그것은 산하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고 자연 모사의 예술적 그림으로 보이지마는 그 화면에서 느끼는 내면적 의미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화는 신령의 예술이고 생명의 예술이다. 종교적으로 숭배하고 제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회화 조각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고대에 있어서 예술의 발생 성립의 과정의 경로로서는 보통이며, 숭배의 대상이 명산대천 이런 자연이며, 그 자연을 신령적으로 신비시(神祕視)한 것이다.
제사의 의식은 산수화의 형성상에 반영되었으며 산과 물로서 형성되고, 주산(主山)과 군봉(群峯)으로서 구성되었다. 그것은 원후(元后)와 군후(群后), 천자와 군신 제후의 관계를 방불케 한다.
이 산수화의 구성원리는 이성(李成)의 「산수론」에도 있고 한졸(韓拙)의 『산수순전집(山水純全集)』에 기술되어 있다.
그 논산문(論山文)에는 「凡畵山 言丈尺分寸者 王右丞之法則也 山有主客尊卑之序 陰陽逆順之儀」, 「主者象山中 高而大也 有雄氣敦厚 傍有輔峰叢圍者 嶽也 大者尊也 小者卑也 大小岡阜 朝揖於前者順也 無此者逆也」, 「客者 不相下而過也」라 기술되어 있으며, 이것이 산수화의 역사에 내려오는 생명력이며, 산수화의 기원과 본질로서 유구한 전개를 하였다. 그리고 숭고하게 우뚝 솟은 주산, 웅대한 강호, 유현(幽玄)한 공간을 가진 표현으로 독특한 양식이 형성되었다.
이런 사상은 『임천고지(林泉高致)』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大山堂堂 爲象山之王 所以分布以次岡阜林壑 爲遠近大小之宗主也 其象若大君赫然當陽 而百辟奔走朝會 無偃蹇人背却之勢也

