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FROZEN GAGE》 | 부조리한 삶과 예술적 승화를 위한 제의
심현섭 | 예술학/미술비평
조선희의 《FROZEN GAGE》(10.31.~26.1.25. |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는 주검의 포획이 자칫 가학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오해될 만큼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그것이 연민이나 동정보다는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유는 그 포획의 이미지가 생명과 죽음이라는 삶의 근원에 대한 응시와 몰입의 순간을 제공하는 예술적 창조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조선희의 작업에서 가시적 물질이 생멸(生滅)에 관한 비가시적인 사유로 변화하는 과정은 사체-결빙-해빙이라는 경로를 거친다.
작가는 어느 날 새의 주검을 발견한다. 죽은 새를 본 순간, 그의 내면에 자리하던 죽음의 기억과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결핍이 부상한다. 그의 마음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상실한 아버지의 존재가 사랑도, 동일화도, 애도도, 그리움도 되지 못한 채, 표현하지 못한 결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결핍에 의한 조선희의 깊은 상실감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마음에 새를 “사라지지 않게” 얼리고, 응시하는 단계에 이른다.
“《FROZEN GAGE》는 이 반복의 표면들이다. 죽은 새의 몸은 얼음 속에 갇혀 있지만, 그 얼음은 투명한 관이 아니다. 감정이 도달하지 못한 경계, 나는 그 표면을 응시한다. 이미지는 그 반복의 충격을 조용히 담아낸다. 정지된 시간, 말 없는 공간, 침묵하는 형상 안에서 감정은 격렬하지 않다. 대신 천천히 가라앉고, 신체적 감응의 층으로 남는다. 이름 붙이지 못한 진동들, 애도 되지 못한 감정의 퇴적물이 얼음덩어리의 표면에 층처럼 쌓인다.”
-조선희
정지된 주검을 마주하는 시간은 “응답을 바라지 않는 시선,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응시”만이 존재한다. 죽은 새의 발견이라는 사건이 미완에 그쳤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애도로 이어지고, 그 감정은 새로운 무언가로 승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조선희에 의하면 그 애도는 “어떤 서사도, 감정의 고양도 없다. 얼어붙은 사체들은 장엄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응답 없는 침묵 속에서 작가는 “감당할 수 없는 생명 앞에 도달한다.” 이러한 경로를 따라 조선희가 차마 버릴 수 없어 보존했던 새의 주검은 결빙과 해빙의 이면에 담긴 응시와 파괴라는 개념을 거쳐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한다.
물질적 사건과 정신적 사유의 경로
조선희의 《FROZEN GAGE》에 드러난 물질적 변화에 따른 정신적 사유의 이동 경로를 정리하자면 1. 발견된 사체로 인한 죽음의 확인과 결핍의 부상 2. 결빙의 시작으로 생성되는 관계의 부활에 대한 기대 3. 결빙의 순간 및 완성이 열어놓은 응시의 시공간 4. 해빙을 통한 파괴와 예술적 승화이다. 이를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발견된 사체에서 작가가 확인한 것은 “그 시작 전부터 결핍되어 있던”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결빙은 죽음보다는, 죽음으로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가벼운 새 한 마리의 사체는 관계의 부재로 인해 반복되어온 상실의 아픔이 물질로 가시화한 것이며, 길에서 발견한 죽은 새를 사적 공간으로 들여와 얼리고, 사진 찍고, 해빙하는 일련의 행위는 열네 살 때 상실한 아버지와 맺지 못한 사적 관계를 재현하려는 보상심리의 결과로 추측되는 것이다. 결빙을 시작하는 작가는 부재했던 존재와 관계를 회복할 양으로 죽은 새를 얼음 속에 가둔다. 40여 년의 세월을 되새김하여, 이를 기억과 애도의 물질로 붙들어놓기 위해 시간, 공간, 형상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얼음은 층을 더하며 단단해진다. 이때 작가는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관계의 회복을 극도로 기대할 터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재생 혹은 부활의 느낌까지 나아간 기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대는 해빙의 과정에서 힘없이 무너진다. 사체의 결빙 상태는 이내 원래의 상태로, 아니면 한 번 더 물에 젖고 얼고 녹음으로써 더욱 처절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결국 사체는, 그리고 아버지는 재생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감지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떤 서사도, 감정의 고양도 없는, 장엄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보낸 응시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임을 확인할 뿐이다. 여기서 대상의 응시가 주체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거나, 그 차이에 큰 의미는 없다. 응시의 어느 시점, “나는 지금, 이 멈춘 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새로운 감정의 상태에 젖어 드는 현상 앞에서, 그것은 수사의 기술이다.
작가는 해빙의 과정을 통해, 결빙에서 감지했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곧 예술적 승화임을 깨닫는다. 여기에는 불멸의 의지를 포기하고 인간의 필멸을 수용하는 일, 더 나아간다면 생명 있는 것의 의도적 파괴, 그러니까 오랜 시간 속에 묵히고 보류했던 애도에 대한 빚진 심정, 이 경우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부재에 대한 역설적 부채 의식의 청산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청산은 안타까운 고통과 아쉬움을 수반한다. 작가는 이 고통이 사진의 찰나에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던지 2분 30여 초짜리 영상 두 개로 분절한다. 그래서 사진의 컷, 즉 단절된 시간 속에 담으려 했던 작가의 고통과 아쉬움은 연속된 시간 속에 분절하여 담기는데, 그 작은 구멍에는 죽음과 부활의 기대 욕구와 필멸의 파토스가,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와 좌절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상 속에 조금은 차가운 기운(客觀的)으로 속절없이 흐른다.