고대에 있어서의 자연에 대한 공포가 없어진 시대에서도 산악에서 제왕의 장엄성을 비유하였으며, 시대를 달리하는 중세․근세에서도 산수화는 물상(物象)[山水] 그 자체의 자연을 사실(寫實)한 것이 아니며 산천의 미도 아니었다. 그 형(形)은 산천을 그린 산수화에 다름없으나 그 정신에 있어서는 일폭(一幅)의 의식도(儀式圖)라고 할 수 있다.
제왕과 군신, 엄숙, 장엄한 제천의 의식, 높고 높은 하늘에 민족의 행운을 기원하는 귀천백관(貴賤百官)의 집회 그것은 코직사원 6) (寺院)의 정신성과도 같은 것이며, 사원의 첨탑 대신에 군봉(群峯)․암(岩)․수목․구하(丘河) 이런 것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동양화의 형식 발생은 상형문자에서 시작되었으리라고 한다. 창힐(蒼頡) 같은 사람은 그 창시시대의 대표자로서 산수화의 형상 모사의 시원을 볼 수 있으며, 메산의 산자(山字)와 내천의 천자(川字)의 문자는 그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고, 전기(前記)한 산천의 의식과 더불어 산수화의 전형적 형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상형문자는 오악사독(五嶽四瀆)으로 발전하였다. 보편적인 산천이 특수한 오악사독으로 변화하였다. 고대에 있어서 자연형상이 사실적(寫實的)인 것이 아니고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었다. 육조(六朝) 양식의 산용(山容)은 사실적이 아니고 지도와 같은 도식적인 것으로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의 고대적인 화제(畫題)의 벽화에는 일월성신․왕․비․사신(四神)․산악․운기(雲氣) 등의 형상화는 고대의 회화로서 고분의 천정에는 일월성신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태양․별․천왕(天王) 이런 것들이고, 사신은 고분의 사벽(四壁)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방위신으로 무덤의 사방을 수호하는 영물을 상징한 것이다. 동창룡(東蒼龍) 서백호(西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를 그렸는데 동물에는 틀림없으나 그 형상은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추상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참으로 신괴(神怪)한 그림이다. 그 중 현무도는 거북과 배암의 몸뚱이가 서로 결합하여 두 입에서 불을 토하며 굼틀거리는 듯하는 귀기(鬼氣)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세경(細勁)한 선과 주(朱)․청(靑)․녹(綠)․황토 등의 채색도 강렬하며 참으로 기운생동하는 신기(神氣)를 느낄 수 있다. 이런 그림은 상징화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화제의 그림에 대하여 상기(想起) 않을 수 없는 것은 고대의 궁정의 장식과 벽화다. 그리고 의식의 식장(式場)에 사용된 정기(旌旗)의 그림이다. 분기(墳基)나 묘사(廟祠)는 궁정의 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악사독은 사신 등과 같이 벽화나 정기에 그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산수화와 정기와의 관계에 주의할 것 같으면, 전기(前記)한 것과 같이 사신은 창룡․백호․주작․현무이며 조수(鳥獸) 등의 주제로서 그 형(形)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 신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기에 그려졌다. 사신기가 그것이고 사독기(四瀆旗)는 강하회제사간(江河淮濟四竿)이고 오악도 오악기(五嶽旗) 각오간(各五竿)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식의 재료로서 천신지지(天神地祗)의 제사의 의식장에 사용되었다. 이 천신지지의 의식이 변화 발전하게 되었는데 중요한 의식의 하나로서 천자(제왕)의 즉위의 대례(大禮)일 것이다. 이 의식은 고대 의식의 성대한 발전이다. 이 식전(式典)은 천지산천 사직종묘에 즉위를 고하는 의식이며 그 식장에 전기(前記)의 기를 세우게 된 것이 차차 발전하여 어느 시기에 산수화로 변화한다. 그 식전의 제기로서 동기(銅器)가 이미 사용되었고 또 각 악기도 제조되었으며 음악과 공예도 그 의식에서 이루어진 예술임과 같이 정기(族旗)가 산수 화조 등 회화의 기본적 의식 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는 피륙(천)으로서 제조되었기 때문에 그 유물을 볼 수 없으나 동기유물(銅器遺物)에서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동기에 새기는 것이나, 그리는 것은 그 표현이 곤란하였으나 피륙에 그리는 것은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표현이 자유롭고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도 문양(도안)적인 도식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도식적인 것이 발전하여 산수화로 탄생한다. 오악사독으로서 산수화는 표현되어 있으나 그 오악은 말할 것 없이 산이고, 사독은 천이 아닌가. 산천이라는 문구는 산수의 고칭(古稱)에 지나지 않다.
원시적 관념이 차차 망각되고 정기에 그려진 것이 점차 의식적 환경에서 탈각하고 예술로서 독자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 산수의 칭(稱)이 변혁된 것이다.
산수화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상의 대두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도교와 산수화의 밀접한 관계일 것이다. 도교도는 지나(支那) 각지의 명산대천을 순례하였다고 한다. 실은 그들이 산수미의 발견자이며, 심산유곡을 탐승행각하였다는 것이다. 순례하는 도교자의 등[척(脊)]에는 척여(尺餘)의 경(鏡, 색경)을 달고 다녔다고 하며, 이 경은 당의 의식인 백동경(白銅鏡)인데, 그 경의 척면(脊面)에는 고양적(古樣的)인 산악을 사방에 표현하고 그 여(餘)의 공간에는 수문양(水文樣)으로 물이 표현되어 있다. 그 경의 명칭도 그러기 때문에 사방수경이라 하며, 그 주제는 오악사독이요 산천이다. 자미(滋味) 있는 것은 이 경면(鏡面)의 반사광에 의하여 맹수의 위해를 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기한 바와 같이 산신령을 주출(鑄出)한 경을 휴행(携行)함으로써 ‘마직크’적인 영험을 믿은 것이라고 한다. 즉 산신․산령이 수호한다는 것이다. 이 신령이 인간의 형태로서 표현된 것은 낙랑 발굴의 칠환분(漆丸盆)에서 볼 수 있으며 산상의 남녀 이신(二神)의 신령이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임천고치』에는 「皆天下名山巨鎭 奇崛神秀莫奇窮 其要妙欲奮其造化 則 莫神於好 莫精於勤莫大於飽游餠看 歷歷羅列於胸中』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산수화의 사상에는 도교적 의미가 농후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니미즘’ 시대를 지나 이와 대체하는 신선사상이 일어난다. 원시시대의 자연관은 공포였으나, 역사시대에는 남방사상의 영향도 있겠지마는 이것을 반대로 의식하게 된다.
고뇌는 현실의 인간 사회생활 그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자연의 처참한 재해를 악정(惡政)에 의한 천견(天譴)․천벌이라고 믿게 되었다. 쟁란(爭亂)․학정(虐政)․참언(讒言)․악신(惡臣)․역도. 이런 사회악에 어떻게 청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견딜 수 있으며, 하로도 도저히 살 수 없으므로 자연관에서 인생관적으로 사색하게 된 연유다. 악정에 의한 난세에는 현자는 은거한다는 것이다.
자연 즉 심산유곡은 이런 사람의 피신처가 되었다. 심산유곡은 사회와 상반하는 대척적 존재의 낙천지라는 것이다.
산천초목․청산유수의 미는 정적, 웅대 신성하며 속진(俗塵)에 초연할 수 있으므로 신선의 주거처가 되고 성인 현자의 이상경(理想境)이 아니겠는가? 어찌 동경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자연관은 인생관과의 관련을 가지게 되며, 인생에 대한 체관(諦觀)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시대 발전에 따른 큰 변화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체관 산수화는 이런 체관을 전제로 함으로써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산수화의 발전 전개의 과정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도식적인 것이 사실적으로 추이(推移)하는 계기. 그것은 군사와 정치에 필수인 지도의 존재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 또는 쟁란의 평정에 그 지형의 상세한 지도가 필요하게 되므로 산천의 지형을 그리게 하며 경제․교육상의 요구로서도 사용하였다. 이것이 산수화의 급진적 발전의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누술(縷述)함과 같이 동양 산수화는 극히 특수한 사정에 의하여 성립되고 표현․제작되었다.
서구의 풍경화는 그 발생이 근세이며 순전히 관상(觀賞) 본위에서 성립되고 제작된 것과는 본질적으로 상반하는 것이다. 동양 산수화를 이해하려면 상기(上記)의 유원(悠遠)한 연원을 고찰함으로써 요해(了解)할 수 있을 것이다.
산수화의 기원과 본질은 상기(上記)의 것으로 다음은 남화(南畫)와 화조화의 발생과 성립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2. 화조화(花鳥畵)의 발생 성립 
화조화의 성립의 시초는 물론 지나이며, 그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서구의 정물화가 종교화, 인물화에서 점차 분화 발전한 것과는 다르다. 화조화는 산수화에 인물화, 종교화에서 분화 발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동양화는 결코 순수예술로 발생한 것이 아니며, 문학의 성립과 같은 것이다. 문자는 상형문자며  그림과 구별하기 곤란하였으며, 시대의 진보에 따라 서화일치의 사조로써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문자가 구상성(具象性)을 이탈하지 못하였고 고대 중세의 서물(書物)은 문자와 그림으로 그 내용이 형성되어 있으며, 상고로부터 당(唐) 시대까지 서물은 대부분이 권자장(卷子裝)으로 되어 있으며 그 서물 중에는 문자만으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림만으로 된 것도 있고 그림과 문자의 병용으로 된 것이 많았다. 


<그림 3> 『경남공론』 제43호 겉표지

화조화의 발생 성립에 대한 자료는 지나 각지, 발해, 우리나라의 고고학적 발굴, 발견은 귀중한 성과를 보았으며, 그 중 특기할 것은 강서고분 벽면에 표현되어 있는 사신도일 것이다. 사신과 화조화를 관련하여 고찰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나 이 사주제(四主題)가 근세 현대까지 연면(連綿)히 계속 취급 표현되고 있다. 창룡, 백호, 주작 이것은 용․호․봉황에 틀림없는 것이다. 용호(龍虎)는 그 작례(作例)가 허다하며 그 묘법(描法)이 연대의 하강에 따라 점차 신성이 없어지고 사실적으로 가공적 대상이 도식적인 한계를 떠나 현실화한다. 화조는 근세적인 개념이다. 고대에서는 조수(鳥獸)는 산야에 자서(自捿)하는 동물로서 취급하지 않고, 주작과 창룡은 사신의 하나이며 신으로서 초인간적인 위력을 가진 것으로 취급하였다. 청동시대의 괴수(怪獸), 용(龍), 호(虎), 우(牛), 양(羊), 낭(狼) 등 종류의 동물이 신으로 혹은 신의 제물로 표현되었으며, 미적 전설로 전하는 사주모(西主母)는 모성 중심 시대의 여추장이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조(鳥), 수(獸), 충(蟲), 어(魚)가 신비적 변용을 한 것은 엄밀한 재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주작 같은 것은 치(雉), 계(鷄)의 신격화한 표현일 것이다. 
『설문(說文』에 용은 인충(鱗蟲)의 장(長)이며, 춘분에 하늘에 오르고 추분에 강에 산다는 것은 천지산천의 신이라는 것을 상징한 것이 아니겠는가. 용을 조형하고 그리는 것은 천재지변의 해를 면하고 수호된다는 관념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뇌우, 낙뢰, 홍수 등의 천재는 조물주의 노함의 재변으로 이것을 면하는 방법으로 제사가 유효한 수단이었다는 것은 상기(上記)한 바다. 실로 흑운이 하늘을 덮고 천동지동하는 대폭풍우, 뇌성벽력 이런 처창(凄愴)한 순간의 고대인의 공포는 태양에 대한 숭배 월(月), 성(星)에 대한 숭배 이것은 절대한 힘을 가진 우주의 신이며 포괄적인 위력을 가진 하늘은 일월, 성신, 산, 천, 뇌우의 지배자로서 숭배하였다. 산천의 제사에서 산수화의 원인(遠因)을 볼 수 있는 것과 한가지로 무형의 창천(蒼天)의 상징으로 용을 천신의 제물로서 동물, 성숙(星宿) 등의 상징으로 사신 이것으로 동물화의 발생을 볼 수 있다. 화조화에 대한 이상의 기술에서 꽃을 그리게 되는 동기는 명확하여지지 않았다. 꽃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대는 하시(何時)며, 또 꽃을 가장 많이 그린 시대는 언제였는가. 『당조명화록(唐朝名畫錄)』과 『도회보감(圖繪寶鑑)』에 의하면 당의 변란(邊鸞)과 광유(光胤) 등이 화조에 유명하였고 변란이 가장 화조에 능하였다 한다. 당(唐)시대에는 목단(牧丹)의 관상(觀賞)이 성하였으며 화훼(花卉)의 명수들이 배출되었으며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는 설직, 변란 등이 화훼의 名手로 기록되어 있다. 화조화로써 대성(大成)은 당오대항(唐五代項)을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의 술고지비화진도(述古之秘畵珍圖)로서 신농(神農), 본초도(本草圖), 이아도(爾雅圖), 영수본초도(靈秀本草圖), 고서응도(古瑞應圖)[이것들은 권물본형(卷物本形)의 서물(書物)] 등의 권물본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목(木), 석(石), 화(花), 조(鳥) 동물 등을 위시하여 특히 이아도권(爾雅圖卷)은 천지산천 인사의 광범위한 기록 표현이라 한다. 이런 서물에는 꽃이 무수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 묘법(描法), 저채법(著彩法) 등의 기법상의 전통은 화조화로 후세의 것과 같은 관상적인 대상이 아니고 실용적이며 지식적 학문적 대상으로 표본적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점차 진보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진한시대부터 남북조를 지나 수당에 이르며 인물 산수와 같이 대성하였다. 궁정의 전속 화인(畵人)은 후세의 문인화가나 현대화가처럼 생활이 순수하지 못하고 인물화나 후궁의 가려(佳麗)만을 그리지 않고 언(偃), 식도(息圖), 의복, 기구, 조도(調度)의 문양을 그리고 분묘의 내벽에 사신 문양을 그리고 건축 등의 단청에도 종사하였다.
서물도 근세의 조잡한 것으로 상고(上古)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한(漢)의 무제(武帝), 역대의 제왕이 애완(愛玩)한 서물은 최고(最高)의 것이었을 것이다. 상고(上古)의 회화는 벽화 혹은 권자본(卷子本)으로써 제작되었으며 근세 현대의 족자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권자본이란 서적의 고풍(古風) 형태이며 견본(絹本), 지본(紙本) 이런 것 등이며 정미(精微)한 저채(著彩), 미려한 호화본이었다는 것이다. 그 서물의 삽화에 지나지 않었으나 결코 보급유포를 위한 것이 아니고 궁정용 특제본이었다. 화조화의 일반특징은 생태묘사일 것이다. 