고통과 허무의 이미지
《FROZEN GAGE》는 살아 있는 것들에 필연적으로 달라붙는 고통과 허무를 곱씹게 한다. 팽팽히 얼은 결정체들의 시린 차가움, 쨍하고 갈라진 미묘한 선의 포착, 막 녹기 시작한 옅은 얼음 위에 흐르는 액체의 처연함, 해빙의 과정에서 일어난 기포의 허무성, 종종 새어 나온 피의 획과 번짐이 소환하는 삶의 치열함, 얼음 속 사체들의 허망한 눈과 포즈가 지시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을 향한 질긴 의지와 불가피한 포기, 일정한 형태의 얼음 속에 갇힌 육체가 상징하는 코뚜레 같은 삶의 굴레. 이 모든 이미지는 상처 입고, 또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내야 하는 오랏줄 같은 삶의 고통과 일정한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지프의 형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듯 부조리한 삶에 덴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내야 하는 피조물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럼에도 그 속에서 생명의 의미를 추출하려는 몸부림밖에 없을진대, 그런 의미에서 조선희의 결빙과 해빙은 고통에서 기쁨을, 절망에서 희망을, 죽음에서 부활을 추출하려는 신을 향한 피조물의 절실한 제의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제의에 바쳐진 제물인 새들의 사체는 조선희의 의인화 과정, 즉 결빙과 해빙이라는 행위를 통해 육체라는 물질을 걸치고 한 생을 살아낸 인간들로 변화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맞는다면 결빙과 해빙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한 바탕 제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빙과 해빙의 원초적 제의
조선희는 사체에 물세례를 베푼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창조를 상징하며 혼돈과 질서, 죽음과 재생의 순환을 의미한다. 종교에서 물로 이루어지는 의식은 산자의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스치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사체에게 행해지는 그의 물세례는 아버지의 부재를 되돌려 재생하려는 시도로서 결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가 이 행위로 생명이 부활할 수 있다고 기대할지언정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다. 결빙과 해빙의 화학적 작용의 우연성과 더불어, 확신이라는 경직성이 없는 조선희의 제의는, 그래서 원초적이다. 그의 제의에는 오직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결여한 관계를 채우려는 욕구, 그러니까 아버지와 나눠야 했던 감정을 나눌 시공간과 응시의 여유를 마련하기 위한 혈육의 그리움 같은 본능적인 욕구만이 생성과 반복을 거듭하는 미완의 상태로 강하게 꿈틀거릴 뿐이다.
이와 같은 감정의 진동상태를 조선희는 이렇게 말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들이 반복해서 귀환하고, 응시는 침묵의 바깥에서 조용히 머문다. 이곳은 형상의 중심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표면에 머무는 공간이다. 멈춘 몸 위로 스며드는 감정의 진동, 나는 그것을 작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이 시공의 멈춤 행위를 통해 그는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피붙이와의 관계 부재의 한을 감정의 진동으로 풀어내는 것인데, 굿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제의는 의도치 않은 결과, 즉 아버지의 생명이 예술의 창조라는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전화하는, 작가로서 한층 진화하는 계기를 불러온다. 이로써 아버지의 부재로 상징되었던 인간의 고통은 축복으로 변화한다. 달리 말하면 삶의 지난한 고통의 자리는 은총을 부여받는, 곧 그 자리인바, 고통과 은총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죽음과 삶의 순환: 예술적 승화의 은총
이처럼 물질의 육체를 입고 태어난 생명은 원죄로서 고통과 허무, 육체를 통한 정신적 승화의 은총을 동시에 수반한다. 그래서 생명과 고통, 그 고통의 소실점인 죽음은 상극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순간에서 조우하는 일체의 순환적 삶의 다른 양태인 것이다. 이 순환의 삶에서 생명이 비의도적이듯 고통 또한 비의도적이어서 스스로 피할 길은 없다. 단지 제의를 통해 고통을 견디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은총, 즉 초월의 은혜를 기대할 뿐이다.
조선희가 죽은 육체에 물을 채워 얼리고 다시 녹이는 행위는 이렇듯 초월적 은총을 위한 제의일터, 그리고 거기서 잉태하는 새로운 생명이 조선희에게는 창작의 예술적 승화일터, 그래서 그의 작업이 얼거나 녹는 과정에서 포착한 빛의 순간성, 발골에 가까운 발가락이 드러낸 섬뜩한 이질감, 흰 얼음과 검은 사체의 단색적 시린 대비, 얼음의 미세한 결 속에 긁힌 채 드러난 사체의 현란한 색의 향연, 죽음을 앞둔 생명의 몸부림을 상징하는 듯 웅크린 사체의 떨림, 여덟 폭짜리 병풍으로 장례의식을 연상케 하는 극적인 구성, 작은 구멍에 필멸의 파토스를 압축한 돈오(頓悟)의 영상으로 죽음과 삶의 사유를 던지는 것이라면, 나에게 또 관람객에게 그것, 그러니까 새로운 생명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과 사가 주는 감각의 끝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이미지들의 이중적 혼선을 따라 위층 전시장에 이르러 눈에 들어온 창문 밖의 지붕들, 가을 끝이거나 겨울 첫 자락에 아직 푸름을 잃지 않은 나뭇잎들, 그 아래 북적대며 살고 있을 사람들. 이 모든 걸 해탈한 듯, 그러나 날카롭게 바라보는 얼어붙은 사체의 흘러내리는 눈은 지금 네가 사는 세상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 이 글은 『사진예술』, Vol. 440(2025. 12), 「이달의 사진가 조선희」에 실린 리뷰이다.

2층 전시 전경, 사진:조아조아스튜디오

3층 병풍 전시 전경, 사진:조아조아스튜디오

<Frozen Gaze_401804>, 조선희