이아화권물(爾雅畵卷物)의 목차에서 화조화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석초(釋草), 석목(釋木), 석충(釋蟲), 석어(釋魚), 석조(釋鳥), 석수(釋獸), 석축(釋畜) 등이며 특히 충(蟲,), 어(魚), 조수(鳥獸) 등의 생태묘사를 한다면 화조화의 형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충(蟲)은 충만을 표본같이 묘사하지 않고 그것은 꽃에 붙언 혹은 꽃나무 가지에 붙언 것을 그리게되며 나무 잎과 그 열매와 같이 표현하게된다. 조수(鳥獸)도 그러한 표현을 하였으며 ,그 각각 습성에 따라 그 거소(居所)가 다르며 수축(水禽), 야축(野禽), 산축(山禽), 가축(家禽)의 별(別)은 분명하여진다. 노(蘆) 7) 에 안(雁)을 배(配)하고 송(松)에 응(鷹)을 동(桐)에 봉황을 율(栗)에 순(鶉) 8), 요(蓼) 9) 에 아(鵝) 10) 을 배하는 류(類)는 모두 이아도(爾雅圖)나 이와 유사한 서물의 도해적인 유제(遺制)에 의한 겻이라 한다. 이 이아도(爾雅圖), 채약도(採藥圖), 본초도(本草圖), 신선지초도(神仙芝草圖), 선초도(仙草圖) 등 각각 수권(數卷)에서 수십권으로 화조, 동물, 산수, 궁실(宮室), 충어(蟲魚) 등 광범위한 제재의 생태묘사가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권물본(卷物本)은 고대(古代)의 ‘엔사이크 로베티어’로 시인 관리들은 이 서물에 의한 여 오방(五方)의 언어 명물을 지득케 하였으며 동양회화의 제재의 방향범위의 다기(多岐) 다양함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화의 정물화와 이런 점으로 큰 상위(相違)가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지나 화(畵)의 존재 이유는 권계(勸戒)를 위함이라함도 도덕적인 교학(敎學)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천지 자연 인륜에 통하는 우주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권계의 대상이 일체만유(一切萬有)에 항(恒)하면 그 해석의 방향이 수신 치국의 대강을 말하며 도덕적 경향에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조화에 있어서 화목(花木)은 오행(五行)의 정(精)이며 천지기득(天地氣得) 음양일로(陰陽一嚧)하여 부영(敷榮)한다 11) 는 것이다. 사계(四季) 화조라 하는 것은 이런 사상으로 이해되며 고대적(古代的) 제약을 떠나 사유할 수 없는 필연적 관연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목단은 백화의 왕이며 부귀의 꽃으로 취급되고 굴원(屈原)의 심경을 혜란(蕙蘭)으로 비유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으로 우의적(寓意的)이며 가탁(假托)이며 일종의 사상적 상징이 내포되어있다. 주죽(朱竹) 묵죽(墨梅) 등의 특수한 초현실적 표현의 기이한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기린, 봉황을 즐겨 그린 것도 그것을 서상(瑞象)으로써 이고 단순히 대상의 미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조수(鳥獸)를 유구한 세월에 반복하여 그리고 이 공상적 동물은 어느 때 어떤 사람의 공상이며 표현한 것인가 알 수 없다. 이것이 중세나 근세기의 것은 아니다. 고대인(古代人)만이 공상하였고 또 그릴수 있었다. 
이것이 전기(前記)한 고서응도 권물본(卷物本)같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조화의 발생은 우연이 아니며 오랫동안 서물에 초화(草木), 화(花), 과실(果實), 충(蟲), 어(魚), 각종,다양의 조수(鳥獸)를 그린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복잡한 내용으로 발전하여 권자장(卷子裝)이 불가능하게되어 당말오대항(唐末五代項)에 몰락(沒落)하였다. 권자장의 포기로 계기하여 책자본(冊子本)의 철본(綴本)이 생겼고 이 철본에서 수천년 래(來)의 숙연(宿緣)인 회화와 문자의 분리가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림은 그림으로써 문자는 문자로써 각각 독자의 분화 발전하여 문(文)은 책자본(冊子本)으로 그림은 괘축(掛軸)으로 개방적 신형태로 개장(改裝)되었다. 이것은 근세의 여명이며 회화는 회화의 형(形)으로 문(文)은 문의 형태에 안정(安定)하여 가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회화는 서물의 부속으로부터 독립하게됨으로 화조화는 급격하게 화단(畵壇)의 중요한 부문을 점유하게 되었다. 화조화가 완전한 내용으로써 또 양식으로 관상(觀賞) 형식으로 독립, 대성한 시대이며 송대(宋代) 이후에 쇠퇴하였다. 화(花)․충(蟲)․어(魚)․패(貝) 등 화조화의 대상은 광범하며 본초도권(本草圖卷) 이아도권(爾雅圖卷) 등에서 전개하였다면 어떤 종류는 허다하게 묘사하였고 어떤 것은 적게 전연 그리지 않은 것도 있으며 성립(成立) 이전에는 모두 필요에 따라 실제요구되는 것만을 묘사하였을 것은 명확한 것이다. 
분기(墳基) 등의 벽화로서 사신의 조수(鳥獸)는 수호신이라는 정신적 목적이 있었다. 우마(牛馬) 등의 육척(六畜)은 고대(古代) 민족의 산업에 필요하였고 일면 신의 제사의 희생물이다. 마(馬)는 승용으로 팔준도(八駿圖), 마상도(馬像圖) 등의 묘사가 있으며 매(鷹)는 수렵용으로 『역대명화가(歷代名畫記)』의 고화(古畵)로 전래하는 삼왕상응도(三王相膺圖)가 있고 이런 고화(古畵)의 맥락으로 징종(徵宗) 황제의 응도(鷹圖) 등을 볼 수 있으며 진축이수(珍禽異獸)도 호화제(好畫題)였다. 후에 발달한 화조화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희소하다. 진(晉) 명제(明帝)의 『명화가(名畫記)』에는 잡조수오(雜鳥獸五) 잡이조도(雜異鳥圖), 잡축수도(雜禽獸圖) 등의 생태묘사는 우수한 화조화로서 구성되었다. 징종의 홍요백학도(紅蓼白鷄圖)는 필연적인 생태묘사의 화조화다. 특히 야축산조(野禽 山鳥)의 생태묘사한 것은 다수하며 과실과 꽃과 같이 묘사하였고 혹은 산 수변의 전경(前景) 배경을 묘사하였다. 수렵의 실경(實景)을 그린 것도 있으며 귀족이나 시인이 애호하는 대상을 표현하였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아조(鵝鳥)의 애호, 당(唐) 시대에 목단이 유행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남북문화의 중심으로 남북조시대와 남송(南宋) 시대에 화조화에는 풍토적 간계(間係)가 중요하며 토지풍토의 변화에 따라 사상적으로 또 기호적인 변화를 하며 고풍적인 일체의 장벽(墻壁)이 없어지고 화풍(畫風) 화제(畫題) 상(上)에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 취조도(鷲鳥圖)나 아조(鵝鳥) 기타 수축(水禽)의 등장 등은 모두 이런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도교의 자유사상 그 신봉자인 문인, 묵객(墨客)들이 관연(關聯)한다. 서와 화 시와 화 이런 관계는 그 유래는 상기(上記)한 서물에서 발전, 전개한 것이지마는 고풍(古風)의 정신적 요구이며 동시에 그 반면 분화 독립의 기운을 볼 수 있다. 그림의 제찬(題讚)도 최초에는 시문에 대한 그림이며 그림에 대한 시문으로 실제적인 것에서 예술적으로 변하였다. 시인이 관심을 가진 것을 그림으로 화인의 그림이 시문으로 그 대상이 예술로써 등장한다. 직업적인 화인과 자유인의 문인묵객 즉 문인화가의 관계가 이것이고 남북조에 이 이종(二種)의 화인이 對立하게된다. 이 양자의 관계가 후세에 계속되며 광범한 대상의 다양에서 서서히 화조화로써 독특한 선택이 이루어진다. 문인화적 예술의 관조와 직업적 궁정화가의 그것이 다른 것은 그 화제(畫題)를 자유선택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자상승적(師資相承的)인 궁정작가는 점차 몰락하고 문인화 전성기가 도래한다. 화조화로써 취급되는 과물(果物)은 계절을 가리게 하며 매(梅), 수선(水仙), 설송(雪松), 운류(雪柳) 등도 한기(寒氣)에 꺽기지 않고 견딘다는 관념을 상념한 것이다. 율(栗)에 순(鶉)을 묘사하고 가곡명축(嘉穀鳴禽)이라 제(題)하며 사군자(四君子) 오서도(五瑞圖) 삼우(三友)라 함은 모두 계절에 따라 도덕적의미를 잊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예기월령禮記月令』의 기술(記述)이 예상(豫想)되며 유교적인 권계사상(勤戒思想)의 일부를 알 수 있는 반면, 도(桃), 영지(靈芝)와 같은 것을 묘사한 것은 도교사상의 혼재일 것이다. 천문(天文) 역수(曆數) 오행사상(五行思想)도 혼재한다. 그러나 구극(究極)에는 미적인 선택이 표준이 되었다. 화조화의 성립은 이것으로 확인할수 있으며 사상적인 가탁(假托)이나 부회(附會) 상징(象徵)은 고대적(古代的)인 잔재일 것이다. 하계(夏節)의 수변의 호백(晧白)한 아조(鵝鳥)의 미, 홍요(紅蓼)의 점출(点出) 배색(配色) 그것은 자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나 그 일각은 산수화의 원대한 대관(大觀)과는 상조(對照)되는 특이한 세계며 조화의 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수의 웅대하고 준(峻)함은 남성적이라면 어데까지나 절실한 미에 도취(陶醉)할 수 있는 탐미적인 화조는 여성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정(雪汀)에 머무는 수축미풍(水禽微風)에 나부끼는 목단화(牧丹畵)의 풍정(風情)을 화조화의 욕구한 세계며 미일 것이다. 고대적 중세기적인 것이 차차 청산되고 신비적 괴이적인 대상이 적어지며 산해경백택도(山海經白澤圖), 이아도(爾雅圖), 본초도(本草圖) 등에서 취급된 것이 없어지고 평범한 취재로 변하였다. 난이나 국화, 매(梅), 목단(牧丹), 죽(竹), 송(松) 등 무한한 초목류에서 국한되며 고정하였다. 동양화의 사의(寫意)나 사생(寫生)의 문제도 화조화와 산수화로 양분되며 화조화는 사생적(寫生的)일 것이다. 미세한 우모(羽毛), 화변(花辨), 화예(花蕊) 12) 을 묘사하고 충류(蟲類)의 촉각까지 묘사하는 화조화의 세계는 지식적이며 사생적(寫生的)일 것이다.
조수초목(鳥獸草木)은 실은 고대사회의 생산의 즉 목축, 수렵, 농경 등의 대상이 되었으며 비생산적인 예술이 아니었다. 이것이 근세 현세에서는 순관상적(純觀賞的), 향락적 장식적으로 변천하였다. 화조화는 상기(上記)한 사신도와 여(如)히 종교적인 성립과 본초도(本草圖), 이아도(爾雅圖), 삼례도(三禮圖) 기타 서물로써 성립과 두가지로 볼 수 있다. 고대(古代)에 있어서는 실제 중세기부터 근세 현세에는 비실제적 예술적요구에서 화조화를 그리게 되었으며 산수화나 인물화에서 분화, 발전한 것이 아니며 그 내용과 양식이 대립되며 종속적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계속) 

3. 南畫起源과 樣式의 特性
산수화양식은 남화(南畫), 북화(北畫)의 이대별(二大別)이 타당하며 북화양식은 남화에 앞서 성립된 것이다.
산수화의 중요한 기초양식은 주산, 군봉, 수석(樹石)이며 남북화는 동일한 구성으로 지리적영향에 기인한 북방적 남방적인 지방색을 묘출하였으며 양자는 대척적(對蹠的) 관계를 갖이게된다. 남화의 주산, 군봉, 수석, 하강(河江) 같은 구성은 북종화(北宗畵)의 영향일 것이다. 북화양식은 경직하며 진선적(眞線的)인 것이며 남화는 온화한 곡선으로 표현하였다. 북화의 주산은 직립한 빙주(氷柱)와 같이 표현한 것에 비하여 남화의 그것은 원정(圓頂)이며 북화에서는 위의엄연(威儀嚴然)한 의관거례(衣冠車帶)의 관인(官人)을 연상하며 관료적인 인상이라면 남화는 평복인 온후한 야인적이며 야일(野逸)의 풍취를 연상하게하는 것이 특색일 것이다.


<그림 4> 『경남공론』 제36호 겉표지

북화의 화법은 부벽화(斧劈畵)이며 남화의 그것은 파마화(披麻畵)이다. 이런 양식 특성은 시대, 작가, 토지의 여하를 막론하고 일관한 南,북 화의 기초 양식일 것이다.
남종(南宗) 산수화의 양식 성립은 지리적 자연 환경이 중요하며, 양식 특성을 제약하며, 결정적으로 어떤 민족, 어떤 시대, 그리고 작가 개인의 양식이 그 민족과 시대적 취미, 기호일 것이다. 자연 모사적인 회화 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문화 전반에 항(恒)하였으나 그 간(間)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볼수 있는 것이 회화 예술이다.
송대(宋代)의 그 개화기에 동원(董源), 거연(巨然), 미씨부자(米氏父子) 등의 남종파(南畫派)의 거장들이 지나 대륙의 자연 환경의 영향을 받었으며 그것이 양자강 하류 남안인 지방이며 이 지방의 명미온아(明媚溫雅)한 산수의 영향일 것이다. 황하 유역 지방에서 발달한 지나 문화가 남방(南方)에 파급한 때는 삼국시대라 하며 북방문화가 남방적 토지 자연의 영향으로 변화하여 0주적(0做的) 13) 이 아니고 독자의 형태로 성육(成育)한 것이 남화이며 조형적 표현인 것이다. 양자강의 남안지방이며 하류인 현금(現今)의 남경(南京), 소주(蘇州) 일대를 강남(江南)이라 칭하였고, 건강(建康)은 현금의 남경이며 이곳에 남화의 거장인 동원, 거연이 배출하였고 이 양자강반(揚子江畔)이 지나 산수화가에 무한한 화재(畵材)를 제공한 유수한 사생지(寫生地)였다.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는 「吳王趙夫人, 丞相趙達之妹。善書畫, 巧妙無雙, 能於指間以彩絲織爲龍鳳之錦, 宮中號爲“機絕”。孫權嘗歎, 蜀魏未平, 思得善畫者圖山川地形, 夫人乃進所寫江湖九州山嶽之勢。夫人又於方帛之上, 繡作五嶽列國地形, 時人號爲“針絕” 14)。운운(云云)」하였으며 여기말한 산천도는 순전한 후세의 산수화와는 구별되는 지도라는 것이며 그러나 현금의 지도와 같은 평면도는 아니며 특히 오악도는 산수화 성립의 기초 양식이며 오악 중의 하나 형산(衡山)은 남악(南嶽)으로 호칭하였으며 강남수일(江南隨一)의 명산이라한다. 
남조의 화풍은 완려청아(婉麗淸雅)하였으며 왕희지왕헌지부자(王羲之王獻之父子)의 이명수(二名手)가 출현하였다. 남인은 이왕(二王)의 서술(書述)의 모방에 부심하였으며 회화에는 육탐징(陸探徵) 양(梁)의 장승요(張僧繇)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를 육조(六朝)의 삼대가(三大家)로 칭호하였고 화론(畫論)도 성하였으며 제(齊)의 사혁(謝赫)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설(說)을 논한 것은 북조(北朝)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강남의 산수화는 오(吳)의 오왕조부인(吳王 趙夫人)이 강호구주산악(江湖九州山嶽)을 그린 이래 동진의 고개지는 그 화론에 인물 묘사는 가장 난(難)하며 다음 산수, 구마(狗馬) 운운(云云)으로 묘사에 있어 산수는 인물보담은 그 표현이 용이하나 동물보담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표면적으로는 표현의 기법상의 문제일 것이나 그 배후에 어떤 뜻이 내포되어있나는 것을 고려하여햐 할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취호(趣好)와 관연이 있는 것으로 수긍할수 있는 것이다. 당시 사회의 욕구는 주로 인물화 산수화를 좋아 하였으며 고개지는 그 시대의 사람으로 강소성(江蘇省)의 무석(無錫)에서 출생하였으며 상해(上海)와 남경의 중간지대인 강남사람이다. 그 시대의 회화는 현저히 진보를 하였으며 한이래(漢以來) 외래화(外來畵)의 영향으로 인물화의 발전이 현저하였으며 산수화로 도교사상과 남방의 자연의 영향으로 고호(高湖)한 시대이며 산수화 양식도 남방적으로 발전하게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고개지는 인물화가로써 탁월하였으며 산수에도 능하였다. 그러므로 남방적 산수화의 창시(創始)시대의 유력한 일대표(一代表) 작가일 것이다. 『역대명화기』에 형태를 전사(傳寫)하여 묘절(妙絶)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송(宋)의 종병(宗炳)은 양자강 상방(上方)의 강육(江陸)사람으로 고개지와는 사제의 관계는 없었으나 양작가(兩作家)의 관련은 작품상으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종병은 은일(隱逸)의 사(士)로써 장강(長江)의 상류 형산(荊山), 무산(巫山), 남으로는 동정호(洞庭湖)의 남방 형산(衡山)에 주거하였으며 그 화산수서(畵山水序)에는 자연에 대한 애착을 생애을 통하여 잊을 수 없는 것으로 특기(特記)하였으며 산수화와 장강 유역과의 관계의 명확한 先0을 종병의 탁월한 표현에서 볼 수 있다. 도교도의 종교적인 고찰에서 예술적으로 관찰한 이것이 최초이며 산수화 사상(史上)의 불멸의 공적일 것이다. 북방은 문화의 중심적인 것을 상실함과 동시에 신회화의 모태도 될 수 없었다.
신시대의 우주관, 자연관은 자연 숭배의 관념에서 예술관으로 자연미의 발견으로 전개하였다. 고풍적인 상방(四方)이라는 방위에 의하여 관념적으로 선택한 자연이 아니고 종병은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연 본위로 독자의 신조에서 산수에 유력(遊歷)하여 그 한계내에셔 산수를 그렸으며 천문 지리, 종교 사상 혹은 정치 사상 등의 기반(羈絆)에서 탈각하였다. 이것이 남화의 기원이며 시초일 것이다.
남화 연구의 대상으로 양식 자료를 이종(二種)으로 대별(大別)한다면 그 하나는 금석(金石) 자료이며 또 하나는 회화 작품의 유품(遺品)일 것이다.
주(周) 대의 동기(銅器)로써 산문수하정(山紋垂下鼎)이라던가 산종(山鍾), 산문순(山紋錞)이며 이런 동기석벽(銅器石壁)에 표현되어있는 그림은 상형문자의 류(類)이며 지나치게 기고(奇古)한 것이다. 이것이 발달한 고종(古拙)한 양식을 잔견(殘見)할수있는것에 고구려 시대의 고분우현(古墳遇賢) 이대묘현실(里大墓玄室)에서 볼 수 있는 벽면산용(壁面山容)이다. 주봉은 고용(高聳)하며 좌우양협(左右兩脇)에 이산저병(二山低並)한 것은 주(周)의 산종(山鍾) 문양에서 볼 수 있는 산자형(山字形)의 그것과 공통한 점이 많다. 이것은 지나, 일본 등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귀중한 유물이라. 이것으로 대체(大体) 남방적 산용발전(山容發展)의 추이를 볼수 있으나 회화적이라기보다. 문양적인 것이다. 남화 산악의 표현 양식의 전형적인 것은 미불필(米芾筆)로 전(傳)하여오는 운산도(雲山圖)가 대표작이며 한 대(漢代)의 산수○(山獸○) 13)  等에서 볼 수 있는 산용(山容) 표현은 다소 복잡하며 상당히 진보하였으며 주대(周代)의 문양적인 산용에 비하여 회화적이며 사생적(寫生的)인 정채(精彩)를 볼 수 있다.
곡선 본위의 원정(圓頂)의 봉두(峰頭) 산복(山腹)의 철기(凸起) 그 철기의 대소에 따라 산정(山頂)이 다소좌우로 기우러저 있는 양(樣)이라던지 남화 특유 양식의 고양(古樣)을 볼 수있으며 扶餘出土畵0에는 산악이 중첩한 하방에 암(岩)의 난립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남북 양양(兩樣)의 혼재이며 산형의 원정 그 하방에 수림(樹林)을 부조(浮彫)하였으며 상공(上空)에 경운(慶雲)을 표현한 그 균세적(均勢的)인 산용은 다분히 문양적인 것이나 그 표현 방법이 진보한 것을 용이하게 료해(了解)랄 수 있다. 이것이 금석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것이고, 회화 유품(遺品)으로서는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 낙신도권(洛神圖卷), 회인과경고구려고분벽화(繪因果經高句麗古墳壁畵), 왕유(王維) 작, 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 권(卷) 등이며 그중 회인과경에 전형적 남화 양식을 볼 수 있다.
남화 기원의 문제는 곤난하며 명확한 단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며 남화와 문인화의 한계에도 이론(異論)이 있으며 이것은 양식, 기법 그것이 대상이되며 필자의 신분 직업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양자간의 복잡한 장애를 제거하므로 명(明)요하여질 것이다. 남화의 기원은 왕유(王維)에서 시초가 아니고 그 양식 성립의 동인은 지리적 자연 환경의 영향, 남북조 지나 문화의 남방 이동 그 시대의 남방 산수화에서 그들 작가에 의한 지방 산천풍경 사생(寫生)이 남화 양식의 성립 기원일 것이다.

4. 水墨의 발생 성립

수묵화(水墨畵)라함은 주로 산수화를 말함이다.
수묵산수는 동양화의 중요한 영역으로 그 성립경로는 명확하지않다
수묵화 성립의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서는 필묵(筆墨)의 발명이며 이 재료의 우수한 것이 제조됨으로 수묵화는 결정적으로 성립 발전하였다.
수묵화는 어떤 사람이 창시한 것인가 명확하지않다.
원래 수묵화는 어떤 것인가? 묵화와 수묵화는 어떻게 다르며 실제의 작품에 묵만으로 그린 것과 약간의 색채를 사용한 것이 있으며 묵만을 사용하되 백묘화(白描畫)와 같은 선을 주로 한 것이 있는가 하면 묵죽(墨竹) 묵매(墨梅)와 같은 단순한 것도 있으며 미밀(微密)한 화(畵)와 선염(渲染)으로 묘사한 산수화도 있다. 이것을 묵화 또는 수묵화의 명칭으로 포괄할 것인가 양자는 각각 다른 특질을 가진 것일까 묵화란 일정한 농도를 가진 묵즙(墨汁)으로 그린 것으로 묵란(墨蘭)과 묵죽 등의 문인화 사군자가 그것이다.
마원하규(馬遠夏珪) 등의 산수화나 수계(收溪)의 유명한 관음원학도(觀音猿鶴圖) 등은 묵(墨)이 기조가 되어 있으며 약간의 채색을 사용한 것인데 이상의 이종(二種)의 그림을 대조하여 전자를 묵화(墨畫), 후자를 수묵화(水墨畵)라 할 것인가?
사원(辭源)에는 수묵의 조(條)에 「水墨畵之略稱(書鑒) 董源山水有二種 一種水墨-樣著色-皆佳作也)라 하였으며
수묵화의 조를 보면 「畫法以不施彩色及鉤勒, 專用淡墨渲染而成者謂之水墨畵」라 기술되어 있다.
수묵화란 그 기법상 담묵(淡墨)의 선염으로 제작된 것이며 다소의 채색은 산수화 화조에서 볼 수 있다. 학의 단정(丹頂)의 주점(朱点)을 주색(朱色)으로 묘사한 것이라든지 원산(遠山)에 담람(淡藍)을 사용하는 것은 수묵화 일반의 상투적 수법이다. 색채가 미미한 것은 착채화(着彩畵)라 할 수없는 것이다.
수묵화는 선염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기법이며 용묵법(用墨法), 용필법(用筆法)이다. 진대(秦代)에 필묵(筆墨)이 제조되었으며 書 , 畵作에 중용하였으므로 묵화는 대체 필묵의 성립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수묵화는 그와 다르며 필묵지(筆墨紙)같은 문방구(文房具)는 지나 육시대(六時代)에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법상(畫法上) 용필용묵법이 격변한 시대는 당대(唐代)이며 오도자(吳道子)는 그 혁신의 유력한 대표자일 것이다.
유계묘(遊系描), 철선묘(鐵線描) 등의 묘선(描線)은 다분히 고대적인 면을 볼 수 있고 모필(毛筆)의 호단(毫端)으로 그린 선은 억양과 비수(肥瘦)가 없으며 장선(長線)을 그릴뿐 모필의 기능을 십분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런 묘선의 단순성은 죽정(竹挺)시대의 유풍(遺風)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한 탓이다. 죽정으로 담화(淡畫)한 것이 모필을 사용함으로 신경지가 이루어진 것이다. 수묵화의 발전은 신기법 훈취법(暈取法) 등으로 음영(陰影)을 묘사하여 동양화의 독자적인 공간표출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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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경』 우서(虞書) 순전(舜典)에서 가져왔다. 

5) 원문에는 ‘顧愷文’이라 표기되어 있다. 

6) 첨탑을 갖춘 중세의 고딕사원으로 보임.

7) 갈대

8) 메추리

9) 여뀌

10) 거위

11) 꽃이 피어 무성하다

12) 꽃의 수술과 암술

13) 글자가 깨져 해독이 어려움

14) 전혁림의 글에는 부분적으로 오탈자가 있고 끊어 읽기도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어 역대명화기의 원문으로 바로 잡았다.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왕의 조부인은 승상 조달의 누이동생이다. 글씨와 그림을 잘했는데, 그 교묘함이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손가락 사이로 비단실을 가지고 용과 봉황의 비단을 짤 수 있었기 때문에, 궁궐에서는 (조부인을) ‘기절’이라 불렀다. 손권은 일찍이 촉나라와 위나라가 평정되지 못했음을 탄식하면서,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얻어 (전국의) 산천과 지형을 그리려고 했다. 부인은 곧 강호 9주의 산악 기세를 그린 그림을 바쳤다. 부인은 또 네모난 비단 위에 오악과 각 나라의 지형을 수로 놓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침절’이라 불렀다.”(장언원(張彦遠),조송식 옮김, 『역대명화기 하』, 시공사, 2008, 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